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符經 解說
太兄思想
2016-07-26 08:40:04
天符經 해설
- 우주의 존재(存在) 원리(原理)와 삶의 의미(意味)를 말하다.
우리나라 고유의 경전인 천부경을 해설한다. 9세기 최치원이 쓴 81자 한시로 풀어보는 이 천부경 해설은 우주와 나의 존재 원리와 삶의 의미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확신할 수 없었던 아주 중요한 것들을 일깨워줄 것이다.
우선 몇 가지 올바른 이해의 배경이 될 수 있는 것들을 검토해본다.
천부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꼭 먼저 짚어볼 것은 바로 천부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한자로 써진 한시이므로 뜻을 새길 때 한자의 뜻을 참고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석학과 선현들이 택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명확히 천부경의 참뜻을 밝혀내지 못했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즉, 천부경은 한자로 쓰인 글이지만 우리 고유의 경전이기 때문에, 한자만으로는 그 참뜻을 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특히 천부경의 핵심 내용을 펼치고 있는 일부터 십까지의 숫자의 의미를 한자 뜻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경전의 본뜻을 왜곡하는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다.
일례로 숫자의 의미를 음양오행과 팔괘, 무극, 태극, 황극 등의 기존에 일반화된 수리학과 연계시키려는 노력은 그 노력의 가상함에도 불구하고 천부경의 참뜻을 엉뚱한 것으로 변질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어찌 읽을 것인가? 천부경에 나오는 숫자는 우리말로 읽어야 한다. 우리 고유의 경전에 나오는 숫자는 바로 우리의 사상을 담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고, 따라서 그 숫자의 참뜻은 바로 우리말에 숨어있는 것이다.
숫자의 의미는 기존의 해석들이 원하고 바라는 대로 수리학상의 숫자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말과 관련된 언어학적인 상징성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새로이 살펴보는 천부경은 우주의 존재 원리와 우리 삶의 의미에 대해 정말 놀라워 감탄을 금치 못할 수준의 깊은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얼마든지 흥분하고 긴장하고, 기대해도 좋다. 독자의 기대가 아무리 크다 해도, 본 해설이 끝나면서 얻게 될 감동에 비할 바 아닐 테니까.
천부경에 대해 이해의 폭이 깊어질수록 필자가 가지게 된 새로운 고민거리를 이야기해 본다. 아니 도대체 어찌해서 이렇게 완벽한 내용을 담은 천부경이 그 오랜 시간 동안 올바른 방향으로 해석이 되지 아니 했을까 하는 것이다.
그저 있는 그대로 모든 우주 존재의 원리를 다 설명해 주고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리 삶의 의미까지 완벽히 제시하고 있는 이 엄청난 진리가 왜 그토록 오랜 세월 왜곡되고 감추어져야만 했을까?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은 바로 우리의 천부경이 설파하는 그 참된 이치를 그대로 투영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해설이 끝날 즈음에 독자도 심장이 떨릴만한 아이러니를 같이 느끼게 될 것이다.
흔히들 말하기를 천부경은 세상의 모든 경전 중의 으뜸인 경전이며, 동서양의 모든 철학과 종교가 여기에서 나왔다고 극찬을 한다. 그런데 그 말은 실로 허언이 아니다. 천부경을 접한 사람들은 그 심오한 진리의 모든 것을 거의 알지 못했음에도 그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이 점 또한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 또한 천부경만이 지니고 있는 그 특이하고도 보편적인 참 진리에 기인하는 것이다. 아니 보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천부경이 말하고 있는 그 참된 진리를 숨기고 감출 목적으로 세상의 모든 다른 종교와 사상이 나온 것이리라. 그것이 무엇일까? 도대체 그 어떤 놀라운 원리와 의미가 담겨 있기에 인간 세상의 성인이라는 사람들까지도 모든 치졸한 방법을 동원하면서까지 참 진리를 호도해야만 했을까? 이러한 사실까지 모두 알게 되면 진실로 놀라울 뿐이리라.
최치원이 쓴 81자 천부경이다.
一始無始 일시무시
一析三極 無盡本 일석삼극 무진본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천일일 지일이 인일삼
一積十鉅 無櫃化三 일적십거 무궤화삼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
大三合六 生七八九 대삼합육 생칠팔구
運三四成環 五七一妙衍 운삼사성환 오칠일묘연
萬往萬來 用變 不動本 만왕만래 용변 부동본
本心 本太陽 본심 본태양
昻明 人中天地一 앙명 인중천지일
一終無終 一 일종무종 일
기존에 보아왔던 것과 끊어 읽기가 조금 다를 것이다. 그 조그만 차이가 실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마치 지난해 건너 대륙에서의 나비 한 마리의 펄럭임 때문에 지금 여기에는 태풍이 부는 것 정도로 말이다.
천부경에 나오는 숫자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우리말의 숫자가 가지는 상징성을 그 의미로 가진다. 즉 일은 하나, 이는 둘, 삼은 셋의 의미인 것이다. 십이 열이 되는 것까지 동일하다.
그러나 일과 이, 즉 하나와 둘 만큼은 이중적인 의미로 써졌다는 것을 반드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최치원이 시구(詩句)로 적으면서 부린 재미일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천부경이 말하고자 하는 주된 내용이 바로 그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미리 설명하자면, 일(一), 하나는 있음과 있다 로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고, 이(二), 둘은 그에 반하는 것, 즉 없음과 없다 로 무(無)를 상징하는 것이다. 시의 댓구를 살펴보면 그리 큰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천부경은 우주의 존재 원리를 설명한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있음과 없음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빛과 어둠이 과연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즉,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없다. 어두운 곳에 빛이 생기면 어느새 어둠은 사라지고 만다. 빛이 먼저인가? 어둠이 먼저인가? 빛이 큰 것인가? 어둠이 더 큰 것인가? 과연 기존 다른 사상들이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존재는 무에서 창조되었는가? 심지어 있음과 없음은 결국 같은 것인가? 그 답이 첫 문장에 등장한다.
