[지만원 다큐소설 전두환] <2> 인물 박정희와 인물 전두환 인물 박정희
1965년 6월22일 박정희는 단절됐던 한국•일본 간의 국교를 텄다. 1951년 10월부터 15년에 걸쳐 1500여 회의 크고 작은 회의를 통해 지루한 밀땅으로 일관해 오던 한•일회담에 종지부를 찍고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무상 3억 달러•유상 2억 달러 그리고 상업차관 3억 달러, 계 8억 달러를 받아 경제 건설의 씨앗을 마련했다. 여기에서 더러의 사람은 일본으로부터 받아낸 것이 무상 3억 달러뿐이라고 말한다. 윤석열정부 역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의 정당성을 설명할 때 일본으로부터 3억 달러를 받았다고 했다. 이들 모두가 빙산의 일각만 본 것이다.
당시 박정희는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경부고속도로도 뚫어야했다. ‘산업의 핵’이라는 제철 공장도 꼭 가지고 싶었다. 소양강댐도 건설해야 했다. 미국에 매달려 보고, 세계은행(IBRD)에 돈좀 빌려 달라고 애걸했지만 차디찬 비웃음만 받았다. 쥐를 잡아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수출하고,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수출해도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돈을 빌려주는 나라는 그야말로 하느님이었다. 유상 2억 달러와 상업차관 3억 달러가 무상이 아니라고 해서 무시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다. 8억 달러 모두가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였던 것이다.
이 8억 달러도 일본에서 받아낸 돈의 전부가 아니다. 한•일회담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일본이 36년동안 한국에 건설한 사회간접자본과 오늘날 한국 대기업의 모체인 기업들의 자산을 합친 23억 달러 상당을 일본에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이 23억 달러는 얼마나 큰 돈이었나?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을 한 1948년 당시 조선왕조가 물려준 자산이 불과 4억5000만 달러, 일본이 물려준 자산이 23억 달러였다. 일본이 남기고 간 자산이 총 국가자산의 80% 이상을 차지한 것이다. 이 엄청난 23억 달러를 일본은 한•일협정에서 더 이상 소유권 주장을 하지 않기로 포기한 것이다.
국교가 트였으니 대사가 교환됐다. 1966년 제2대 주한 일본대사 가나야마가 부임했다. 그는 굉장한 지한파였다. 그의 소원에 따라 유골 절반이 지금도 대한민국 파주에 묻혀있다. 하루는 박 대통령이 가나야마 대사를 불러 술상을 마주했다. 한잔씩을 나누고 나서 박정희가 가나야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길에는 따뜻한 정감이 흘렀다. 가나야마의 마음이 흔들렸다. 깐깐한 줄로만 알았던 대통령의 정감어린 눈매가 감당이 안되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긴장도 되었다.
“임자, 당신 누구요?”
다정다감했던 눈길과는 어울리지 않게 입에서는 마치 판사의 인정신문과 같은 딱딱한 말이 나왔다.
“아, 네네 각하. 저는 일본국 수상 각하의 전권을 부여받고 대한민국에 부임한 주한 일본대사 가나야마 올습니다.”
이 긴장한 대사에게 대통령은 술 한잔을 더 권했다.
“임자, 당신은 일본 수상이 주는 임무만 수행하지 말고, 나를 위한 대사가 될 수 없겠소?”
“아, 네네 각하. 분부해 주십시오.”
대통령은 준비한 봉투를 내밀었다.
“각하, 제가 열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일본 수상에게 포항에 제철 공장을 지어달라는 단순 명쾌한 부탁의 편지였다.
“어떻소?”
“네네 각하, 제가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가나야마는 그 편지를 절차상 일본 외상에게 먼저 제출하도록 돼 있었지만, 그렇게 원칙대로 하면 박 대통령의 뜻을 관철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수상에게 직접 전달하면서 수상을 설득했다.
“수상 각하, 일본 외교의 핵심은 강대국에 있지 않고 한국에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수상 각하에게 부탁하는 것이니 각하께서 직접 해결해 주시면 두 나라 관계가 돈독해질 것입니다.”
그는 외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수상을 설득했다. 밤중이었다.
수상이 일본의 제철왕 이나야마를 불렀다. 밤중에 달려온 제철왕에게 수상이 말했다.
“한국 포항에 제철 공장을 지어줍시다.”
