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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600년 지배한 합스부르크... 황제의 요리부터 서민의 와인까지

太兄 2025. 2. 15. 20:20

유럽을 600년 지배한 합스부르크... 황제의 요리부터 서민의 와인까지

[아무튼, 주말] 비엔나커피만 알고 떠난 오스트리아 동부 여행

입력 2025.02.15. 00:34업데이트 2025.02.15. 10:31
300년 전 사람들이 그린 ‘천국’이 담겨 있다. 수려한 바로크 양식이 돋보이는 멜크 수도원 전경. /오스트리아 관광청

모차르트와 멜랑슈(일명 비엔나커피). 어느 곳에서나 나비의 날갯짓 같은 교향곡이 흘러나오고 몽글몽글한 거품이 올라간 커피를 홀짝일 수 있는 도시.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오스트리아 빈의 모습이다. 600년간 유럽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가로 상징되는 것처럼 고상하고 귀족적이다. 어디를 가든 ‘유럽 최고의 미녀’로 꼽히는 시시(엘리자베트 황후의 애칭)와 흰 가발을 쓴 모차르트 그림이 발에 치인다.

그런데 사람 사는 건 결국 똑같다. 이번에 마주한 오스트리아는 우리 시골 할머니 집 같은 모습이었다. 부박하고 거칠다. 다정하면서 정겹다. ‘가족 경영’으로 3~4대가 와이너리를 이어가고, 어깨너머로 본 ‘할아버지의 방식’을 살려 레스토랑을 운영한다. 너무 섬세해서 숟가락 대기가 겁나는 그런 파인 다이닝이 아니다. 시골 동네 잔치, 모두 모닥불 앞에 모여 돼지고기 구이를 집어 먹고, 이웃에서 만든 와인을 목구멍에 콸콸 들이붓는다. 흥이 오르자 쿵짜라 짝짝 오스트리아 전통 음악을 연주한다.

그래픽=송윤혜

중유럽인지 동유럽인지, 존재감이 다소 작은 나라지만 볼 것과 할 것, 즐길 것이 넘쳐난다. 참고로 오스트리아인들은 자국을 동유럽으로 분류하면 의아해한다. 지리상 ‘헝오체(헝가리·오스트리아·체코)’를 ‘동유럽 3국’으로 묶은 여행 상품이 다수 팔리다 보니 억울하게 동유럽 이미지가 씌워진 듯하다. 1273년부터 1918년까지 600여 년간 유럽 역사의 중심에 있던, 스페인 합스부르크까지 감안하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가졌던, 명실공히 유럽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부터 가장 소박한 것까지, 황제부터 서민까지 모든 것을 맛볼 수 있다.

수도 빈은 닭다리(바이올린을 닮았다) 모양의 나라 동쪽에 치우쳐져 있다. 국토의 3분의 2가 산이지만, 빈 인근 동부는 둔덕 정도만 보이는 평지. 덕분에 와인도 생산하고, 국경을 맞댄 헝가리 등에서 음식 문화 영향을 크게 받았다.

◇코부터 꼬리까지, ‘돼지춤’

빈에서 동남쪽으로 1시간 남짓 떨어진 부르겐란트주의 식당 ‘구트 푸르바흐’. 스물한 살에 첫 미쉐린 스타를 받은 막스 슈타이글이 운영하는 식당이다. ‘코부터 꼬리까지’, 돼지 한 마리를 알뜰하게 소비하는 식문화를 보여준다.

코부터 꼬리까지,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알뜰히 소비하는 ‘자우탄츠(Sautanz)’에 참가하는 것도 좋은 여행 선택지다. /막스 슈타이글

오후 3시쯤, 이 식당 중정에 들어서니 돼지머리와 껍데기, 온갖 내장이 주렁주렁 카트 위에 걸려 있다. 막스가 “웰컴”이라며 내 입에 집어넣은 건 당일 새벽에 잡은 돼지 피를 푹 찍은 홈메이드 사워 브레드. 그로테스크한 비주얼과 달리 잡내는 나지 않았다.