一始無始 일시무시 하나가 시작되고 무가 시작되었다.
다시 읽어보자. 있음이 시작되자 비로소 없음이 시작되었다.
천부경은 있음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거의 모든 사상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것에 대답은 없지만, 분명히 있음이 먼저 시작되고 나서야 없음이 시작되었음을 가장 먼저 밝히고 있다.
논리적인 사고를 이어가 보자. 있음이 없이 없음이 과연 존재할까? 아무것도 없다면, 진실로 그 아무것도 존재 자체를 하지 않는다면, 없음이란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아니다 이다. 없음은 그 자체로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없음이란 바로 반드시 있음이 먼저 있어야 하는 개념인 것이다. 천부경은 단호히 말한다. 있음이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없음이 시작되었다고.
그런데 우리는 일시무 시일 이렇게 읽어왔다. 하나는 무에서 시작되었다. 또는 일시 무시일 이라고 읽어왔다. 하나는 그 시작도 없이 시작되었다. 웃긴다. 앞쪽 해석을 따르자면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있음이 시작되었다. 없는데, 아무 것도 없는데 어찌 있음이 시작되겠는가? 뒷부분 해석을 빌리자면 시작이 되었는데 시작됨이 없이 시작되었다. 이것도 웃긴다. 시작됨이 없이 시작되는 것도 있던가? 진정 우리 우주에 그런 존재나 그런 원리가 있을까? 하지만 적어도 이런 식으로 말을 해야 철학을 아는 것처럼 생각을 해 왔다.
그러니까 도대체가 있을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을 말해놓고, 그렇게 때문에 이해할 수 없으니 그것은 심오한 진리라고 허세를 부려왔던 것이다. 심지어 있음과 없음은 같은 것이라고 까지 극언을 해야 심오한 진리를 이해하는 것처럼 생각해 왔다. 왜 그랬을까?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있음이 먼저이고 없음이 그 있음에 상대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게 되면, 그래서 그 뒤에 나오는 천부경의 모든 진리를 하나의 줄기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대단히 곤란하기 때문이다. 정말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부경의 참뜻을 아는 사람은 알기 때문에, 좀 안다는 사람들은 그 참뜻을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일시무 또는 일시 무일시로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리는 단순한 것이다. 그리하여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읽어보시라.
있음이 시작되고, 그리고 그래서 없음이 시작되었다.
뜻이 통하는가? 있음은 당연 먼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있음이 없는 곳에 없음이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다.
一析三極 無盡本 일석삼극 무진본
있음은 쪼개어져서 세 개의 방향으로 끝까지 펼쳐지고, 그리 되면 없음은 그 근본이 다 소진된다.
요부분도 조금 다르지 않은가? 있음이란 쪼개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쪼개어지니 그것이 흩어질 수도 펼쳐질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변화, 발전, 소멸할 수 있는 것이다. 세 개의 방향 그 극한까지 쪼개어질 수 있는 것이다. 세 개의 방향이란 전후좌우 상하 방향을 의미한다. 즉 있음이란, 태초 우주에 있어 있음이란 것은 3차원 부피를 가지는 그런 있음이었음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다. 만약 전후좌우 상하 삼극한 모두가 있음으로 채워지면 어찌 되겠는가? 단순하게 이해하자. 진리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니까. 그렇다 없음이란 것이 그 근본을 다해 없게 되는 것이다.
천부경이 말하는 있음과 없음의 개념은 이토록 간단하다. 그리고 명확하다. 그저 누구나 논리적이고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왜 있음은 없음에서 생겨나야만 하거나 시작됨이 없이 시작되어져야만 한단 말인가? 또한 왜 있음은 없음과 같아야 한단 말인가?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천일일 지일이 인일삼
하늘이 있음이 그 하나요, 땅이 있음이 그 둘이며, 사람이 있음으로 그 셋이니라.
앞에서 말한 일석삼극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 부분이다.
하늘이 있으니, 땅이 있으니, 그리고 사람이 있으니 셋이란 말이다. 아마도 하늘을 1차원적인 것이라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또한 땅을 이차원적인 것이라 이라 했다면 사람을 3차원이라 보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우리말 하나는 있다는 뜻이요, 크다는 뜻이요, 밝다는 뜻이며 그리고 시작이라는 뜻이다.
하늘이 있음이 하나라는 것은 태초 우주의 생성과정이 시작된 것을 절묘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빅뱅이 생겼다. 순간 엄청난 에너지가 분출되며 엄청 큰 밝음이 있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의 시작이다. 그러나 그 순간 모든 존재는 1차원적인 것으로만 존재했다. 그 빅뱅의 순간에는 넓이도 부피도 없는 우주였으리라.
그 이후 땅이 있으매 그 둘이 되는 과정으로 진행한다. 우리말 둘⋅두울은 두르다 는 뜻이다. 둘러친다는 말이기도 하다. 광활한 대지에 하나의 경계를 두르면 무엇이 생기는가? 비로소 넓이가 확정된다. 경계의 안쪽과 바깥쪽이 구분되면서 2차원적인 넓이를 가지는 존재가 된다. 지금은 땅이 지구를 의미하며 지구는 둥글다. 그러나 옛사람이 보았을 그 땅은 아직 입체가 되기에는 한참 부족한 그런 존재였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당시로서는 그저 2차원적인 존재를 상징하는데 땅만 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있으니 셋이란 것은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셋은 서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직선만 있다가 그들을 두르는 것이 생겨났고 그런 것이 비로소 서있는 존재가 되었다.