“수상 각하,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제안입니까? 한국은 지금 손톱깎이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합니다. 이런 나라에 무슨 제철 공장입니까? 헛수고만 하는 것입니다. 뭘 모르고 부탁하는 것이니 무시하십시오.”
이에 가나야마가 나섰다.
“회장님, 그렇게 무시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육사를 나온 수재입니다. 추진력과 애국심이 대단한 인물입니다. 모처럼 수상 각하께 직접 부탁한 것인데 가벼이 여기면 일본 외교에 데미지가 큽니다.”
고개를 숙이고 경청하던 수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나야마 회장님, 공장 지어줍시다.”
청구권 자금 중에서 1억2000만 달러를 풀어 103만t 규모의 제철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공장 전체가 일본의 기술과 설계와 감리와 부품들로 구성됐다. 박태준은 철저한 현장관리자였다. 1973년 7월이었다. 5년이 지난 1978년 8월 평소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말해오던 중국 덩샤오핑이 일본 도쿄 부근에 있는 ‘기미쓰’ 제철 공장을 찾았다. 그를 안내한 이나야마 회장에게 덩샤오핑이 간청했다. “포항제철과 같은 공장을 중국에 지어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이나야마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어서 어렵습니다.” 이에 덩샤오핑이 박태준을 초청했다. 이처럼 제철 공장은 모든 국가의 로망이었던 것이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에 필이 꽂혔다. 미국과 세계은행을 찾아갔지만 모두 콧방귀만 뀌었다. 이 역시 돌파구는 일본뿐이었다. 일본이 청구권 금액에서 690만 달러를 투입하는데 동의해 주었다. 이후 일본의 기술과 자본이 울산 정유공장•나주 비료공장•소양강 댐 그리고 수많은 산업기반 구축 사업들에 투입되었다.
6.3 사태
‘국가와 혁명과 나.’ 박정희가 혁명을 하면서 손글로 쓴 메모형 책자다. 책에는 박정희가 경제에 대해 고뇌한 흔적이 실려있다. 실업률은 30% 이상인데 인구증가율은 높고, 먹거리는 고갈되고, 그나마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인체에 기생충들이 들끓어 영양을 빨아가고, 전염병은 도는데 약은 없고, 미국이 주는 원조로는 현상유지조차 어려운데다 미국의 원조는 돈이 아니라 잉여농산물과 유연탄과 석유이기 때문에 이를 가난한 한국 시장에 팔아 그 돈으로 세출예산을 세우면 그나마 고관대작들이 달려들어 축재 수단으로 떼어가고 있는 현실을 한탄하는 글이었다.
농업경제시대, 경제의 터전인 농촌은 미국에서 잉여농산물이 유입되면서 곡물값이 떨어져 사람들은 서울로 서울로 올라오고, 그나마 남은 사람들은 희망을 잃고 노름이나 하거나 마약을 하고 술 마시며 자학하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서울의 지식인들은 스스로를 ‘조센징’이라 부르며 ‘조센징이 뭘 해?’ 하며 자학을 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우리 모두 함께 잘살아보자.” 직접 노래를 지어 ‘새마을운동’을 펼쳤다. 농촌에 읽을 것들을 보내주고, 새마을 성공 스토리를 전파하고, 새벽종이 울리면 마을의 길을 만들고 공공시설을 만들고 지붕을 개량하고 종자를 개량했다. 쥐털로 코리안밍크를 만들어 해외에 내다 팔고,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수출했다. 월남전에 파병하고, 월남의 더위와 정글에서 단련된 제대병을 뜨거운 모래바람 세차게 몰아치는 중동지역에 건설전사로 내보내 월남특수와 중동특수를 만들어 산업자금을 마련했다.
얼굴에 살이 붙을 여유조차 없이 자다가도 일어나 아이디어를 내고, 골똘히 생각하며 추진하고 있는 이 국가건설 현장에, 말 공양을 퍼붓고 손뼉을 쳐주어도 시원치 않을 눈물 나는 현장에, 깽판치는 협잡꾼들이 뛰어들었다.
북한 김일성 집단이 뛰어들었고, 간첩의 조종을 받는 학생시위•노동자시위가 이어졌다. 이들을 선동하는 건달정치꾼들이 극성을 부렸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방해하기 위해 인부들이 한창 땀을 흘리고 있는 작업현장으로 달려가 큰 대 자로 누웠다. 이들에게는 인부고 땀이고 보이는 게 없었다.
