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 *
'이승만 날강도 짓에 당한 트루만대통령'의 말 <선지자인줄 알았는데 날강도네>
이승만은 미국에 건너가서 수 십 년동안
미국의 학자 정치인 외교관 언론인 군인들을 만나 한결같은 주장을 늘어놓았다.
그 내용으로 강연회에서 연설하고 그 내용으로 책을 썼다.
그 책의 제목은<JAPAN INSIDE OUT>
일본의 속내를 폭로한다!
일본이 조선 반도를 집어 삼켰으니 그 다음은 만주를 먹고 중국을 침략하고
여러 나라를 침략하고 나서 그리고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을 쳐들어올 것이다!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한 판 승부를 벌여야 할 것!
일본의 팽창을 막고 일본을 다시 일본 본토로 돌아가게 하려면 조선을 독립시켜라!
그러자 미국 학자들과 정치인들은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당시 일본과 미국은 좋은 관계였고 그 넓은 태평양을 넘어 일본이 공격하리라고는 꿈도 꿀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JAPAN INSIDE OUT>이 출간 된 지 반 년이 못되어서 하와이 진주만 공습이 터진다!
이승만의 책 <JAPAN INSIDE OUT>은 단숨에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미국의 학자들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했다.
수 십 년에 걸쳐 일본의 침략을 예언한 인물을 못 알아보았구나...
그러면서 이승만을 하나님이 그 시대에 세운 선지자로 알고 존경했다.
그 후 태평양전쟁에서 이승만의 절친 더글라스 맥아더가 지휘하는 미군은 일본군을 몰아냈고 일본은 패망했다.
우리나라는 큰 피흘리는 전쟁 없이 독립을 얻었다.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중국 조선족 부대를 앞세운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발발한 민족의 비극 6.25!
3년 간의 혈전 끝에 휴전협정이 맺어지려 할 때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했고 북진통일을 외쳤다.
미군도 소모전에 지쳐갔고 미국 내 여론도 휴전 쪽으로 방향이 정해졌을 때 유독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이승만이 내놓은 휴전의 조건은 한미상호방위조약!
1953년 10월 1일 조인,
1954년 11월 18일 발효...
미국 앞에 이승만은 거의 날강도였다.
거제도 반공포로를 맥아더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석방시킨 사건을 듣고
맥아더는 친구 이승만을 "오~ 나의 십자가"라고 불렀다.
이승만이 내놓은 휴전 조건을 볼 것 같으면
미국아 ~ 6.25 전쟁 휴전을 하려면...
1. 경제 지원해달라!...
그래서 결국 당시 한국의 1년 수출액의 34배 되는 돈을 받았다.
그래서 전쟁 후 잿더미 위에서 굶어죽지 않고 다시 나라를 일으킬 수 있었다.
2. "in and around Korea에 미군을 주둔 시킨다고 약속해라!"
그래서 오늘까지 미군이 이 나라 지켜준다.
한반도에 미군 주둔은 북한 인민군 복무기간이 10년에 비해 내 아들 군 복무기간 1년 6개월!
이를 가능케 했고 한국 경제발전의 기본 바탕이 되었다.
만약 한국 군대 의무복무 기간이 5년이라면 이 나라 경제는 결코 오늘과 같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승만은 고약한 코미디언이었다.
3. "너희 미국이 침략을 받으면 그 때는 우리가 가서 싸워주겠다"
(태평양 건너갈 배 한 척도 없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태평양 헤엄쳐 건너가서?... ㅎㅎㅎ)
이렇게 미국과 한국 사이에 "상호방위(相互防卫)" 조약을 맺자.
상호 조약이니까 평등한 조약 맞지?
여기 싸인 하셔!
이것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핵심이다. 미국이 외국에게 당한 최초이자 마지막 불평등조약이었다.
이 약속을 해주면 휴전할 때 내가 큰 인심 써서 입 다물고 있어줄 게...!!!
우리나라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그렇게도 못 된 사람이었다.
평생의 친구 맥아더 뒤통수 치던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나라에 참전해서 3만 6천 여 명이 죽은 미군...
그 미국에게 더 내놓으라고 말하는 뻔뻔스런 이 나라의 아버지였다!
당시 미국 트루먼 대통령 왈(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후)
"이승만 그 날강도에 또 당했어! 도대체 한국이 무슨 힘이 있다고 미국에 전쟁 나면 한국이 도와줄 테니 한반도에 전쟁 나면 한국 병력의 9배 이상을 의무적으로 보내야 하는 거야?