즉 전후만 있다가 좌우를 가지게 되고, 이제는 상하가 생성되었다. 이제 모든 있음은 3차원 입체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일정한 부피를 가진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사람이 상징하는 것은 우리, 즉 인간 그 자체가 아니다. 천지인에서의 사람은, 적어도 앞부분에 나타나고 있는 그 사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부피를 가진 모든 존재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적 실재로서의 존재, 그것이 바로 사람인 것이다.
일석삼극을 이해하기 위해 무극, 태극, 황극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아니 같은 극자가 들어간다고 해서 이 삼극을 그 삼극이라고 보는 순간부터 천부경 해석은 엉망이 되고 만다. 무극과 태극이 등장하면, 음양이 나와야 하고 오행이 또한 끼어들게 된다. 그러면 논리가 논리를 부르는 수리학 혹은 기타 잡학으로 전락하여 그리하여 천부경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팔, 여덟이 그저 팔괘의 팔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도낙서가 무엇인지 선천수와 후천수가 무엇인지 알지 않아도 된다. 아니 이 자리에서 그것을 논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감히 단언하건대, 삼극을 무극, 태극, 황극으로 설명하는 것은 천부경의 진실한 의미를 아는 자가 그 뜻을 왜곡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꾸며낸 지극히 허무한 잡설에 불과하다. 왜 그래야만 했는지 글을 읽어감에 따라 독자들도 조금씩 이해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인일삼의 인을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도 피해야 할 일이다. 아직은 태초 우주가 생성되는 시점이다. 미안하지만 아직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아니, 사람 뿐 아니라 그 어떤 생명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러니 인이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잠시 여유를 두기 바란다. 인이 사람으로 불리어지는 순간이 오긴 올 테니까.
요컨대, 천일일 지일이 삼일삼은 태초 우주의 그 시작된 있음이 분화되어 현상계의 물질로서 존재하게 된 것을 보충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一積十鉅 無櫃化三일적십거 무궤화삼
있음은 쌓여서 열이 되나 없음은 궤와 같아서 셋으로 남느니라.
그렇다. 삼극으로 쪼개어진 그 있음은 변화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다시 쌓이거나 모일 수 있는 것으로 존재하게 된다. 결국 십, 열까지 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없음은 궤짝과 같은 것이어서 이미 고유한 하나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쪼개어지거나 쌓이지 않고 그대로 셋의 성질만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없음을 좀 더 깊게 생각해 본다.
1차원적인 세상에서 없음이 있을 수 있을까? 종이가 한 장 있다. 그 위에 직선을 하나 긋는다. 이 직선은 1차원이다. 이 1차원 안에 없음이 있는가? 중학교 수학시간으로 되돌아가 보자. 1차원 수직선이 있다. 이 직선위에 비어있는 점이 있을까? 뭐라고 대답하는가? 모든 실수는 각각 수직선 위의 한 점에 대응하며, 두 실수 사이에는 그야말로 무수히 많은 실수가 존재한다. 따라서 수직선 위의 모든 점을 실수로 채울 수 있다.... 오케이, 정답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1차원에는 없음이란 것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우주에 있음이 시작되어 1차원이 형성된 그 순간에도, 아직 없음은 시작되지 않았다.
이제 더 진화하여 2차원이 된 우주를 상상해 보자. 물론 순간적인 상태에 머물었겠지만, 넓이만 존재하는 2차원에 없음이란 것이 존재할까? 2차원에는 1차원처럼 명확한 선언은 없다. 하지만 2차원에도 역시 없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2차원 형성과정, 즉 두르는 행위 결과 생겨난 것은 안과 밖뿐이다. 넓이가 형성되면 이쪽 아니면 저 쪽 이라는 있음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넓이를 결정하는 경계선도 있음의 성질이요. 이 쪽이든 저 쪽이든 있음만 있을 따름이다. 2차원 세계에도 없음이란 없다.
천부경은 말한다. 없음은 궤짝과 같은 것이라고. 궤짝, 무엇인가 귀중한 것을 담는 것이다. 우주의 없음은 3차원적 존재이다. 부피가 없는 궤짝을 본 적이 있는가? 그저 궤짝은 3차원인 존재인 것이다. 다만, 우주의 없음은 그 크기가 매우 커서 모든 있음을 자기라는 궤짝 안에 모두 담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없음의 크기가 있음보다 클 것인가?
그렇지 않다. 위에서 일석삼극 무진본에서 이미 설명했다. 없음은 궤짝으로서 모든 있음을 그 안에 담고 있어 더 클 것처럼 생각되어지지만, 있음이 무한대로 확장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있음이 무한대로 확장된 그 순간, 없음은 더 이상 존재할 그 근본이 다 소진되었을 것이므로.
이것이 천부경이 말하는 존재라는 것, 있음과 없음의 실체이다.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
하늘이 없음도 셋이요, 땅이 없음도 셋이요, 사람이 없음도 셋이라.
이 말의 뜻이 이해가 되는가? 우주 태초의 천지인 차원에는, 즉 우주의 1차원과 2차원, 3차원 모두의 경우에 없음이란 3차원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보충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기에, 없음이 고작 3차원적인 것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기에 그 뜻을 이리도 확실하게 정의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후에 나오는 모든 숫자에도 없음이 없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라는 의미이다. 즉 사오육칠팔구 그리고 십의 숫자의 차원에는 있음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뜻이다.
大三合六 生七八九 대삼합육 생칠팔구
큰 셋이 더하여져서 여섯이 되고 이 여섯에서 일곱, 여덟, 아홉이 생기는구나.