간첩 ‘이석’으로 하여금 4.19 폭동을 사주시켰던 북한은 한•일국교정상화를 가로막기 위해 학생들을 선동하여 1964년 6월3일, 이른바 6.3사태를 일으키게 했다. 여기에 앞장선 학생들이 바로 이명박이고 이재오이고 손학규였다. 이재오는 1979년 일망타진된 남한 최대의 간첩사건인 ‘남민전’의 골수 멤버였고, 손학규는 기업도산을 일삼던 위장취업자였다.
이명박은 서울시장을 하면서 평양에 참모들을 세 차례씩이나 보내 평양시를 리모델링 해주겠으니 자기를 초청해달라 했고, 대통령이 되면 경제를 도약시키겠다며 ‘경제대통령’을 세일즈 간판으로 내걸었지만 정작 대통령이 되자 경제에 대해서는 상황처리에만 급급했을 뿐, 새로운 먹거리 기반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는 경제인이 아니라 청계천 사업과 4대강 사업에 제한된 토목건설자에 불과했고, 대통령이 돼서도 낮에는 우익행세, 밤에는 좌익단체들에 돈봉투를 보내는 이중생활을 했다. 마치 월남의 고위장성이나 고관대작들이 출근길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베트콩에 금일봉의 뇌물을 준 사실들과 일맥상통하는 그런 이중생활이었다.
인물 전두환
전두환은 1980년 8월21일부터 1981년 2월24일까지 7개월 동안 최규하의 잔여임기를 채웠다. 그리고 유신헌법에 보장된 7년 동안의 임기인 1981년 2월25일부터 1988년 2월24일까지 제12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가 취임했을 때 한국경제는 임종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세계는 예외 없이 1974년의 제1차 오일쇼크에 이은 제2차 오일쇼크에 휩싸였다. 빚이 많은 기업들은 고환율에 시달렸다. 도매물가 상승률이 44.2%, 자고나면 물가가 오르니까 돈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너도나도 사재기를 했다. 사재기를 하니까 상품과 곡식이 품귀현상을 일으켜 물가는 더욱 가파르게 올랐다.
한국경제가 ‘한강의 기적’이라는 명성을 얻자 해외 은행들은 한국 기업이 꿔달라면 달라는대로 마구 꿔줬다. 기업들은 대개 기계를 사용하는 조립기업들인데다 공단에 옹기종기 몰려있어 서로 질투를 했다. 새로운 제작기계들을 수입하는데 경쟁적이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중복투자를 하다 보니 생산이 과잉되어 공장 가동률이 10% 이내로 추락했다. 이웃에 자랑했던 비싼 기계들이 애물단지가 되었다.
돈이 벌리지 않는 기업들은 외채를 갚을 능력이 없어 외채를 얻어 이자를 갚는 처지들이 됐다. 기업에는 돈이 고갈되고, 개인들은 사재기에 돈을 써버리기 때문에 저축이 없었다. 저축이 없으니 기업들은 한국의 은행에서 돈을 꾸지 못하고 외국은행에서만 돈을 꾸어썼다. IMF가 코앞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박정희 대통령 말기의 한국경제였다. 경제를 아는 모든 식자들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바로 이런 경제의 임종 시기에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올라섰다. 그는 육사생도 시절에 축구선수였다. 사람들은 그가 무슨 경제를 알겠느냐고 걱정을 했다. 군 출신이 물에 빠진 경제를 무슨 수로 건져 올릴 수 있겠느냐, 한참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전두환은 어이없게도 88국제올림픽을 유치하겠다며 팔을 걷어부쳤다.
“석두야, 석두~. 미치지 않고서야~. 에휴~ 답답해….”
하지만 그는 저돌적으로 밀어붙였다. 드디어 그는 만세를 불렀다. 1981년 9월30일, 독일의 남쪽도시 바덴바덴에서 사마란치 위원장이 서울 52표, 나고야 27표, 서울을 88올림픽 개최지로 선포한 것이다. 전두환은 환희에 차 있었지만 주위의 모든 참모와 각료들은 감당할 대책이 없어 망연자실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전두환에게 대책은 있었는가? 도대체 무슨 돈으로, 도대체 무슨 실력으로 경제를 극복하고 그 많은 투자비를 마련하겠다는 말인가!