이어 돼지 뇌, 간, 콩팥, 심장 등을 이용한 요리가 이어졌다. 셰프는 직경 80㎝ 안팎의 가마솥을 이용해 뚝딱뚝딱 음식을 만들어냈다. 정확한 계량, 섬세한 조미 따위는 없다. 대충 굵은소금을 흩뿌리고 오레가노와 렌틸콩을 쏟아붓고 얇게 채 썬 당근·샐러리·래디시 등을 한 주먹 털어내는 식이다. 콩팥 요리에는 식초를 콸콸, 간 요리에는 레드 와인을 와락 부었다. 돼지 뇌와 계란을 섞은 스크램블 같은 요리는 채 녹지 않은 소금이 설컹설컹 씹히기도 했다.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돼지 코 조림. /김경화 기자

이 동양 여자(기자)는 혐오 음식에 역치가 높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약간의 소금을 흩뿌린 ‘돼지 심장 사시미’를 들이밀었다. 맨손이다. 양념한 고추장을 찍어 먹는 한우 사시미는 좋아한다. 아무리 도축한 지 몇 시간 안 됐다지만 그래도 돼지 사시미라니.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기 무섭게 떠오른 감상은 ‘음? 나쁘지 않은데?’였다. 내 손으로 한 점 더 집어먹었다.

살코기 부분을 넓게 도려낸 돼지 등갈비 구이는 말할 것도 없이 일품. 동네 사람들도 장작불 옆에서 맛나게 고기를 집어먹었다. 이날 쓰인 당근·래디시 등을 생산한다는 이웃 헬가는 “자우탄츠(Sautanz·돼지춤)가 열릴 때마다 종종 온다”면서 “신선한 돼지고기와 채소로 만든 요리인데 마다할 이유가 있느냐”고 했다.

아마도 시그니처는 ‘돼지 코 조림’일 것 같다. 땀구멍(털구멍이라고 해야 하나)이 숭숭 보이는 날것 그대로의 돼지 코 모양이다. 네 접시나 내놨다. 이게 모두 오늘 아침의 불쌍한 그 녀석에게서 온 것이냐 물었더니 “특별히 쟁여놨다”(막스)고. 역시 비주얼만 꾹 참고 넘긴다면 그저 부드럽고 담백한 돼지고기 조림 요리. 동파육과 비슷한 맛이다.

그런데 한국인의 최애, 그래서 가장 비싼 삼겹살을 갈아내고 파프리카 가루 등을 섞어 소시지를 만든다. 막스는 창자 끝에 입을 대고 훅 불어 긴 풍선을 만든 뒤 속을 넣었다. 10cm 정도 크기로 끊어낸 소시지를 곧장 그릴 위에서 구워냈다. 독일에서 온 파울은 “헝가리와 가까운 이 지역에서는 파프리카 가루, 파프리카 잼 등을 사용한다”면서 “매콤해서 깔끔한 이것도 좋지만 난 역시 독일 소시지가 좋다”고 했다.

여기에 돼지껍데기를 오랜 시간 볶아내 라드유를 만들고 난 뒤 남은 튀긴 돼지 비계 요리, ‘그람멜’까지 시식하면 긴 여정이 얼추 마무리된다. 그람멜은 맥주 안주로 극락일 듯. 원한다면 이날 새벽 시작되는 돼지 도축부터 참여할 수 있고, 술과 음료 등이 포함된 하루 일정이 180유로 정도다. 막스는 “예전에는 이 정원에서 모든 게 이뤄졌지만, 법규가 엄격해져 도축은 다른 공간에서 이른바 ‘윤리적 살육’을 한다”고 설명했다.

셰프 막스 슈타이글이 그릴에 돼지고기를 굽고 있다. /김경화 기자

막스의 친구 크리스티안 치다가 만드는 레드 와인도 즐길 수 있었다. 4대에 걸쳐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다고. 크리스티안은 “우리 할아버지도 어릴 때 자우탄츠를 한 적이 있었는데 새벽부터 슈납스를 잔뜩 마시고 도살장에 들어갔다더라”고 했다. 슈납스는 오스트리아 바하우 지역 특산품인 살구로 빚은 독한 술. 크리스티안은 한국의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꽤 이름난 와인 생산자다.

◇그뤼너 벨트리너를 아시나요?

오스트리아는 우리나라 80% 크기의 작은 나라지만 화이트·레드 와인 생산지를 각각 갖고 있다. 주력은 그뤼너 벨트리너라는 화이트 와인 품종. 빈은 매우 드물게 와이너리를 보유한 수도이기도 하다. 대부분 내수로 소비되고, 소량만 수출한다.