대삼, 큰 셋이란 무엇일까? 큰 셋은 이제껏 설명한 대로 3차원의 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동시에 3차원의 없음을 말한다. 왜 크다는 형용사가 필요한가? 3차원적 있음은 자체로 3차원이지만, 그 속에는 1차원과 2차원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필연적으로 3차원적 있음은 하위 차원의 모든 것을 그 속성으로 한다. 즉 있음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므로 크다는 뜻을 보태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3차원의 없음은 어떠한가? 역시 하늘이 없음도 셋이고 땅이 없음도 셋이고, 사람이 없음도 셋이니 그 3차원적 없음 역시 큰 셋일 것이다.
그 3차원적 있음과 3차원적 없음이 합하여져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냈으니 그것이 바로 여섯인 것이다. 여기서 바로 핵심으로 들어가자. 이 여섯은 무엇인고 하니, 바로 우주에 존재하는 6차원을 의미한다.
있음과 없음이 합하여지면 무엇이 생겨나는가? 그것은 바로 있음과 없음이다. 합하여지기 전에 있던 것이 있음과 없음이었을지 언대, 그것을 더해서 나오는 것은 있음과 없음일 뿐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단순한 아이들 말장난이 아니다. 말 그대로 있음과 없음이 더하여져서 나타난 것을 그 고유의 속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6차원의 존재 방식인 것이다.
그러면 합하여지기 전에 존재했던 3차원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3차원에도 있음이 있었고, 없음이 있었다. 그런데 6차원에도 있음과 없음만이 존재한다. 그런데 다르다. 과연 그 무엇이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이것에 대한 올바른 해답이 천부경 전체에 대한 이해와 직결된다. 이 6차원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천부경이 논하는 그 엄청나게 놀라운 진리를 단 하나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중요한 물음에 답하자면, 3차원은 있음이 있고, 있음이 없으면 그것이 바로 없음인 차원으로 있음과 없음이 상호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6차원은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그런 차원이다. 있음과 없음이 합하여져서 동시에 있음과 없음이 함께하는 그럼으로써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상호 내포적 체계로서의 있음과 없음이 공존하는 세계가 새로이 형성된 것이다.
우주의 그 어떤 것이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가? 재미난 것은 그 누구도 한 순간 대답을 하지 못하면서도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가 이미 그 정확한 답을 이미 명확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이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당신의 마음이다. 당신은 눈 뜬 순간부터 당신의 마음이 시키는 일과 시키지 않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물론 많은 부분 그저 본능이 하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하는 삶을 살 수도 있겠지만, 누구나 마음이 자기 자신 속에 존재한다는 것과 그 마음이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왜 생겼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저 마음이 있다는 것만은 모두가 명확히 알면서도 말이다.
우선은 조금만 더 진도를 나아가 보자. 천부경은 말한다. 있음과 없음이 합하여져서 마음이 되고 그것에서부터 일곱과 여덟과 아홉이 생겨났다고... 그러니 일곱과 여덟, 아홉은 이 여섯 번 째 차원, 마음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그런 차원이 되는 셈이다. 아마도 천부경을 옮겨 쓴 장본인인 최치원도 이 여섯과 일곱, 여덟 그리고 아홉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원전에 여섯에서 이들이 생겨난다는 것을 그저 옮겨왔을 뿐이다. 만약 최치원이 그 여섯 이후의 숫자의 의미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면, 이토록 긴 시간 동안 천부경의 진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비밀이 되어 있지는 않았으리라.
運三四成環 五七一妙衍운삼사 성환 오칠일묘연
셋과 넷이 운용되어 고리가 만들어지니 그것이 다섯과 일곱이라는 크고 묘한 이치로 확장되느니.
끊어 읽기에 주의하시라. 하늘의 이치대로 운행되는 것은 셋과 넷이다. 이제까지의 우리의 논지대로 하자면 3차원과 4차원이 움직여서 다섯이라는 순환하는 차원, 그리고 역시 순환하는 차원이지만 이보다 고차원인 일곱이 되었다. 이런 변화와 발전은 실로 크고 놀라운 하늘의 이치란 뜻이다.
셋까지의 의미는 이제 다 알고 있을 터이고, 이제는 넷 이상의 의미에 대해 살펴본다.
수학에서 말한다. 점은 영차원이고, 이 점이 한 쪽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 1차원인 직선이며, 이것이 또 교차된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 2차원인 면이다. 2차원이 되는 순간 전후와 좌우가 모두 만들어졌다. 이것이 상하로 움직이면, 그 때는 3차원인 입체가 된다. 그렇다 차원이란 것은 하위 차원의 모든 속성을 자기의 속성으로 삼으면서 그것이 어느 쪽이든 기존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그 전과 전혀 다른 속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앞서 있음이 분화되어 3차원 입체가 된 그 있음 역시 상위 차원인 4차원이 되려면 어느 방향으로든 통째로 움직여야 한다. 그러면서 3차원 있음만이 있던 것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자기만의 속성을 가져야 한다. 그것도 3차원적인 모든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면서 말이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이미 전후로 좌우로 그리고 상하로 움직였는데, 그 상태를 모두 포함한 채 또 다시 움직일 수 있는 방향이 있을까? 적어도 천부경의 참 진리가 세상의 비밀이 된 이후 수천 년 동안 이것을 명확히 알아낸 사람은 없었다. 아인쉬타인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인쉬타인 이후 4차원 시공간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그리고 우리가 존재하는 이 차원이 바로 시간을 포함하고 있는 공간, 4차원 시공간이라는 놀랄 만큼 혁신적인 생각을 해 낸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 아무도 그 대답을 확언할 수 없었던 것이 너무나 쉬운 문제로 바뀌어진다.