1981년 1월20일 전직 영화배우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전두환은 레이건에게서 돌파구를 찾으려했다. 그가 혼자만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 너무나 엉뚱해서 누구와 의논할 수도 없었다. 그는 가까이 지냈던 초대 한미연합군사령관 베시 대장에게 간곡히 부탁해 레이건을 빨리 만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전두환은 레이건을 유혹하기 위해 두가지 낚싯밥을 전했다.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추구해왔던 핵무기 개발을 일체 중단하고, 핵을 에너지로만 사용하겠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제한했던 자유를 대폭 완화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레이건 대통령이 매우 반길 수 있는 미끼였다. 여기에 더해 레이건은 대 공산권 매파였고, 전두환도 대 공산권 매파라 코드가 일치했다.
레이건에게는 ‘회색주의자인 카터’가 어지럽힌 동맹관계를 복원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급선무였다. 수많은 동맹국이 있지만 그중 가장 모범적인 동맹이 한국이었고, 한국은 미국 외교정책의 대표적인 성공 케이스였다. 그래서 레이건은 외국 정상 중 가장 먼저 전두환을 만나기로 했고, 만나는 그 날은 취임한지 불과 13일 만인 2월2일이었다.
“각하, 세계 정상 중에서 본인을 가장 먼저 만나주신 것은 본인에게 크나큰 영광입니다. 각하께서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취임하시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각하, 저는 각하를 도와드리고 싶어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이 엉뚱한 말에 회담장에 있는 미국 사람들은 물론 동행했던 참모진과 장관들 모두가 놀라고 긴장했다. 모두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제까지 한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을 만나면 원조액수를 늘려 달라, 신형 전투기를 사게 해달라는 등 아쉬운 말부터 했는데, 그런 한국이 무엇을 가지고 미국을 도와주겠다는 것인가? 회담 공간에 숨소리조차 멎었다.“
“각하, 죄송한 질문이지만 미국 캘리포니아 주 연간 GNP(국민총생산)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정상회담에 어울리지 않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은 레이건도 모르고, 그 자리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또다시 장내는 고요하게 얼어붙었다.
“각하, 제가 알아봤더니 연간 800억 달러입니다. 그럼 대한민국의 연간 GNP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또다시 조용해졌다.
“600억 달러입니다.”
모두가 놀랍다는 듯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한국의 GNP가 미국의 1개주의 것보다 적다니!
“그럼 일본의 연간 GNP는 얼마인지 아십니까?”
아무도 몰랐다.
“1조 1600억 달러, 한국 GNP의 20배입니다.”
“각하, 대한민국은 자유 진영의 최일선에서 이 보잘 것 없는 GNP에서 매년 6%를 떼어내 공산세력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가 거의 파탄날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반면 부자나라 일본은 GNP의 0.09%만 떼어내 방위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분명 땀을 흘리는 대한민국의 그늘에서 무임승차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공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미국의 돈을 달라하지 않습니다. 일본 돈을 제게 주십시오. 그러면 그 돈으로 저는 미국으로부터 전투기도 사고 탱크를 사겠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신선한 충격을 느낀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얼마가 필요하신가요?”
“일단 일본에 각하의 뜻만 알려주십시오. 액수는 실무선에서 해결하겠습니다.”
이 말에 가장 놀란 사람들은 대통령을 수행한 참모진과 장관들이었다. 자기들로서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돈키호테식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내 자기들끼리 너무 엉뚱하다며 수근들 댔다. 그후 2개월이 지났다. 1981년 4월22일, 전두환은 외무라인을 통해 일본 스즈키 수상에게 100억 달러 청구서를 보냈다. 일본측 역시 경기를 일으켰다.
“뭐라고? 100억 달러? 동그라미가 하나 더 붙은 거 아냐? 10억 달러라 해도 너무 무례하지, 도대체 근거가 뭐야? 무례가 지나치구먼. 대꾸도 하지마.”
전두환 주변에서도 전두환은 매우 엉뚱하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수근댔다. 국제 망신이라고까지 했다. 이듬해인 1982년 1월27일에 ‘나카소네’가 수상에 올랐다. 나카소네는 관례에 따라 서둘러 레이건 대통령을 만나러갔다. 그리고 1년 후인 1983년 1월11일, 나카소네가 한•일정상회담을 제안해 한국을 방문하여 두 차례에 걸쳐 정상회담을 했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그동안 일본은 사실 한국에 대해 미안한 입장에 있었습니다. 제가 최소한 60억 달러 정도를 마련해 보려고 백방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60억 달러를 마련하려면 제 위치가 흔들릴 수 있어서 최대한으로 마련한 것이 40억 달러입니다. 이 돈을 수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8년 전인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에서 받아낸 돈이 8억 달러이다. 40억 달러면 5배가 아니던가! 나카소네는 전두환보다 13년 연상이다. 이후 전두환과 나카소네는 친구처럼 형제처럼 우정을 나누었다. 전두환이 임기를 끝내자 레이건과 나카소네는 각기 사인이 된 전두환을 초청해 융숭한 대접을 했다. 이런 대접 받은 사람 이 나라엔 전두환 말고 없다.
