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절반”을 노비 삼은 주자학(朱子學)의 나라 조선
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11회>
1614년 문서 한 장에 담긴 노비의 사회사
때론 오래된 낡은 종이 한 장에도 한 사회의 사회경제적 실상이 응축되어 있다. 전라남도 해남(海南) 윤씨(尹氏) 종가 녹우당(綠雨堂)에서 1980년대 초에 발견된 매매(買賣) 문서 한 장이 그러하다. 아래 문서에서 오른쪽 직사각형의 큰 종이가 당사자들이 작성한 본래의 매매문서이고, 왼쪽으로 붙은 세 장의 문서들은 서리들이 정부에서 발급한 매매 증명서다.
이 문서 맨 앞에 적힌 연도는 명(明)나라 만력(萬曆) 42년이다. 서기로 환산하면 1614년. 이 문서에는 18세 종남(終男)이와 5세 말 한 필을 맞바꾸는 과정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18세 사내종을 사기 위해 말을 끌고 온 자는 ‘두잇간(斗伊叱間)’이라 적혀 있다. ‘두잇간’은 뒷간, 곧 변소라는 뜻이다. 그 당시 노비들은 성(姓)도 갖지 못한 채 인격을 비하하고 억누르는 모욕적인 이름만으로 불렸다. 뒷간도 그런 일례이지만 그보다 심한 경우도 수없이 많았다. 인격 모독성 노비 이름들에 대해선 앞으로 차차 살펴보기로 하고······.
뒷간은 관에 속한 시노(寺奴, 이때 ‘寺’는 시라 발음)이거나 절에 딸린 사노(寺奴)일 수도 있다. 이 당시 사료에 등장하는 “寺奴”는 절에 딸린 사노보다는 관에 딸린 시노의 사례가 더 많지만, 여기선 어느 것이라 확정할 수는 없다. 뒷간이 사내종을 사기 위해 말을 끌고 나온 이유는 쉽게 설명된다. 재산의 매매, 처분 같은 궂은일은 주인보다는 수노(首奴), 곧 우두머리 사내종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18세 사내종 종남을 데려와 말과 맞바꾸는 거래 당사자는 고(故) 윤사회(尹思誨)의 부인 김씨(金氏)이다. 문서에는 김씨 부인이 종남이의 노주(奴主)라 기재되어 있다. 종남이의 소유권이 의심의 여지 없이 김씨 부인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법적 형식에 따라 이 문서에는 구체적인 매매의 사유가 기재되어 있다. 부득이 노비를 팔게 된 것은 “전란을 겪고 나서 집안이 궁핍해져 장례를 치를 비용도 없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종남의 신원을 증명하는 노비의 계보가 나온다. 종남은 집안의 계집종 근덕(斤德)의 셋째 아들이며, 근덕은 죽은 남편 윤사회의 사내종 정련(鄭連)이가 사 온 계집종 석금(石今)이의 딸이다. 윤사회가 생전에 사내종 정련을 시켜서 계집종 석금을 사 왔고, 석금은 근덕을 낳았고, 근덕은 또 종남을 낳았다. 이 사실을 기록한 이유는 종남이 그 집안 소유의 사내종이라는 사실을 법적으로 증명하기 위함이다. 본래 노비의 신원은 모계로 추적하고 확인한다. 암소 주인은 그 암소의 새끼들에 대한 소유권을 갖게 되는 이치와 같다.
문서 말미엔 김득록(金得祿)과 김득명(金得命) 두 명 증인의 성명이 기재돼 있으며, 그 옆에 직접 붓을 들고 문서를 작성한 필집(筆執, 문서 작성인) 김우(金遇)의 이름도 있다. 증인으로 참여한 김득록과 김득명의 이름자 앞에는 양반 신분을 알려주는 유학(幼學)이라는 칭호가 붙어 있다.
왼편으로 덧붙인 세 장의 작은 문서들은 정부에서 발급한 증명서들이다. 문서를 작성한 51세의 김우, 증인으로 참여한 연령 미상의 김득록과 32세의 김득명이 이 문서를 들고 관아로 가서 매매가 합법적으로 이뤄졌음을 확인해달라 청원하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지방정부 현감(縣監)의 명의로 매매의 합법성을 확인하고 공증하는 문서가 발급되었다.
이로써 말과 교환된 종남과 이후 태어날 그의 자손들에 대한 소유권은 다른 주인에게로 넘어갔다. 문서 끝에 자자손손 대대로 “영영방매(永永放賣, 영원히 팔아치우다)”한다는 구절이 특히 눈에 띈다. 종남이 계집종이 아니라 양녀(良女)와 혼인하여 자식을 낳을 경우, 그 소유권이 모두 종남의 주인에게 넘어간다는 의미이다.