또 인계철선은 뭐야. 우리 청년들을 북한이 내려오는 길목에 박아 놓고 공격받으면 미국이 자동 참전해야 된다니. 그리고 한국이 제자리 잡을 때까지 한국 국방비를 미국이 전액 대라는데 아무리 스탈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무슨 이런 조약에 사인을 하고 온 거야?"
ㅎㅎㅎ 이쯤되면
이승만은 날강도였다! 인정!
***************************
미군이 없었으면...
김구가 김원봉이 300여명(제일 많았을 때) 광복군 이끌고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수 백만 일본군을 몰아내고 독립을 이룰 수 있었을까?
그 당시 일본군의 규모를 보자면...
중국 본토에 관동군 125만 만주국군 40만 일본 본토에 200만 이상 필리핀 버마 베트남...
태평양에...
어마어마 한 일본군 항공모함이 십 여 척....
항공기, 탱크, 대포...
제일 많았을 때 300 여 명에불과했던 광복군이 그 엄청난 일본군을 무찌르고 독립할 수 있었을까?
1940년에 창설된 광복군은
1945년 일본 패망할 때까지 일본군과 단 한차례의 전투도 치르지 않았다.
광복군은 중국 국민당군대에 예속되어 국민당에서 군복도 주고 국민당에서 총도 주고
국민당 군대가 훈련도 시켜주고 밥 먹여주고 월급 주고 지휘권은 당연히 장졔스에게 있었고
독자적인 작전권한은 없었다.
미군이 없었으면...
그 큰 쏘련 그 큰 중국을 등에 없고 쏘련제 탱크 앞세워 조선족 중공군 앞세워
김일성과 공산당이 선전포고 없이 기습남침으로 처내려온 6.25!
그 피눈물 나는 비극의 전쟁을 이만큼이나마 막아내고 이만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번영을 이룰 수 있었을까?
미군이 없었으면...
북한군 10년 넘게 군생활 할 때, 우리 나이 때 30개월, 지금 전방 간 울 아들 18개월로 병역을 필할 수 있었을까?
미군이 없었으면...
벌써 뙤놈들 세상 로스깨(소련) 세상 되었고
미군 없었으면 김가왕조 치하에서 굶어 죽었든지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이 부끄러운 역사 이 부끄러운 현실이 우리 민족의 팩트이다.
이제 박정희 이후에 밥 좀 먹고 사냐?
과거를 잊고 눈 먼 족속아
학교에서 전교조 멍청이가 뭐라 가르치는가 이승만이 독재자란다
세계 3대 독재자였단다...!!!
이승만이 없었다면
우리는 김가왕조 치하에서 위대하신 수령 찬양하다 밥 굶어 죽었든지
영양실조 펠라그라로 빌빌거리며 살고 있을 거다.
현대자동차 삼성 스마트폰은 꿈 속에 나타날 수나 있었을까?
뭐 교회다녀?
예수 믿어?
풋!
공개총살!
선지자 같은 날강도 이승만 덕에 이만큼 살고 있는 줄 알고 감사하십시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독립운동을 하느라 밤낮없이 넓은 미국 땅을 돌아다닐 때였어요.
그이는 이곳저곳의 약속시간을 대느라 운전대만 잡았다 하면 과속에다 난폭 드라이버로 돌변했어요. 시속 120km 이상은 예사였지요.”
“워싱턴의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하기 위해 뉴욕을 출발했는데 정상적인 운전으로는 시간을 맞추기 어려웠어요. 그의 무서운 과속은 보나마나 한 일이어서 처음부터 마음을 죄었으나 내가 옆에서 잔소리를 해야 덜 달릴 것 같아 동승했지요.”
시계를 보며 과속을 제지했지만 우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낮에 헤드라이트를 켠 채 신호 무시, 논스톱으로 마구 페달을 밟아댔다.
워싱턴으로 가는 길 내내 질주했으며 여기저기서 클랙슨 소리가 나며 황급히 우남의 차를 피하는 모습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는 2대의 기동경찰 오토바이가 사이렌을 울리며 따라오기 시작했다.
“패트롤카가 나타났어요.”
“걱정 말아요. 나는 잡히지 않아요.”
우남은 스피드를 더욱 올리며 대로를 마구 질주했다.
‘따라오려면 따라와 보라’는 투였다.
“나는 등과 손에 땀이 나다못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어요.”
