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진이 <제20話>
봄의 송도가 아름답고 수줍은 소녀 모습이라면 만추의 송도는 칠보단장한 설중매 같다.
꽃과 벌 나비가 아울리듯 명월관은 진이가 없어도 옥섬이모의 장사수완이 뛰어나 한량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명월관은 송도 장안에서도 빼어난 경치를 뽐내는 자남산을 낀 자남동에 자리 잡았다.
자남산(子南山)은 남산·용수산(龍首山)이라고도 불리는데 서편에 영웅호걸을 키운다는 젖을 머금은 바위가 있어 붙여진 산명(山名)이다.
송도엔 자남산의 정기를 받아 유명인이 많다.
왕건·서경덕·정몽주·최충헌·함유일·이성계·정도전 등도 이곳에서 태어났거나 자라며 생활을 했던 인물들이다.
여자지만 황진이도 빼어 놓을 수 없는 여중호걸(女中豪傑)이다.
진이는 뼛속까지 송도여인임을 자임하고 있다.
그녀는 이생을 떠나보내고는 며칠 동안 후원을 맴돌며 마음을 정리하더니 말을 타고 아침에 나갔다 해질 무렵에 들어오곤 하였다.
그때마다 진이는 전설적 인물 전우치(田禹治)를 떠올렸다.
지금 그가 곁에 있으면 북간도 등에 가서 활을 쏘며 말 달리기를 했으리라고 황당한 상상을 해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우치는 서경덕과 도술경쟁을 하다 패하자 자취를 감추고 송도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소문엔 한양에 가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이때 한양에는 절조(節操 : 절개와 지조를 아울러 이르는 말)높은 사대부로 종실의 벽계수(碧溪水 : 본명 이종숙, 세종 17번째 아들 영해군의 손자)가 있었다.
그런데 벽계수에게 황진이 얘기가 들려왔다.
벽계수는 허봉과 절친한 관계다.
또한 허봉과 이달과는 막역한 관계로 황진이를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아 허봉이 이달을 벽계수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이달은 삼당(三唐)시인으로 미모·노래·기예 뿐 만이 아니라 시(詩)에도 능한 진이의 마음을 얻을 계책을 귀띔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벽계수는 진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묘책을 이달에게 사사 받았다.
한편 송도에 있는 진이는 벽계수가 절조 있는 사대부란 소문을 들었다.
그는 왕실의 후예로서 진이의 유혹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혼을 내 쫓아 버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다.
오기가 발동한 진이가 벽계수를 송도로 유인하기로 마음먹었다.
남자와 여자의 소위 성(姓) 대결이다.
진이는 지인을 한양으로 보내 벽계수에게 송도의 아름다움을 속삭여 벽계수가 오도록 교사(남을 꾀거나 부추겨서 어떤짓을 하게 함) 시켰다.
벽계수는 말로만 듣던 색향(色香)에 경치까지 빼어나다는 속삭임에 넘어가 송도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마침 달이 휘영청 밝은 밤이다.
진이는 벽계수가 경치가 빼어난 천수원에 와 있음을 알고 그곳 근처에 가서 자신의 시 《청산리 벽계수》를 거문고 음률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 하니 쉬여간들 어떠리’
벽계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지금까지 한양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천상의 목소리에 시 또한 자신을 비웃는 듯 한 내용에 놀라 그만 말에서 떨어졌다.
진이가 벽계수에게 다가가 왜 나를 쫓아 버리지 못했느냐고 묻자 멋쩍은 듯 멍하니 명월(明月)의 밤하늘을 쳐다만 보았다.
진이는 명월관으로 벽계수를 안내하였다.
벽계수는 한양에서 벌레처럼 사대부의 체면에 먹칠을 할 그녀를 쫓아버릴 수 있다고 호언했던 말이 허언이 됐음을 깨달았다.
사랑채에 마주 앉은 벽계수와 진이 사이엔 눈치 빠른 옥섬이모에 의해 술상이 놓여졌다.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어요. 송도는 한양에 비해 생기가 없어요. 이 술(태상주 太常酒)이 독합니다.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조금씩 마시세요!”
진이는 말과는 다르게 벽계수가 단숨에 잔을 비우자 잔 가득히 태상주를 따랐다.
말로만 듣던 진이를 앞에 앉히고 술을 마시는 벽계수는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을 못하고 있다.
그는 술상 밑으로 손을 내려 여의봉처럼 일어난 옥경(玉莖)을 힘껏 쥐어 보았다.
현실이 분명하다.
밤이 이슥할 때까지 그들은 술병을 비웠다.
벽계수는 진이의 술 상대가 못되었다.
진이를 당대엔 대적할 술꾼이 없다.
“술 그만 드시고 주무시죠!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진이가 손수 술상을 치웠다.
벽계수는 진이가 따르는 술잔을 거침없이 비워 인사불성이 되었다.
