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근진’은 버렸다… 재벌을 ‘형’이라 부르는 세상
[아무튼, 주말]
베일 속 대기업 일가도 시대 변화 따라 공개행보
드라마 속 재벌 이미지는 엄근진(엄격, 근엄, 진지)이다. 한없이 권위적이다. 재벌 2세는 수행원 수십 명을 대동하고 호텔에서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하고 수퍼카를 탄다. 도대체 몇 개 국어를 숙달했는지 모른다. 영어는 기본이고 프랑스어에 일어에 중국어까지 술술 나온다. 한겨울 코스프레로 연탄 배달을 해도 서민과는 말도 안 섞을 것 같은 이미지다. 한마디로 나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들.
하지만 최근 자의든 타의든 언론과 소셜미디어(SNS)에 노출되는 ‘회장님’은 어딘지 모르게 친근하다. 농담도 하고 익살맞은 표정을 짓고 떡볶이를 먹으면서 어묵 국물까지 리필한다. 이런 재벌에 핵심 소비층으로 부상한 MZ세대는 크게 반감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환호하는 쪽에 가깝다. 과거엔 재벌이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해 개혁의 대상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SNS의 발달을 넘어 기업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MZ의 특성을 그 원인으로 꼽는다. ‘기업이 잘돼야 내게도 경제적 이득이 온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 그래서일까. 신비주의를 추구하던 재벌도 최근에는 감추지 않고 사생활이 공개되면 공개되는 대로 주어진 상황을 즐기는 듯 보인다.
요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자주 언론 카메라에 잡힌다. 몇 년 전만 해도 카메라만 보면 표정이 굳어지던 그는 최근 질문을 쏟아내는 기자들에게 “추운데 목도리 하세요”라는 말을 건네는 여유까지 보인다. 지난달 초 대통령과 함께 찾은 부산 깡통시장에선 시민들이 “이재용”을 연호하는 바람에 당황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이름 부르지 말아주세요”라며 카메라를 들고 있던 시민을 향해 ‘쉿’ 동작을 했는데, 이 장면은 각종 패러디 영상으로 재탄생했다. 직후 대통령과 함께 한 ‘떡볶이 먹방’에선 “사장님, 어묵 국물 좀...”이라고 말을 건넨 모습이 또 화제였다. “실화냐?” “재벌이고 뭐고 모르겠고 그냥 귀엽다” “빵 터진다” “재드래곤 인스타 열어주세요” 등의 반응이 이어졌다.
그곳에 불려간 총수들의 속마음은 모르겠지만, 재계 쪽에서 이날 동행이 아주 부정적이지 않았다는 반응이 흘러나왔다. 이 회장이 다녀간 어묵집도 “회장님이 서 계시던 자리” “어묵 쓸어 담던 자리” 등을 표시해 두고 가게 홍보에 적극 나섰다는 흥미로운 소식을 전했다. 이 상황을 재밌어하는 손님들은 너도나도 인증샷을 남기느라 줄을 섰고, 가게 사장 가족은 때 아닌 특수에 그동안 써온 아이폰을 삼성 갤럭시로 바꾸고 TV도 삼성으로 바꾸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한 네티즌은 이렇게 썼다. “세상 많이 달라졌다. 재벌 면상만 나와도 TV에 숟가락 던지던 때가 있었는데 재벌이 웃음을 주다니.”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인터넷에서 아이돌급(?) 스타다. 인스타그램 팔로어만 80만명이 넘는다. 그는 자신을 “형”이라 칭하며 “얘들아, 형 오늘 여의도 왔다”며 일거수일투족을 알린다. 하루 평균 1~2개 게시물을 올리고 아들, 딸의 얼굴도 공개했다. 평범한 남편처럼 아내의 독주회에 가고 반려견과 논다. 하루가 멀게 레고를 사대서 아내에게 한 소리를 들었는지 “땡깡 부려서 하나 타냈음”이라고 적자, “재벌집 아들도 땡깡이 필수군요” “레고는 내무부 장관님 허락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같은 댓글이 달렸다. 술 취해서 자녀에게 뽀뽀를 청하는 영상을 올렸더니 “다른 세상을 사는 형님과 내가 느끼는 행복이 똑같을 수 있구나” “형, 저랑도 언제 소주 한잔 같이 해요. 제가 살게요” 등 댓글 수백 개가 붙었다. 보수적인 재계에선 정 부회장의 SNS 활동을 일탈로 지적하기도 했지만, 인터넷에서 그는 ‘한국의 일론 머스크’다.
