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9 17:12:37
"Douglas MacArthur"
“노병은 죽지 않는다.
사라질 뿐이다.''
트루먼에 의해 보직이 해임된 맥아더 장군의 고별사 말미에 나오는 명언이다.
한국인들의 맥아더와 관련한 지식은 딱 여기까지.
그 이후는 대부분 잘 모른다.
맥아더는 자기 주장이 뚜렷하다 보니, 케네디만 빼고는, 역대 대통령들과 늘 반목했다.
린든 B. 존슨과도 그랬다.
존슨이 베트남전을 확대하자, 맥아더는 수시로 백악관에 전화를 걸어 말렸다.
“한국전은 소련의 스탈린이 북한을 부추겨 일어 났지만, 베트남전은 자기네들 끼리의 내전이다.
미국이 개입할 명분이 없다.
왜 우리 젊은이들이 아시아의 정글에서 속절없이 죽어가야 하나?”
존슨은 맥아더를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그래도 ‘국가 영웅’ 대접은 깎둣했다.
맥아더가 노환으로 워싱턴 D.C.의 월터리드 육군 병원에 입원하자 문안을 갔다.
그 자리에서도 ‘철군’을 당부한 맥아더에 슬그머니 화가 치민 존슨.
“장군, 몸조리 잘하세요”
하고는 서둘러 병실을 나왔다고 한다.
당시 기록엔 화난 표정이 역력했다고 쓰여있다.
문병 한 달 후, 맥아더는 눈을 감았다.
1964년 4월 5일.
보고를 받은 존슨은 즉각 애도 성명을 내며, 7일간 미 전국에 국장을 선포했다.
시신은 당일 군 수송기편에 실려, 뉴욕으로 보내졌다.
수도 워싱턴에서 사망했는데 웬 뉴욕행?
보직해임 후, 맥아더 부부는 뉴욕의 6성급 호텔인 월도프 아스토리아에서 살았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 땅을 밟았지만, 맥아더는 허름한 집 한 채조차 없었다.
당시 아스토리아 호텔은 힐튼 가문 소유였다.
맥아더의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힐튼 가문이, 선뜻 호텔 맨 꼭대기 펜트하우스를 내줬다.
방 값은 얼마나 됐을까.
공짜로 줄 수 없어, 연 1 달러만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맥아더 시신은 노년을 보내던 뉴욕으로 운구돼 국장 기간이 길어졌다.
뉴욕 군기지에 빈소가 마련돼, 각국 유엔 주재 대사들을 비롯해, 뉴욕의 거물급 정치인들이 줄을 이었다.
이어 특별 열차가 투입돼 시신을 다시 워싱턴으로 옮겼다.
각군 의장대와 기수대, 사관학교 생도대 등 수천의 병사들이 광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장엄한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시신이 안치된 의사당엔 그와 함께 싸웠던 옛 부하들과 시민 등, 무려 15만명의 조문 인파가 몰렸다.
시신은 다시 군 수송기에 실려, 버지니아주 노퍽의 맥아더 기념관으로 운구됐다.
존슨 대통령은 이번에도 공항에 나와 맥아더와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눴다.
생전엔 그토록 미워했지만 영웅에 대한 배려엔 한치의 소홀함이 없었다.
***
작년 이맘 때, 6.25의 민족 영웅, 백선엽 장군이 작고 했을 때 일이다.
조문객 중 국가 지도자 급의 모습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반면 같은 시기에 성폭행 사건으로 자살한 박원순의 서울시장(市葬) 빈소엔 조문객이 바글바글~~.
백선엽 장군이 적화통일에 방해가 됐다고 판단한 이 정부는
장례절차도 결국 국장, 국민장, 국방부장도 아닌, 민간주도의 장으로 정했다.
장지도 동작동이 아닌, 대전 현충원으로~~.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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