속도가 시속 140km도 넘었을 것 같았다.
“제발, 오 제발…….”
“여보, 뒤를 보지 말아요. 나를 믿으시오.”
“이때 순간적이지만 ‘이 분과는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차를 탈 때마다 간이 콩알만 해지니 살 수가 있어야죠.”
우남과 기동경찰과의 ‘백주의 레이스’는 우남의 승리.
덕분에 프레스클럽에는 정시에 도착했다.
우남은 연단에 서자 열변을 토하며 대한민국의 독립을 외쳤다.
장내에서는 수십 번의 박수가 터졌다.
프레스 클럽 입구에서 “나오기만 해봐라. 당장 잡아가둬야지”라고 중얼거리며 벼르던 2명의 기동경찰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번 박수를 치고 있었다.
연설이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연설이 끝나고 나오는 우남은 쳐다보지도 않고 경찰이 나를 향해 말했어요.”
“기동경찰 20년에 내가 따라잡지 못한 단 한 명의 교통위반자는 당신 남편이오. 일찍 천당 안 가려거든 부인이 조심시키시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이승만이 별세한 뒤, 5년간 모국인 오스트리아에서 살았다.
1970년 5월 16일 다시 서울 땅을 밟자마자, 프란체스카 여사는 양 아들 이인수(李仁秀, 당시 명지대 정외과 교수) 부부에게 우선 틀니를 하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여사는 속옷 안쪽에 주머니를 달아 그 속에 3천 달러를 넣어 왔다면서 치료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가족들은 그때부터 이 속옷을 「스위스 비밀은행」이라고 불렀다.
그때 입고 온 속옷들은 15년 넘게 사용하다가 지금은 이 박사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여기저기 헝겊으로 꿰맨 자국들이 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고 기념관을 찾는 사람들은 말한다.
며느리 조혜자 씨가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왜 기술이 더 좋은 외국에서 틀니를 하고 오시지 않았느냐고 묻자 "너희 아버님이 독립운동할 때는 1달러도 아까워 하셨는데 어떻게 몇 천 달러를 외국에서 쓰느냐"고 되물었다.
그리고 6·25가 터진 날 아침에도 경무대에서 치과 치료를 받아봤는데 역시 치과 기술은 한국의사가 제일 낫다고 했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틀니는 1970년 당시 메디칼센터 치과 과장 최상렬 박사가 만들었다.
그 후 프란체스카 여사는 외국의 귀빈들이 올 때마다 여기서 틀니를 하고 가라는 말을 잊지 않고 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숨을 거두기 이틀 전 쯤 호흡이 어려워지자, 자신의 틀니를 빼서 침대 머리맡에 놔두었다.
며느리 조씨는 평소 시어머니가 꼭 틀니를 끼고 이 박사를 만나야겠다", "죽기 전에 꼭 끼워달라"고 당부해, 임종 직전에 끼워드렸다는 것이다.
한번은 국립묘지에서 오스트리아 인들이 반가워 하며 오스트리아 사람이냐고 묻자 "아니요 저는 한국 사람 입니다." 라고 했던 오스트리아를 호주로 착각해서 호주댁으로 불리며 가장 저평가된 영부인 프란체스카.
1933년 2월 어머니와 함께 파리 경유 스위스 여행길에 레만 호반의 뤼씨 호텔에 묵었다가 국제 연맹 회의에 참석하는 세계 각국 사람들로 호텔식당은 만원을 이루고 있었고 프란체스카 모녀가 앉은 4인용 식탁 빈자리로 이승만 박사가 합석하게 되었다.
처음 만난 당시 한국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금강산과 양반 제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33살 숙녀와 58살의 이승만은 그런 인연으로 만나서 다음 해 결혼했다.
프란체스카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동양의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곁에서 아내 보다는 비서 역할을 자청했고 영부인으로는 근검절약 했으며 한국인으로 남편 곁에 영면했다.
Amore Grande Amore Libero
... 위대한 사랑.
'근 현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정희와 전두환 (0) | 2024.03.11 |
---|---|
이승만 1편 부터 10편 (0) | 2024.03.10 |
이승만과 박정희는 ‘진보 우파’ 혁명가… 기득권과 싸우며 건국·부국·호국 이뤄 (2) | 2024.02.26 |
해방 순간--이승만과 김구는 어디서 무엇을 했나? (0) | 2024.02.24 |
서지문 교수의 '건국전쟁' 관람기 (0) | 2024.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