오스트리아 어느 식당에 가든 와인 리스트를 펼쳤을 때 1번은 그뤼너 벨트리너였다. 산도와 청량감, 아로마가 좋은 균형을 이룬다. 어떤 음식과도 잘 조화되는 와인이었다.

빈 인근 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바하우 지역은 그뤼너 벨트리너와 살구로 유명하다. 가족 경영으로 와이너리와 살구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마르틴 베르크키르히너는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 지대라 여름은 덜 덥고 겨울은 더 따뜻해 그뤼너 벨트리너를 재배하기 안성맞춤”이라고 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살구와 포도 수확 철에는 매우 분주한 마을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와이너리 투어와 일부 체험도 가능하다. 이 지역에는 대부분 가족 경영으로 운영되는 와이너리가 약 200곳 있다.

빈 동쪽 바그람 지역에 위치한 베른하르트 오트(OTT) 포도원의 겨울. 살얼음이 자란 포도밭 풍경을 보면 ‘겨울왕국’이 떠오른다. 오트 가문은 1889년부터 4대에 걸쳐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김경화 기자

화이트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오트(OTT) 와이너리도 투어를 개방한다. 미쉐린 1스타를 받은 레스토랑 ‘토니M’이 가까운데, 오트의 포도밭 한가운데 자리한 작은 식당 ‘바인블릭(‘와인 뷰’라는 뜻)’에서 이 식당의 음식과 오트 와인을 함께 즐길 수도 있다. 베른하르트 오트씨의 가족은 1889년부터 와인을 생산했다.

1월 바하우 지역의 풍광은 얕은 언덕의 중간 지대 위부터 나무에 살얼음이 잔뜩 끼어 뿌연 모습이었다. 오트의 포도나무들에도 1~2㎝의 살얼음이 자라 겨울 왕국을 연상케 했다. 베른하르트는 “눈은 내리지 않는다”면서 “이 지역의 서늘한 기후와 토양이 와인의 향과 맛을 더 풍부하고 다채롭게 만든다”고 했다.

상대적으로 따뜻한 부르겐란트 지역에서는 ‘츠바이겔트’로 대표되는 레드 와인 품종이 주로 자란다. 햇빛이 인근의 노이지들러 호수에 반사돼 일조량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이 지역에선 대체로 레드 와인이 난다.

◇신부는 아침부터 샤르도네를 마신다

300년 전 사람들이 그린 ‘천국’이 담겨 있다. 수려한 바로크 양식이 돋보이는 멜크 수도원 전경. /오스트리아 관광청

멜크 수도원(Melk Abbey)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배경으로 이름난 곳이다. 빈에서 서쪽으로 80㎞ 떨어진, 절벽 위에 지어진 수려한 바로크 양식 건물이다. 멜크 구시가지와 도나우(다뉴브)강이 내려다보인다.

장서 10만권이 보관된 멜크수도원 도서관. 움베르토 에코가 쓴 소설 ‘장미의 이름’의 배경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 관광청

소설 속 수도원은 ‘웃음’이 금지된 도서관과 철저한 검열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첫인상부터 ‘엄근진(엄숙·근엄·진지)’과는 거리가 먼, 병아리색과 핑크, 골드가 인상적인 로맨틱한 분위기였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호텔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도서관 장서는 10만권이 넘는다.

멜크 수도원에는 식당과 문화 행사 등을 담당하는 신부들이 있다. 오스트리아 대표 와이너리인 ‘야메크(Jamek)’와 함께 화이트 와인도 생산한다. 와인·식당을 담당하는 안드레아 신부(애플워치를 차고 있었다!)는 “수도원 초기, 그러니까 900년 전부터 와인을 생산해 왔다”며 “신부들은 아침 일찍부터 와인을 마시기 때문에 과일 향이 강하고 가벼운 샤르도네 같은 와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잘츠부르크의 슈티프츠쿨리나리움은 모차르트의 교향곡 연주를 들으며 식사할 수 있는 ‘모차르트 디너’를 운영한다. /오스트리아 관광청