한강은 서울의 아이콘이다. 1965년에 350만 명이었던 인구가 팽창하여 1000만 명이 되었다. 상수도 소요량이 팽창했지만 취수원인 한강은 날이 갈수록 오염이 심화되었다. 공장폐수•축산폐수•인분이 유입되고 주변을 감싸고 있는 논과 밭으로부터 또다른 축산물의 인분과 퇴비가 마구 유입됐다. 가뭄이 들면 바닥이 드러나 악취가 먼 거리에서까지 진동하고 홍수가 나면 논과 밭이 쓸려나갔다.
‘한강종합개발사업’, 전두환은 일본에서 받은 40억 달러 중 10억 달러를 털어내 시궁창급의 한강을 오늘날의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바꾸었다. 한강 양안을 따라 54.6㎞의 초대형 콘크리트 관을 묻어 한강으로 유입되는 모든 오폐수를 통과시켜 중랑•탄천•안양•난지에 있는 하수처리장으로 보내 정화시켰다. 210만평의 한강공원을 만들고, 그 위에 유원지•낚시터•자연학습장•주차장•자전거도로•산책로•체육공원 등을 조성하고 강에는 유람선을 띄우게 했다. 수중보를 설치해 한강을 홍수도 없고 가뭄도 없는 평균 폭 1km의 기나긴 호수로 가꾸었다. 88올림픽도로로 명명된 한강변 남로와 북로를 건설하고 수많은 교량을 건설하고 중랑천까지 개발해 그 양쪽을 달리는 중부간선도로를 건설했다.
일본 돈으로 지하철공사를 설치하여 3•4호선을 건설했고, 방대한 올림픽촌과 올림픽공원•체육촌을 건설하여 올림픽 역사상 가장 성대한 올림픽을 치렀다. 1988년 9월17일부터 10월2일까지 16일동안 열린 88서울올림픽에는 자유진영 국가와 공산진영 국가가 모두 참여하여 보이콧 없는 첫 올림픽이 되었다. 160개 국으로부터 선수와 관람객이 모였고, 지구촌 104억 명의 시선을 끌어 아름답고 자유로운 분위기와 도우미들의 친절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공산권 와해에 커다란 동력으로 작용했다. 관광객이 늘어나서 김포공항으로는 소화를 하지 못해 인천국제공항을 건설하게 되었다. 국력이 한순간에 팽창된 것이다.
제2의 포항제철인 한국형 원자로! 지금 현재 독자적 핵연료봉과 원자로를 보유한 나라는 미국•한국•중국•러시아 4개국뿐이다. 한국형 원자로는 외화벌이 수단일 뿐만 아니라 외교분야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 외교수단이기도 하다. 당시 한국이 원자로 독자모델을 개발한다는 것은 과학계의 불가사의로 통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지도자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1983년 7월 전두환은 한전•에너지연구소•원자력연료주식회사•한국중공업등을 망라하여 상시 회의체인 ‘원자력발전 기술자립촉진 대책회의’를 가동시켰다. 핵연료 국산화가 첫 목표였다. 한필순 박사가 주도하는 기술팀이 ‘중수로’ 연료 국산화에 쾌거를 올렸다. 전두환은 한필순 박사에게 가능성을 걸었다. 현장에 나간 전두환은 한필순 박사에게 “적극 지원할테니 ‘경수로’ 연료를 국산화 하시오.” 전두환은 그의 의지를 한필순의 손을 꼭 잡아주는 것으로 표현했다.
전두환은 한필순을 대덕공학센터의 센터장 자리와 핵연료주식회사 사장 자리를 겸임시켰다. 그를 상시적으로 도와주기 위해 한국중공업 사장인 박정기를 한전사장으로 임명했고, 김성진 박사를 체신부 장관에서 과기처 장관으로 옮겼다. 박정기는 전두환의 육사 3년 후배였고, 김성진은 동기생이었다. 에너지연구소가 경수로 원료를 개발하려면 한전으로부터 용역을 받아야하고, 한전의 예산을 배정해주는 권한은 과기부 장관에 있기 때문이었다.