진이는 다시 거문고 음률에 맞춰 서경덕의 《봄날》을 타면서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가득하다.
‘성곽 밖이라 속된 일 없고/
산빛 짙은 창 안에 자니 늦게 일어나네/
봄 찾아 골짜기 시냇물가 거닐면서/
예쁜 꽃가지를 눈에 띄는 대로 꺾어 보네’
잠결에도 거문고 소리를 들었는지
“이제 잡시다.”
라고 말하면서 벽계수가 두 팔을 벌려 진이를 찾았다.
진이는 술상을 치우고 알몸이 되었다.
어차피 자기를 보러 온 벽계수는 자신을 품을 것이니 스스로 사내를 품으려는 속내다.
벽계수 가슴은 뜨거웠다.
소세양과 이사종의 가슴과는 또 다르다.
뜨겁고 따스한 가슴을 보자 딴 마음이 생겼다.
엄마가 되고 싶은 것이다.
지금 진이는 배란기다.
종실(宗室) 후예인 벽계수와 관계에서 2세가 탄생되면 얼마나 훌륭한 아이가 나올까 생각에 이르자 한시라도 빨리 사내를 맞이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비몽사몽 상태가 되면서 어머니가 나타났다.
생생한 생시 모습으로
“그것은 아니 될 생각이다! 기생 후손은 너로 족하다. 진이 너는 기적에서 나와 자유로운 영혼의 여자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너를 기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서우니라... 법적 문제보다 도덕적 굴레가 더 무서우니라.”
라고 말을 하고 어머니는 사라졌다.
벽계수의 뜨거운 사타구니에서 불두덩을 지나 가슴으로 올라오면서 가슴이 뛰고 호흡이 가빠지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진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만이요! 화장실에 좀 다녀올게요...”
신윤복의 미인도에서나 볼 아름다운 나부의 뒤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벽계수는 불타는 욕정을 자제하느라 애를 쓰고 있다.
벌거숭이 진이는 화장실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며 ‘과유불급'(過猶不及 : 모든 사물(事物)이 정도(程度)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으로, 중용(中庸)이 중요(重要)함을 가리키는 말)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여자의 마음은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있다.
* 황진이 <제21話>
벽계수의 첫날밤 욕망은 진이의 잦은 화장실의 드나듦으로 끝내 불발되었다.
하지만 벽계수는 불만 보다는 만족한 표정이다.
청사초롱의 불빛에 천하미색 진이의 알몸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것은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니고서야 즐길 수 없는 장관이 아닐까?
그러나 진이의 생각은 다르다.
감정이 고조되어 비몽사몽 상태에 생사를 알 수 없는 어머니가 나타나 기생의 자손은 너(진이)로 족하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화장실에 드나들면서 벽계수의 욕정을 냉각시켰던 것이다.
배란기엔 방사(房事)를 피하라는 경고다.
여자로 엄마가 되고 싶었던 원초적 욕망을 그 뒤론 접기로 하였다.
아버지 황진사 집에서 사대부집 딸이었을 때 금지옥엽의 신분으로 고관대작집 청혼을 동생 난이한테 빼앗기고 기생 딸로 태어나 부녀(父女)지간의 천륜을 끊고 기생이 된 사건을 되새겼다.
사내들의 욕망의 찌꺼기로 태어난 인생이 어찌 평범한 행복의 삶을 유지 할 수 있을까란 생각에 이르자 자신의 욕망이 과유불급임을 깨닫자 소름이 엄습해 옴을 느꼈다.
벽계수와 첫 방사는 결국 며칠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배란기가 지나서였다.
진이는 새 남자를 만날 때마다 꽃잠(첫날밤)처럼 준비를 하였다.
벽계수와도 그렇게 맞을 채비다.
초야권을 행사한 송모 송도유수와 같이 몸을 내줄 예정이다.
화려한 기생의 몸이 아닌 선계(仙界)에서 잠시 지상으로 놀러와 이승의 남자를 맞는 선인(仙人)의 전인미로의 선녀(仙女)의 자태다.
알몸으로 거문고를 타는 모습에 벽계수의 욕정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너무 아름답고 황홀하여 다가갈 수가 없는 것이다.
“왜 그러고 계세요? 이리 오셔서 노래를 부르시던지... 사랑을 하시던지 하세요!”
천하의 벽계수가 여자에게 주눅이 들기는 처음이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 손가/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는 것을...’
진이의 《無題》다.
진이는 삼남과 금강산, 그리고 지리산 등 팔도유람을 하고 온 후 꿈결 같은 현실에 어머니 현학금과 전우치와 대화를 하게 되었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특별한 남자와 사랑을 할 때는 어머니가 나타나 김시습과 중국의 두보로 변신, 새로운 학문세계를 말해 주었다.
매월당(김시습 호)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세종이 승정원으로 불러 지신사 박이창과 대화에서 비롯되었다.