멜크 수도원의 마블 홀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머물 때 저녁 식사를 한 곳이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루이 16세와 결혼하기 위해 프랑스로 이동하며 머문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 귀족들의 호텔로 사용된 ‘임페리얼 윙’은 약 60개의 방으로 이뤄져 있다. 196m 길이의 복도를 따라 합스부르크 왕가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방마다 복도 쪽으로 작은 쪽문이 달려 있는데, 방을 데울 때 쓰는 난로를 때기 위해 어린 소년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1200년 된 레스토랑

수도원이 호텔로 사용된 사례는 다른 지역에도 남아 있다. 잘츠부르크 구시가지에 자리 잡은 세인트 페터(성 베드로) 슈티프츠쿨리나리움은 베네딕토회 수도원 단지 내에 있는 유럽 최고(最古)의 레스토랑. 803년에 일종의 레스토랑으로 언급된 기록이 남아 있다. 모차르트의 누이는 1786년 일기에 이곳에서 가족들이 저녁 식사를 했다고 썼다.

우리 갈비탕과 비슷한 전통 요리 타펠슈피츠. /김경화 기자

이 식당의 시그니처는 우리 갈비탕과 비슷한 전통 요리 타펠슈피츠(Tafelspitz). 푹 끓여낸 소고기와 크림시금치, 고추냉이, 다진 사과 등을 함께 먹는다. 서양 음식 중 ‘물에 빠진 소고기 요리’는 극히 드물다는 인상이다. 이 식당은 서버가 그릇에 고기와 크림시금치, 으깬 감자와 국물 등을 덜어 담아 서빙한다. 빈 등에 여러 지점이 있는 식당 ‘플라추타’는 구리 냄비에 담겨 나오는 타펠슈피츠를 직접 그릇에 덜어 먹게 돼 있었다. 굵은 뼈다귀를 남겼더니, 한 종업원이 “골수를 남기셨네요. 긁어서 빵에 발라 먹으면 맛있어요”라고 알려줬다. 소꼬리찜, 뼈다귀감자탕을 먹는 것과 같다.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나 비슷하다.

[3스타만 두 곳, 전국에 ☆ 딴 레스토랑 즐비]

15년 만에 맛집 선정한 오스트리아 미쉐린 시상식

15년 만에 열린 오스트리아 미쉐린 시상식에서 3스타 레스토랑이 두 곳 나왔다. ‘슈타이레렉’과 ‘아마도르’. 둘 다 수도 빈에 있다.

미쉐린은 특정 도시를 대상으로 맛집을 선정하지만, 강산이 1.5번 바뀌는 동안 당도한 오스트리아에서는 전체 국가를 대상으로 했다. 일정 부분 국가적 마케팅이 작용했을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이번에 2스타 레스토랑이 13곳 선정돼 총 18곳으로 늘었고, 1스타 레스토랑도 53곳 추가돼 모두 62곳에 이른다.

슈타이레렉은 오스트리아 전통 음식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전국적으로 여러 레스토랑을 갖고 있다. 또 다른 3스타 아마도르는 독일 출신 셰프가 오스트리아·스페인·독일 스타일을 섞어 세련되고 창의적인 음식을 낸다.

지난달 21일 잘츠부르크의 ‘행거7(Hangar-7·’레드불’ 회사 오너가 소유하고 있는 격납고)’에서 열린 미쉐린 시상식에는 ‘파김치’를 사용한 식당도 등장했다. 오스트리아 최서단인 포어아를베르크에 있는 식당 히르셴(Hirschen). 쿠키 같은 느낌의 빵 위에 파김치와 치즈 가루 등을 올린 카나페를 먹는데 의외로 파김치가 아주 맛있었다. 푹 익어 입맛이 확 돌았다.

이 식당의 셰프는 한국엔 가보지 않았다. 이웃이 한국 여성과 결혼했는데 어깨너머로 김치를 배웠다고. 계절에 따라 다른 제철 채소로 김치를 만들고 있다. “그것 역시 완벽한 한국식”이라고 하니 함박웃음을 지었다. 히르셴은 지속 가능성을 실천하는 식당에 부여하는 ‘그린 스타’를 받았다.

미쉐린 별을 딴 오스트리아 레스토랑은 호텔과 함께 운영하는 곳이 많다. 로드 트립을 계획하고 있다면 15년 만에 업데이트된 2025 오스트리아 미쉐린 리스트를 참고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