짧다면 짧은 이 문서에는 모두 10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중 다섯 명은 노비, 나머지 다섯 명은 평민이나 양반 신분이다. 실명이 나오진 않지만, 지방 관아의 서리들과 현감도 등장하여 증명서를 발급하여 소유권 이전을 법적으로 공증하는 역할을 한다. 이 문서를 통해서 우리는 최소 다섯 가지의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 1610년대 조선 전라도에서 18세 노(奴) 1구(口, 노비를 세는 단위)와 5세 말 한 필(匹)이 일대일로 교환된 사례가 있다. 이는 노비 한 명의 가격을 말 1필 가격에 해당하는 “저화(楮貨) 4천 장”이자 666일의 노동이라 명시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에 대체로 부합한다.
2. 노비의 소유권은 모계로 추적하며, 정부가 그 법적 효력을 보증한다.
3. 노비 매매의 현장에는 최소 2명의 증인이 참석한다.
4. 노비 매매는 거래 당사자가 법률 형식에 맞는 서류 양식을 작성하여 지방정부 관아에 증명서 발급을 청원한다.
5. 아전들이 문서를 공증하고, 최종적으로 그 고을 사또인 현감(縣監)이 인준함으로써 노비 매매 문서의 법적 효력이 발생한다.
성리학의 조선은 노비제의 나라
성리학(性理學)을 국교로 삼고 주자(朱子)를 정신의 스승으로 숭앙했던 조선 사회는 인류사에 보기 드물게 가혹한 노비제(奴婢制) 사회였다. 여러 차례 명(明)나라를 드나든 성현(成俔, 1439-1504)은 “중국은 사람들이 모두 국인(中朝則人皆國人)”인데 “우리나라 인구는 절반이 노비(我國人物, 奴婢居半)”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여기서 국인(國人)이란 독립된 양인(良人)으로서 국가에 귀속되는 인격체이지만, 노비란 천민(賤民)으로서 타인의 재산으로 등록된 예속인(隸屬人)을 가리킨다. 성현의 관찰은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 17세기 초반 경상도 여러 지역의 호적을 살펴보면 인구의 40~50%가 노비로 등록되어 있다. 한때 수도 주변에는 인구의 75%가 노비로 등록된 곳도 있었다.
노비의 주인은 언제든 노비를 사고팔고, 상속하고, 증여하고, 양인(良人)으로 방면할 수도 있었다. 주인이 잘못한 노비를 혼쭐내고 때리다가 그 노비를 죽여도 주인은 법적으로 처벌당하지 않았다. 주인과 노비 사이의 주종적(主從的) 상하관계는 엄격하게 국법으로 보장되었다. 일례로 1422년 조선 조정은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수 없고, 고소하면 교형(絞刑)에 처한다는 법을 제정했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주자(朱子)를 떠받들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읊조릴 때, 그 밑에서 노비들은 주인의 수족(手足)이 되어 농장일, 집안일, 부엌일, 심부름 등 시키면 궂든 힘들든 군말 없이 죽도록 일해야만 했다. 조선의 신분제는 너무나 철저하여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압도했다. 양반의 자손은 대대로 양반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고, 노비의 자식들은 웬만해선 “근본 천생(賤生)”의 굴레를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반세기 전부터 구미의 학자들은 한국사의 가장 큰 특징으로 노비제를 꼽았다. 구미 세계사 교과서를 살펴보면, 한국사가 세계에서 가장 길고도 철저한 “노예사회(slave society)”였다고 단정하는 대목들이 눈에 띈다. 10세기, 심지어는 12세기에 걸친 최장의 노예제가 한반도에서 유지되었다는 주장이 지금도 널리 퍼져 있다.
이영훈 교수의 실증적 연구에 따르면, 고려 말기까지도 노비는 전인구의 5~10% 정도에 머물렀다. 한국사에서 노비 수가 폭증한 시기는 15세기 이후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 와서였다. 양반가의 압박에 밀려서 조선 조정이 부모 중 한 명만 노비면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칙을 국법으로 채택한 이후 노비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얼마 안 지나 조선은 인구의 30~40%가 타인의 재산으로 등재되는 기괴한 노비 사회가 되었다. 이는 도망 중인 노비들을 제외한 수치라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노비와 노예가 다를 수 있는가?
한국 학자들은 노비(奴婢)를 노예(slaves)라 보는 구미 학계의 견해에 예민하게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일부 학자들은 노비를 노예로 볼 수 없다며 노비를 “slave”라 번역하지 말고 로마자로 음역해서 “nobi”라고 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주인에게 직접 사역하는 대신 신공(身貢)을 바치는 납공노비(納貢奴婢)의 사례를 들어서 노비가 그저 사회 기층의 농민이나 농노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그러한 반발은 대부분 구미 언어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slave”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다.
간단히 정의하면, 노예란 타인에게 소유된 인간을 의미한다. 타인의 소유물로 전락한 인간은 주인이 요구할 때 노동력이나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하는 존재적 예속성을 갖는다. 모든 노예는 타인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노예들의 생활상은 천차만별일 수 있다.
