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로 성장' 30년… 반도체 생산 클린룸이 상추 재배 작업장 됐다
['성장률 1%' 쇼크] [1] 경제, 끝없는 저성장 터널로
일본 도쿄에서 북쪽으로 300km 떨어진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쓰시(市)에 있는 후지쓰 공장 정문에는 간판이 없다. 축구장 36개의 크기인 대형 공장 입구에는 예전에 ‘후지쓰세미컨덕터(반도체)’라는 사명이 붙어 있던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 공장은 1980년대 세계 톱10 반도체 기업이었던 후지쓰의 주력 반도체 공장이었다. 후지쓰의 반도체 사업은 1990년대 들어 쇠락했고 2013년 시스템반도체 부문을 파나소닉과 경영 통합했다. ‘후지쓰도시’라고 불렸던 아이즈와카마쓰도 함께 몰락했다. 공장 주변에서 만난 일본인 주민은 “1980년대엔 마을 주민 절반 정도가 가족 중 한 명은 후지쓰에서 근무했을 정도로, 후지쓰 도시였다”며 “후지쓰의 월급날은 마을 전체가 작은 축제처럼 들떴다”고 말했다.
지금은 정문 맞은편, 600~700대가 주차할 수 있는 대형 주차장 부지에 몇 대만 주차돼 있었다. 주차장 절반은 아예 폐쇄돼 태양광 패널이 설치됐다. 건물 9~10층 높이에 좌우로 100미터가 넘는 옛 반도체 건물의 클린룸에선 반도체가 아닌 친환경 상추를 재배하고 있다. 후지쓰가 2014년에 텅 빈 반도체 클린룸을 재활용하는 방안으로, 친환경 실내 재배 사업에 진출한 것이다.
후지쓰 공장은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를 뜻하는 ‘잃어버린 30년’의 축소판이다. 1992년부터 30년 동안 연평균 0.73% 성장에 그친 일본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딥팩터 70%가 일본 불황 초기와 비슷
외환 위기 이후 처음으로 한국 경제 성장률이 3년(2021~2023년) 연속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8개 회원국 평균을 밑돌고, 내년부터 1%대 저성장이 가시화한다는 경고가 나오기 이전부터 한국 경제의 일본화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2015년에는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인구구조와 경제의 모든 관련 지표가 20년 시차를 두고 일본을 따라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KDI 경고가 나온 뒤 10년 가까이 한국은 무엇을 바꾸었을까. 본지가 인구구조와 잠재성장률, 재정수지, 가계부채, 노동생산성 등 경제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경제·사회 지표인 딥팩터(deep factor) 24개를 분석한 결과, 10개 지표(42%)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불황 초기와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합계출산율과 노년부양비 등 6개 지표(25%)는 일본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딥팩터의 70% 가까이가 일본의 불황 초기와 비슷하거나 일본보다 심각하다는 뜻이다.
내년부터 2년 연속 한국 성장률이 1%대에 머물 것이란 한국은행의 경고가 현실화한다면 2024~2026년 한국의 성장률 추세는 일본 불황 초입인 1991~1993년과 유사해진다. 한 나라 경제의 기초 체력 수준으로 여겨지는 잠재성장률은 이미 한국이 2%로, 1990~1996년 일본(2.8%)보다 한참 더 낮다. GDP의 26.5%를 제조업이 차지해 제조업 경쟁력에 따라 경제 전체가 휘청이는 한국의 산업구조도 일본 1990년(26%)과 같다.
경제의 선순환을 뒷받침하는 인구 구조는 일본보다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2명으로, 1990년 일본(1.54명)의 절반 수준이다. 한국의 총인구는 이미 정점을 지났지만, 일본은 장기 불황에 들어간 지 한참 후인 2010년에야 내리막길을 시작했다.
가계와 기업 등 민간이 빚을 짊어지고 있는 모습도 닮았다. 지난해 GDP 대비 한국의 민간 부채 비율은 204.2%로, 일본 1994년(214.2%)과 같은 수준이다. 민간의 빚이 과다하면 사람들은 지갑을 열지 않고, 기업은 투자를 주저한다. 버는 사람은 줄고, 쓰는 사람은 늘어 재정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2020년부터 한국 재정 수지는 본격적으로 적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1993년부터 매년 재정 적자다.
◇”젊은 미국 경제의 길 따라가야”
한국의 선택지가 일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이지만, 1인당 GDP로 일본을 제친 것은 1998년(미국 3만2853달러, 일본 3만2423달러)부터다. 이후 궤적은 차이가 난다. 미국은 가속도를 붙여 8만달러를 터치했지만, 일본은 여전히 3만달러대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냈을까.
미국 애리조나주(州) 피닉스 도심에서 17번 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약 30분 정도 올라가다 보면 약 400만㎡의 공장 부지가 펼쳐진다. 크레인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공장 옆면에 붉은색 ‘TSMC’라는 글자가 선명한 간판이 달려 있었다.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의 TSMC가 650억달러(약 90조원)를 들여 공장을 만드는 현장이다. 미국은 2022년 반도체 기업의 미국 내 투자를 늘리기 위해 반도체 생산 보조금 등 5년간 총 527억달러를 지원한다는 내용의 반도체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삼성 등 세계 굴지의 반도체 기업들이 보조금을 받기 위해 뛰어들었고, TSMC도 선제적 투자에 나선 곳 중 하나다. 거대한 몸집을 가진 미국 경제가 꾸준한 성장을 일구는 배경으로 신기술을 통해 세계 혁신 성장을 이끄는 기업들과 해외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 유치를 이끌어내는 미국 정부의 노력이 꼽힌다. ‘혁신 주도’와 ‘투자 유치’라는 쌍두마차로 미국 땅에 새로운 산업 물결이 만개하도록 상황을 조성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피닉스시는 TSMC 공장 건설로 지역에 최대 8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과 일본의 길이 엇갈린 이유가 미국이 지속 성장에 장애가 되는 구조적 요인들을 성공적으로 해결해 나갔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혁신 기업에 진입 장벽이 높지 않은 미국에서는 IT, 바이오, 인터넷 콘텐츠 분야의 신생 기업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해 왔다”며 “기득권을 쥔 대기업들이 신(新)사업을 주로 시도하고 있는 일본과는 달랐다”고 말했다.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국도 첨단 산업에 대한 압도적인 지원과 투자로 미국의 길을 걷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딥팩터(deep factor)
인구와 교육 수준, 지정학적 위치 등 경제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 가운데 특정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내재돼 있어 단기간에 변하기 힘든 요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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