경수로 연료봉 자체개발은 중수로 연료를 개발하는 것보다 한층 더 어려운 과제였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밀어주었기에 경수로 연료봉은 1983년에 완전 국산화가 됐다. 핵연료는 비싸기도 했지만 해외공급업체의 거드름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원자로는 가동되고 있는데 연료를 구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실상 종속국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굴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두환이 앞장선 것이다.
한숨을 돌린 전두환과 한필순은 1984년에 다시 만났다. 전두환이 한필순을 청와대로 불러 활짝 웃으면서 한필순의 손을 두손으로 감쌌다.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데 대해 경의를 표한다고 추켜올렸다. 사실 그러했다.
한필순은 또 무슨 일을 시키려나 하고 긴장했다.
“한 박사, 한국형 독자 원자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을 독자기술로 만들 수 없소?”
‘이크,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놀란 한 박사, 대답이 궁했다. 사실 이건 100% 불가능한 주문이었다.
“각하, 그건 좀….”
이 표현에 전두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 된다는 거요?”
사실 ‘그건 불가능합니다. 한국 기술이 거기까지 가려면 요원합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이 한국 원자력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인식입니다.’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어느 안전이라고 이런 말을 하겠는가?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눈치 빠른 전두환이 한필순의 마음을 읽고 물었다.
“이보게 한 박사, 포항의 모래바닥에 포항제철을 누가 건설했소?”
“그거야 박태준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지원으로 건설 했습지요.”
“포항제철도 맨 땅에 헤딩해서 건설했으면 한국형 원자로도 맨 땅에 헤딩하면 개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한 박사가 할 말을 잃었다.
“한 박사가 박태준이 되든지, 박태준을 구해 보든지 하시오. 얼마면 되겠소?”
10년이라 말해도 거짓말인데, 10년이라고 말하면 곧 날벼락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네, 5년만 주십시오.”
“알았소. 적극 지원하겠소. 가보시오.”
청와대에서 나온 한필순은 지옥문을 통과한 기분이었다. 사무실에 돌아온 그는 며칠간 식음을 전폐했고, 얼굴에 노랑병이 걸렸다.
“청와대 다녀오시더니 왜 저러시나~.”
주위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선임연구원 이병령 박사가 한 박사를 찾아갔다.
“소장님, 무슨 고민 있으십니까?”
한필순이 고민을 털어놨다. 그런데 이병령이라는 젊은 박사에서 당찬 소리가 나왔다. “에이, 소장님, 아 그까짓 거 가지고 웬 고민을 그렇게 하십니까? 이 세상에 없는 물건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개발한 것 아닙니까? 그 사람들도 했는데 우리라고 왜 못합니까?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의외의 이 시원시원한 말에 한필순의 노랑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이 박사, 고맙다. 우리 한번 해보자.”
한 박사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1985년 7월, 프로젝트는 에너지연구소가 한전으로부터 한국형 원자로 개발사업 용역을 받는 단계로부터 출발했다. 에너지연구소가 원청업체가 되어 설계기술을 가진 미국CE(컨버스천 엔지니어링)를 하청업체로 선정하는 묘안을 짜낸 것이다. 이병령 박사는 70여 명의 과학자들을 인솔하고 미국 CE사에 가서 원자로 설계를 함께 개발했다. 이것이 한국형 원자로가 되었고, 이 기술로 영광 3•4호기, 이어서 울진 3•4호기가 있따라 건설되었다.
이렇게 피땀으로 개발한 자랑스런 기술을 문재인이 파괴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전두환은 국가를 건설했지만 문재인은 민주화의 간판을 내걸고 국가를 파괴했다. 손학규가 가졌던 종교 “자고 깨면 대한민국을 도끼로 찍어 내릴 궁리만” 했던 것이다.
서울구치소에서 지만원
(스카이데일리 2024년3월2일)
'근 현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40년만에 공개된 518 현황 (0) | 2024.03.15 |
---|---|
산업화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 박정희 (4) | 2024.03.12 |
이승만 1편 부터 10편 (0) | 2024.03.10 |
이승만 (2) | 2024.02.29 |
이승만과 박정희는 ‘진보 우파’ 혁명가… 기득권과 싸우며 건국·부국·호국 이뤄 (2) | 2024.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