그렇다. 스스로 완벽한 공간을 가진 입체, 있음과 없음이 함께 존재하며 실재하는 모든 만물이 이전에는 전혀 그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향, 즉 시간의 방향으로 또 한 번 움직일 수 있음을 누구나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3차원 입체는 그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시간을 따라 또 한 번 움직였던 것이다. 아니 움직이고 있는 중인 것이다.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또 미래로 말이다.
이제는 모두가 눈치를 챘을 것이다. 우리 우주의 제 4차원은 바로 시간의 차원이다. 그런데 사실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것을 어렴풋이나마 이미 알고는 있었다. 누구나 한번쯤은 읽어봤을 그 무협지에 단골메뉴처럼 등장하는 것, 장강의 앞 물결은 뒷 물결에 밀려 앞으로 간다. 바로 이것이다. 강물이 앞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고, 우리는 그것이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임을 느낀다.
논리학 책에 자주 등장하는 한 구절을 보자. 그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빠질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시간이다. 공간적으로는 분명 같은 공간이지만, 시간이 더하여져서 생겨난 4차원 시공간에서는 그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진리이다. 처음 빠진 그 강물과 두 번 째 빠진 그 강물은 3차원적으로 같은 공간이지만 4차원 시공간의 관점에서는 차원이 전혀 다른 강물인 것이다.
우리말 넷은 바로 이런 시간적 흐름을 그리 어렵지 않게 떠올리게 만든다. 넷은 시냇물의 냇. 바로 강물같이 흘러가는 물이다. 천부경이 말하는 사는 결코 한자 사가 아니다. 우리말 넷이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는 물결의 흐름을 내,래,냇,넷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본문 구절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자. 우주가 빅뱅을 한 후 순간적인 1,2 차원을 거쳐 3차원 물질이 존재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 세상에 오래고 오랜 시간, 그야말로 장구한 시간이 끊임없이 그 3차원 물질에 그 어떤 작용을 해왔다. 이것이 바로 운삼사의 의미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드디어 나타난 또 다른 차원의 세상, 우주가 된다. 시공간에 드디어 다섯의 차원이 열린 것이다.
다섯은 무슨 뜻인가? 우리 말 다섯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보다 보면 그 중 상당히 그럴싸한 느낌을 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다섯이라, 다시 서는 것이다... 다섯의 차원은 우주가 초기 생성 과정을 지나면서 그야말로 자연스레 새로이 열린 단순 시공간이 진화한 새로운 차원이다. 다시 선다는 것은 스스로 선다는 의미와도 통하는 말이 된다.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한 존재가 서있는 존재로 되는 것, 이것조차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닐진대, 한 번 섯다가 또 서는 것은 진정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니라. 아니 그렇게 다시 서는 것이 다른 그 어떤 물리적 힘의 작용이 아니라, 스스로 다시 서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 우주의 차원이 이동하는 대단한 사건임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짐작하시겠는가? 다섯, 다시 서는 것, 스스로 다시 서는 것이 의미하는 제 5차원, 그것은 바로 생명의 차원이다. 생명은 스스로를 다시 세우는 유일한 것이다. 하나의 있음으로서 존재하는 것 들 중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다시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생명이다. 끊임없는 자기 복제 과정을 통하여 스스로 다시 있음으로 다시 서있는 존재, 그것이 생명인 것이다.
re-organization 다시 자기를 조직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다섯이며, 과거 단순 4차원 시절의 모든 것을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어 누가 보아도 확연히 이전 시공간과는 다름을 인식할 수밖에 없게 하는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인 것이다, 그것이 우리 우주의 제 5번째 차원인 생명이 존재하는 시공간, 바로 그것이다.
어떻게 그런 차원이 열리게 되었을까? 그야말로 그것은 생명의 신비에 속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은 우주의 생성 초기부터 생명이 존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천부경이 설명하고 있는 운삼사, 삼차원의 물질과 사차원의 시간이 그야말로 장대한 시간 동안 유구히 움직인 결과, 생명 없음에서 있음으로의 방향으로 시공간이 이동한 결과물인 것이다. 이제 우주는 비로소 生時空間 생시공간이 되었다.
천부경은 그 다섯이 고리라고 풀이하고 있다. 생명의 고리, 끊임없이 순환하는 성질을 가진 생명의 의미를 잘 표현해주는 멋진 한 구절이다. 삼사가 운행한 결과 고리가 만들어지는데, 그것은 생명의 고리이다. 생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그 아무리 신비한 영역에 속하는 것일찌어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한 가지 엄연한 사실이 우리 앞에 존재한다. 그것은 생명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는 없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생명이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 생명 생성의 신비를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런 생명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우주는 온갖 생명이 생명의 고리 속에서 나고 자라고 소멸해가는,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자기를 복제해냄으로써 계속 있음을 이어나가는 그런 생명의 차원에서 있음을 유지하게 되었다.
또한 천부경은 다섯 뿐 아니라 일곱도 고리라는 상징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성환오칠이다. 일곱도 고리인데, 생명의 차원보다도 두 단계나 더 고차원적이다. 생명조차도 놀라운 것이거늘, 그보다 훨씬 더 놀랍고 놀라운 또 다른 것이 있음으로 분명하게 우리 우주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선언인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앞서 논의된 적이 있는 것, 즉 지금 알아야 할 두 개의 차원이 고리임에는 같지만 서로 다르므로 그 두 개의 고리를 연결해주는 그 있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앞서 대삼합육란 구절을 풀이했다. 큰 셋 있음과 큰 셋 없음이 합하여져서 동시에 있으면서 없는, 그러면서 없으면서도 있는 그런 여섯의 차원이 만들어진 것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 차원이 바로 마음의 차원이라는 것까지도 밝힌 바 있다.