예컨대 17세기 뉴암스테르담(New Armsterdam, 현재 미국 뉴욕시 맨해튼의 남쪽 위치)에서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소유의 흑인 노예들은 의식주를 제공받고, 텃밭을 일굴 땅도 얻고, 병원에서 의료혜택을 누렸다. 그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세례를 받을 수 있었고, 연애하여 결혼하고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실질적으로 회사에 고용된 노무자의 삶과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법적으로 그들은 서인도회사의 소유물로 등록된 노예들이었다. 19세기 초반 미국 플로리다에서는 인디언이 흑인 노예를 소유한 경우가 있었는데, 신분상으로 노예였음에도 그 흑인들은 상당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1856년 미국 버지니아에서 유색인종이 자발적으로 노예가 될 수 있다는 법이 제정되자 다수의 자유 흑인이 여러 현실적인 동기에 따라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Lawrence Aje and Catherine Armstrong, Many Faces of Slavery: New Perspectives on Slave Ownership and Experience in the Americas, Bloomsbury Academic, 2020).
아직도 조선 노비가 세계 다른 지역의 노예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반계수록(磻溪隧錄)>>의 “노예(奴隸)”란 문장을 읽을 필요가 있다. 가혹한 노비제의 개선을 촉구하는 이 글에서 유형원은 노비를 노예로, 노예를 노비라 지칭하며,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 노비(奴婢)란 사내종과 계집종의 통칭이다. 노는 사내종, 비는 계집종을 의미한다. 종은 노예의 순우리말이다.
직접 노역을 바치는 입역노비(立役奴婢)든 몸값으로 공물만 바치는 납공노비든 노비의 영어 번역은 “slaves”일 수밖에 없다. 세계 노예 학계의 일반적 개념에 따르면, 어떤 이유에서건 타인에게 신분이 속박되어 노역이나 몸값을 바쳐야 하는 모든 인간은 노예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자식에게로 신분이 세습된다면 상대적으로 더 가혹한 노예제라 인식된다. 조선의 노비제가 그에 해당한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 가혹한 신분 차별의 법제화
세계사 여러 지역에서 보이는 다양한 형태의 노예들은 크게 자식에게 노예 신분을 대물림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들 수 있다. 물론 세습 노예제가 신분이 비(非)세습적 노예제보다 훨씬 더 가혹한 제도였다.
조선 노비는 타인에 소유되어 매매, 증여, 상속이 가능한 존재일뿐더러 그들의 자손들도 모두 노비의 굴레를 쉽게 벗어던질 수 없었다. 현전하는 조선 시대 노비 매매 문서를 보면 “그 자손들도 영원히 팔아버린다(後所生幷以永永放賣)”는 문구가 어김없이 나온다. 노비의 신분이 엄격하게 세습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서다.
세습 노예제도 신분 세습의 형태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부모 일방의 더 낮은 신분이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더 나쁜 조건(deterior condicio)”의 세습제와 부모 일방의 더 나은 신분이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더 좋은 조건(melior condicio)의” 세습제로 나뉜다. 조선은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칙에 따라 부모 중 한 명만 노나 비의 신분이면 자식은 모조리 노비가 되는 “더 나쁜 조건”의 세습제였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이 지독하고 가혹하고 악랄한 종천법을 300년 넘게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비교사적 관점에서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가령 3천 500여 년 전 고대 중동 구(舊) 바빌로니아 제국의 관습법에 따르면, 자유민 남자와 노예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자유민으로 인정되었다. 그 아비가 자기 자식임을 인정하는 순간, 노예 여인도 자유민의 신분을 얻었다. 아비가 자기 자식이라 인정하면 그 아이는 자기 몫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으며, 아이의 어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아이의 아비가 그 아이를 제 아이라 인정할 때 노예 여인은 노예 신분에서 풀려나 자유민의 새 이름을 얻었다는 기록도 있다. (Keith Bridley et al., eds., The Cambridge World History of Slavery, Vol. 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pp. 10-11).
조선이 3천 500년 전 중동의 율법보다 더 가혹한 인격 차별의 신분제를 법제화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조선 시대 종천법(從賤法)에 따르면 부모 중 한쪽이 양인(良人)일지라도 다른 쪽이 천출(賤出)이면 천한 신분이 세습된다. 예컨대 사내종이 양녀(良女)와 결혼하여 낳은 자식이나 계집종이 양부(良夫)와 결혼하여 낳은 자식은 모두 노비가 되었다. 양반가에선 집안의 계집종을 주변의 양부에게 시집을 보낸 후, 그 자식들을 모두 자기 노비로 삼는 관습이 퍼져나갔다. 양녀의 자식은 아비가 종이라도 양민이 된다는 종모법(從母法)은 1669년 처음 도입되었으나 양반가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표류하다가 1731년 영조(英祖) 연간에야 제대로 시행되었다.
주자학의 나라 조선에 과연 유교적 인본주의(人本主義)가 있었는가? 홍익인간(弘益人間)이나 인내천(人乃天)과 같은 인류적 보편이념을 추구했는가?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대체 어떤 인간관을 가졌기에 인류사 최악의 신분제를 그토록 긴 시간 유지할 수 있었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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