최태원 SK회장은 상대적으로 점잖은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다.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인스타그램 게시물에 네티즌들은 “노잼” “(정)용진이형한테 좀 배우세요” 등의 댓글을 달지만, 최 회장은 꿋꿋하게 팔로어 7만명의 인스타그램 활동을 이어간다. 달밤에 딸 손을 잡고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하거나 테니스를 즐기고, 밤 12시에 남몰래 라면을 끓여 먹는 모습도 공개한다.
재벌 2, 3세에 이어 진짜 MZ인 4세들도 딱히 남 눈치를 보지 않고 삶을 꽤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 DL그룹(옛 대림) 4세인 이주영씨는 인플루언서로 활동 중이다. 인스타그램 팔로어만 10만명. 여행 등 일상도 공개하지만, 샤넬, 루이비통, 디올 같은 명품 홍보가 주된 일이다. 여기서 나오는 수익 일부는 기부한다고. 그래서인지 댓글엔 욕설보다 응원이 더 많았다.
SK그룹 3세 이승환씨는 지난달 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대기업 재벌 3세의 하루’를 공개하며 자신을 “부업으로 ‘재벌 2세의 아들’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35세인 그는 “저를 노출시킬 이유는 딱히 없지만, 자선 기부 사업을 대중과 함께 개척하고 싶다”며 출연 이유를 밝혔다. 물려받은 재산이 있지만 얼마인지 궁금하지 않고, 최애 음식은 시래깃국, 돈가스라고 했다. “진짜 재벌은 이렇게 돈을 쓰는구나” “재벌 3세도 우리랑 비슷한 음식을 먹고 사는군요” 등의 반응이 이어졌다. 의도치 않게 일상이 공개되는 경우도 있지만, 기업 측에서 이를 막거나 숨기려 하지 않는 것도 변화한 분위기다. 이재용 회장의 딸 이원주씨는 최근 걸그룹 블랙핑크 리사와 태국 유명 식당에서 편한 복장으로 식사하는 모습이 찍혔다. 20대인 원주씨는 본인 계정의 SNS는 없지만 주변 친구, 남자친구 SNS에 자주 등장하며 노출을 피하지 않아 왔다.
시대의 흐름을 만나 1970~80년대 급성장한 재벌은 그간 부정적 이미지로 각인돼 왔다. 정권에 대한 충성으로 맺은 정경유착, 이를 등에 업고 얻은 특혜를 통한 성장, 경영권 장악을 위한 가족 간의 배반과 난투의 중심에 늘 재벌이 있었다. 이런 암흑의 역사 탓에 언제부턴가 재벌 개혁이 서민의 구호가 됐고, 불과 10년 전만 해도 경제민주화 같은 캐치프레이즈가 대선의 주요 이슈로 부상했다. 재벌들이 뉴스에 등장할 때면 경찰, 검찰 포토라인에 서는 등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이 많았다. 노조가 주축이 돼서 국민 상당수가 삼성 불매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 기업 총수 일가는 더 은둔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 작년 2월 한 여론조사에서 MZ세대는 기업가 호감도 순위에서 재벌 기업 창업자에게 1등을 줬다. 2위는 네이버, 카카오 벤처 창업자, 3위는 재벌 2, 3세 경영자였다. 그 뒤로는 중소·중견기업 창업자, 전문경영인 순이었다. MZ가 조직·이념·정치 담론보다 실리에 더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현대적 의미의 개인이 탄생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MZ세대가 투쟁 일변도를 달려온 민주노총·한국노총 등 노조 조직보다는 일자리를 창출하면서 국가 경제를 견인하는 재벌에 대해 더 호감을 느낀다는 것은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난다. 20대에서 이런 현상은 두드러진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관계자도 “MZ가 재벌, 대기업에 대해 긍정 평가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인터넷을 통해 친밀도가 높아진 것도 재벌의 긍정 평가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언제, 어떤 이유로 MZ의 마음이 또 180도 바뀔지 모를 일이다. MZ는 그만큼 변화무쌍하다. 기업 입장에서도 언제나 조심스럽다. 오너가의 사생활과 회사 매출 및 이미지의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유튜버로 활동하며 구독자 50만명을 보유한 오뚜기 3세 함연지씨가 돌연 활동 중단을 발표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일각에선 함씨가 경영 참여 수순에 들어가면서 한가한 일상 공유 등이 부담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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