이 여섯 차원에 어느 한 순간 홀연히 마음이 생겨난 것일까? 바로 앞 다섯 차원의 경우는 장구한 시간이 필수적이었다. 초기 단세포적인 생명이 생겨난 이후 오래고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지금처럼 다양한 생명의 장이 열리게 된 것이다. 생명의 차원이 열린 이후 여섯, 마음이 차원이 열리는 과정도 이와 상당히 흡사할 것이라 생각해 보자.
온 우주에 생명의 기운이 충만해지고도, 그 후로 또 오랜 세월이 흐른 이후, 드디어 있음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우리 인간, 사람이다. 사람이 우주에 사람으로서 있게 된 이후 이제까지의 다섯 차원의 우주는 또 한 번 대변혁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이 마음의 차원으로의 이동이라는 것은 이미 설명했거니와 여기서는 그 과정과 의의를 좀 더 깊이 있게 알아본다.
사람이 있게 되기 이전까지 우주에 존재한 것은 삼차원의 물질과 그것이 움직이는 시간, 그리고 사람을 제외한 다양한 각종 생명뿐이었다. 있음이 다섯 차원에 걸쳐 존재하며 없음은 한 개의 차원 즉 삼차원에 존재할 뿐이었다. 사차원에 즉 시간의 차원에 없음이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시간은 오로지 그 자체로 있을 뿐인 것이다.
아무리 오래 전 그야말로 태초부터, 그 멀고 먼 모든 것이 끝나는 그야말로 마지막 종말의 그 극한 한 순간까지 시간은 있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그야말로 시간으로서 있기만 한 것이리라. 그 어느 한 순간도 시간이 없음이 없었으니 그것은 그 어떤 짧은 단위의 계측기로도 그 멈춰있는 한 순간을 영원히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연속적으로 이어져 오는 그런 속성을 가진 것이라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생명의 차원에 들어선 이후에도 이 차원에 없음은 없었다. 이 차원에서조차도 그 아래 삼차원에서의 없음이 존재하는 것 이외의 생명 없음의 차원은 있어본 적이 없다. 이제껏 없었던 생명이 새로이 만들어지는 있음의 과정만이 끊임없이 반복될 뿐이었다. 전 지구를 지배하던 그 많던 공룡이 하루 아침에 거짓말처럼 모두 죽어 없어진 그 순간에서조차, 다섯 차원의 생명 없음은 없었다 할 것이다. 없어진 것은 셋 차원 삼차원의 공룡이라는 물질을 구성하던 그 몽뚱이었을 뿐.
그러나 사람이 있게 된 이후, 그 모든 것이 조금씩 그러나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다섯 차원에는 없음이 없다는 대원칙이 조금씩 흔들리게 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공룡이 멸종한 그 순간에도 없었던 없음이 인간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 있음만 있어야 하는 이 차원을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천부경 첫문구를 상기해 보자. 일시무시... 있음이 시작되고 없음이 시작되는 대원리에 의해 설명해 보자면 이렇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하면서, 이제까지 우주와는 다른 우주가 서서히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까지의 우주에서는 전혀 있을 수 없었던 새로운 있음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신적 개념의 생성이다. 이제까지 있음으로서 존재할 있었던 것은 3차원의 물질과 시간, 생명체였는데 이제는 3차원 물질의 속성을 전혀 가지지 않는 새로운 있음이 생겨난 것이다. 즉, 공룡의 멸종 순간에도 있지 않았던 바로 그것, 죽음이라는 개념, 그 자체가 사람이 존재하기 시작한 순간 이후 인간 사회에서 새로이 있음으로서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와 유사한 모든 것들이 새로운 있음으로서 우리 우주에 존재하게 되었다. 사랑이라는 것, 미움이라는 것, 전쟁이라는 현상에 대한 개념과 평화라는 추상적 개념, 생명이라는 인식과 탄생, 성장, 소멸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의 덩어리 같은 것들이 3차원적인 있음이 없이도 새로이 이 우주에 있음으로 가능케 된 것이다.
인간이 있기 전에는 결코 있을 수 없었던 그런 추상적이며, 개념적인 있음이 인간이 있음으로 인해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의 사유 능력이 발달하고, 그것이 집적될수록 더욱 다양한 개념들이 새로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것들은 이른 바 정신적으로 실재하는 있음으로서 이 우주에 엄연히 새로운 있음의 원리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는 원리를 천부경에서는 대삼합육이라는 문구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바대로 있으면서 동시에 없고, 없으면서 동시에 있는 그런 묘한 이치의 있음으로 형성된 제 6차원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모든 다양한 개념, 정신적인 가치들로 가득 차게 되면서, 그것들이 이제껏 어렴풋이 형성하고 있던 자기의 있음을 우주적 언어로 보다 분명히 나타날 수 있게 되었을 때 즉, 그것들의 총집합체가 스스로 하나의 통일된 목적을 가지게 되고 그 목적을 위해 작용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수준으로까지 진화가 된 그 순간이 바로 이후 우리가 지금 마음이라고 부르는 그 있음이 나타나게 된 것이리라.
우리 인간의 육체 있음과 그 작용을 비교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우리는 손과 발 등의 지체와 오장육부 등 내장과 생각하는 뇌를 가지고 있다. 이들 각자 모두는 신체적으로 각기 다른 존재이며 각기 다른 작용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진화적으로 합치가 된 순간 하나의 인간 신체를 구성하고 그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즉 전적으로 나라는 사람의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일부 정신적 개념과 가치들, 그것들이 각자 이러한 신체적 나와 같은 수준으로 정신적인 나를 구성해낼 때 그것이 바로 정신적 있음으로서의 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오로지 하나의 개별적인 물리적 신체적 있음에만 관여할 때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영혼이 된다. 요컨대 개별적 신체를 구성하는 내 몸도 사람이요, 각자의 사람, 그 전체도 사람이다. 지문도 다르고 생김도 다르지만 같은 사람임에는 같은 것이다. 영혼과 마음 역시 이러하다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영혼은 한 사람의 마음인 것이고 모든 사람의 영혼이 마음인 것이다.