과연 소문대로 ‘국민신동’ 임을 알아본 세종이
“성장하여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등용하리라.”
전교를 내리며 비단 30필을 주며 가져가게 하였더니 그 끝을 서로이어 끌고 갔다고 하였다.
지금 진이의 눈앞에는 어머니 현학금이 나타났다.
박꽃같이 흰소복 차림에 커다란 거문고를 메고 서 있다.
그럴때면 진이는 빙의(憑依) 상태가 되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분위기다.
“진이야, 벽계수는 특별한 분이시다. 천침(薦枕 : 첩이나 기생, 시녀(侍女) 따위의 여자가 웃사람을 모시고 잠자리를 같이 함)으로 모시면 너의 영혼에 위로가 될 것이다.”
그때마다 소녀경(素女經) 몇 구절을 말해주었다.
“네가 평소에 사대부 중 사대부인 벽계수를 사모하고 존경했었지 않았느냐? 그러니 네가 천침할 때 사정하지 않고 사랑만 할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지 않겠느냐? 그런 몸놀림은 여자만이, 특히 진이 너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방줄술이지! 남자들이 여자를 찾는 것은 방사를 하고 난 후에 정신이 말끔해져 새로운 의욕이 생겨야 되는데 그런 상황은 교접할 때 여자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단다. 특히 교접 중 절정에 이를 때 왼손 두 번째 손가락과 세 번째 손가락으로 사내 음낭과 항문사이를 세게 눌러주면 정액이 나오려다 옥경에 머무르며 그 힘이 정력이 된다. 그리하면 정신이 맑아지고 정력은 더 강해진단다. 벽계수 선비와 교접할 때 꼭 그렇게 해 보렴...”
너무 생생한 어머니 목소리에 진이는 선생님의 강의를 듣는 태도로 경청하였다.
벽계수는 거문고의 선율과 선녀의 알몸 같은 진이의 모습에 정신마저 몽롱한 상태에서 방사도 꿈속의 천도(天桃) 복숭아를 먹는 듯한 기분이다.
진이가 어머니 현학금이 시키는 대로 벽계수가 숨소리가 높아지자 왼손 둘째와 셋째 손가락으로 사내 음낭과 항문사이를 간질이듯이 눌러주었다.
사내는 시간이 가는 것도 잊은 듯 사랑을 마음껏 즐기다 제풀에 지쳐 진이 배위에서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벽계수는 동창으로 눈부신 햇살이 들어와 나신에 머무를 때 두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알몸상태다.
진이의 음문에서 밤새 육두질을 마음껏 즐긴 거무칙칙한 옥경은 고개를 툭 떨어드렸다.
진이는 먼저 일어나 부엌으로 가 손수 잣죽을 쑤었다.
진이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잣죽을 들고 벽계수에게로 다가갔다.
“엊저녁엔 즐거우셨어요?”
벽계수는 아직도 알몸인체 빙그레 웃음만 보였다.
황홀했다는 눈빛이다.
지금 벽계수의 눈엔 진이가 전설로만 듣던 서왕모(西王母)로 보였다.
복사꽃 빛깔의 의상에 머리엔 금빛으로 장식 된 면류관을 쓰고 있다.
신선세계의 여왕 모습이다.
엊저녁엔 화려하면서도 고상한 거문고의 음률로 정신을 혼미하게 하더니 지금은 서왕모의 모습으로 자신을 꼼짝 못하게 하는 진이가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 경외의 존재로 다가옴을 느꼈다.
벽계수는 잣죽을 받아 물먹듯 마셨다.
저녁도 변변히 먹지 않은 채 밤새 교접으로 힘이 고갈 상태다.
벽계수는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묘향산 단풍구경을 가면 어떠하오?”
라고 등뒤로 말을 던졌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현의 송도팔경의 《북산연우》(北山煙雨)를 낭송하였다.
진이는 첫 음절에 알아듣고 거문고 음률을 맞추었다.
‘만 골짜기에 연기 빛은 움직이고/
천 숲속에는 비 기운이 서리네./
오관산 구룡동의 동쪽에는/
옛 병풍이 들러있는 듯하네./
바위 뿌리 나무는 짙은 청색이요/
시냇가의 꽃은 홍색으로 난만하네./
끊어진 무지개 있을락 말락 할 적에/
새 한 마리 날아 가물가물 사라지네.’
낭송이 끝났는데도 진이의 거문고 음률은 방안에서 울림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역시 진이의 거문고 음률은 하늘의 소리라 하더니만 그 말이 맞소이다! 내가 오길 정말 참 잘했소이다. 소문으로만 듣던 진이의 명성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평생 한이 될 뻔 했소이다.”
벽계수는 거문고를 켜던 진이의 두 손을 꼭 잡고 놓을 줄을 모른다.
이때다.
“진이 아씨! 아침이 준비되었어요!”
동기(童妓)가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들은 두 손을 꼭 잡은 채 거실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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