아는 것처럼 마음은 3차원 물질로서의 있음이 아님이 분명하다. 심장이든, 뇌든 혹 단전이든 우리의 마음이 있다고 상정하는 그곳에서조차 우리의 마음은 물질적 있음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다. 우리에게, 나에게 마음이란 것이 실제로 있음을.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는 없어도,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 수는 없어도 마음이 있다는 것,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이미 3차원 물질의 차원에서의 물질로 그 껍데기를 구성하고, 그 덩어리 속에 시간을 얹은 채, 생명체로서 순환하는 고리 속에 들어와 있으면서 또 하나, 영혼 혹은 마음이라고 불리는 것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여섯의 차원에서만 가능한 일이며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각자 각각 그 영혼과 함께하는 그런 있음이 되었다. 사람이 마음과 함께하는 그런 있음이 된 것이다. 이제 우주는 心生時空間 심생시공간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이 여섯 차원의 마음을 숙고해 보면, 이제 비로소 진정한 보편적 진리라는 것이 있음으로 우리 우주를 구성하는 부분으로 자리하게 되었음을 인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각자의 다른 영혼이 양심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그 양심은 보다 분명한 의미로서의 마음을 나타내게 된다. 각자의 영혼은 각자의 신체적 외양이 모두 다르듯, 모두 다르지만 그 영혼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속성은 모두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영혼이 양심으로 이해될 때는 이 보편성에 더 주목하는 경우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되돌아가자. 우리는 지금 성환오칠 일묘연을 풀이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섯과 일곱이 같은 고리인데, 차원이 다른 고리임을 이해하기 위해 두 개의 같은 고리를 연결해줄 수 있는 여섯 차원의 있음, 즉 영혼, 양심, 마음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일곱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말에서 고리란 것은 순환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이미 설명했으나, 고리가 가지는 또 하중요한 상징성이 있다. 그것은 굴레이다. 다섯 차원의 고리는 순환의 속성으로 충분하나 그것을 포함하면서도 그리고 여섯 차원의 영혼, 양심, 마음을 더한 상태에서의 일곱 차원의 고리는 순환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부족함을 고리가 가지는 또 하나의 상징성인 굴레가 충분히 채워 줄 것이다.
순환에 굴레라는 의미가 더해지는 순간, 그것은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을 떠오르게 한다. 순환적으로 계속되면서 벗어날 수 없는 숙명, 그것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부른다. 일곱의 차원은 운명, 인연의 차원으로 형성되어져 있다.
우리말 숫자 일곱을 좀 더 생각해 보자. 일곱은 무엇인가? 우리말 일은 무언가에 작용하는 힘을 말한다. 우리가 일을 한다는 것은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에너지를 더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어떤 변화가 생겨났을 때 그 변화의 이유는 바로 일 때문이 분명하다. 이런 사실을 잘 살펴보면 일은 그 어떤 현상의 이유, 까닭, 원인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 일에 붙어있는 글자 곱을 곱하다로 이해한다면 그 어떤 원인이 여러 번 반복하여 작용하는 것이 일곱의 뜻이라 할 수 있겠다. 같은 원인이 반복되어 같은 현상이 반복되는 것, 그래서 그 현상이 하나의 추세로, 경향으로 나타난다면 그 원인과 그 결과를 합쳐 인연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여섯 차원 마음의 차원에서 새로이 나타나는 순환의 고리는 운명, 인연이라는 굴레이다. 여섯 차원에 새로 생겨난 있음이 마음이기 때문에 이 운명이라는 것은 우선적으로 마음을 대상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 특정한 상황에 특정한 경향으로 반복하여 작용할 때 그 때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바로 인연의 굴레이며, 이것이 사람 각자에게는 자기의 운명이 되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이 7차원에는 우주의 거의 모든 자연적 원리까지도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그 이전에는 각 차원의 있음 속에서만 비밀로 숨어있던 그 수많은 자연적 물리적 법칙들까지도 이제는 모두 각각이 완벽한 제 모습을 갖춘 채 자리하면서 물
리적 법칙은 물리적 법칙으로, 화학적 법칙은 화학적 법칙으로, 그리고 인간 세상의 인연적 법칙은 인연적 법칙으로 각각 통합되어진 후 이런 법칙들이 또 다시 서로 연결되고 상호작용을 한 결과 각 하위 차원의 모든 있음을 주관하는 한 덩어리의 통일적 법칙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이것을 그저 인연적 법칙이라 부른다 해도 충분할 것이다.
물리학자들이 그토록 증명해보이고 싶어 했던 만물의 통일장 이론이 바로 이 일곱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리라. 보다 고차원적인 오륙 차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사차원 이하만을 대상으로 하는 그들의 통일장 이론은 그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라고 폄하하더라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일곱 차원을 이해하지 전까지는 존재하지도 않은 것일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제 우리 우주는 緣心生時空間 연심생시공간이 되었다.
이 일곱 차원의 있음을 제대로 본 이가 부처였다. 부처의 모든 사상은 바로 세상에 존재하는 이 인과율로부터 시작한다. 모든 것에는 그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을 있게 만든 또 다른 원인이 있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 인과율의 법칙 안에서 이루어진다. 부처로 하여금 왕궁을 떠나게 만들었던 인간 세상의 풀 수 없는 숙제,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그 모든 것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인연이 있었다. 장구한 세월 속에 쌓이고 쌓여 나의 한 부분이 된 그것은 바로 나의 업이다. 내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미래에 또 다른 나의 없이 될 것이다.
운명이 있다는 말이 거슬리는가? 당신이 태어나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당신 운명이 결정되어져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가? 당신이 인정하든 말든, 당신이 받아들이든 말든 당신 운명의 줄기는 정해져 있다. 최근의 과학적 연구 결과가 그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하고 있다.
인간의 게놈, 유전자를 해독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태어나는 순간, 당신이 몸속에 존재하는 유전자에는 당신이 이 우주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과 하지 않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이미 확률적으로 정해진 상태가 된다. 당신이 알콜 중독이라면 몇 살 쯤 그렇게 될 가능성이 얼마나 있는지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 당신은 그것을 모르고 지금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당뇨, 심장마비 등 육체적 병리 현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히 정해져 있는 것이다.
유전자의 경우를 바탕으로 유추해보자면, 앞서 말한 여섯 차원에 존재하는 모든 정신적인 존재들이 당신의 영혼에 마치 생물학적 유전자처럼 각인되어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하거나 놀랄 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부모가 매사에 성실하고 정의롭고 이웃에 배려 깊었다면 그 자식도 그러할 가능성이 그만큼 많아지는 것이다. 그것이 조상의 음덕으로 후손이 복을 받게 되는 까닭임을 옛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매사에 남에게 나쁜 짓을 하던 사람의 자손은 그야말로 급살을 맞는다든지 하는 일마다 패가 안 풀린다든지 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일이다. 현대를 사는 당신만 모르고 말이다.
이 인과의 고리, 내 운명 속에 존재하는 업의 고리를 제대로 끊어내지 않고는 나는 그대로 운명에 귀속된 노예같은 존재일 뿐이다. 부처가 원한 것은 그 고리를 완전히 끊어내는 것이었다.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는 과거의 모든 인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과연 그가 그토록 원하던 진정한 적멸열반의 경지란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그 해답이 바로 여덟 번 째 차원, 천부경의 팔에 있다. 부처로 상징되는 그런 사람들, 인과율을 보고, 그 업을 끊으려는 각고의 노력을 한 사람들, 그 과정에서 나름 그 고리를 끊었다고 확신한 사람들이 새로이 만들어낸 새로운 차원이 바로 이 연심생시공간의 우주에 새로이 열린 것이다. 이 자유로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그런 운명으로부터 얻는 자유로움을 단 한 글자로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우리 선조들은 風이라 했다.
난랑비서란 제목으로 삼국사기에 전해진다는 그 말, 최치원이 옮긴 國有 玄妙之道 曰風流를 생각해 본다. 우리에게 현묘한 도가 있는데 그 도를 풍류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이다. 그 현묘한 도에 큰 기대를 하고 읽어내려 가다 이내 풀죽은 표정으로 바뀌게 되는 말, 풍류. 그리하여 이 풍류란 말은 더 이상 사람들의 입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우리의 현묘한 도가 고작 풍류라니... 자존심 구겼다.
그러한가? 진정 그러한지 천부경 여덟의 뜻을 생각하며 다시 읽어보시라. 우리는 이미 일곱 차원 인연의 차원을 이해하면서 우리에게, 각 자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혹세무민 혹은 비과학적이라고 간단히 무시해버리는 그 미신 같은 존재, 운명을 인정한 이상, 그 운명의 고리를 완전히 끊어내는 것이 이제까지의 연심생시공간 우주에 새로운 차원이 열릴 만큼의 획기적인 사건이라는 것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조차 심오한 경지인데, 바로 우리 삶 속에서 회자되고 함께 했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 선조들이 살아가며 추구한 그 도가 바로 그 풍류임에랴. 인연의 고리를 끊어내야 얻게 되는 운명으로부터의 자유로움, 바람처럼 흐르는 마음, 그리하여 바람처럼 거침없이 자유로운 영혼이 풍류가 의미하는 진정한 뜻일진대 더 이상 무슨 사족이 필요할 것인가?
이제 우리 우주는 새로운 차원, 風緣心生時空間 풍연심생시공간 속에 존재하게 되었다. 이 여덟 번째 차원의 깊이는 참으로 신묘한 것이다. 앞서 이 현묘한 도, 풍류가 우주 존재의 원리와 삶의 궁극적 의미를 설파하면서도 수천 년간 비밀스런 것일 수밖에 없게 된 아이러니를 언급했음을 기억할 것이다. 이제 그 아이러니의 정체와 함께 수천 년 만에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이 여덟 차원에 깃들여진 새로운 비밀 원리를 파헤쳐 보자.
여덟 차원이 생성되는 원리는 역시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새로운 있음이 시작되면 된다. 천부경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는 이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여기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연심생시공간의 모든 것을 그 속성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차원의 새로운 있음이 쌓이고 쌓여 그것이 전체로서 하나의 통일된 체계를 형성하는 순간 우리 우주는 더 높은 차원으로 스스로 진화하는 것이다. 일곱 차원의 모든 것을 속성으로 하면서 그것과 다른 있음은 과연 무엇일까?
그 해답은 실로 간단하다. 그것은 마음이 추구하는 자유의지이자 그것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다.
인연의 차원이 모든 우주 존재의 숙명적 법리로 작용하게 된 이후, 그야말로 모든 것은 이 인연이 결정하게 되었다. 사람은 각자의 운명을 지고 태어나고, 그 운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 된 것이다. 누구 무엇을 하던 그것은 바로 그의 운명이 시킨 것이었고, 그 행위의 결과 역시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운명대로 결정되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물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이 인연의 법칙이 온전히 이 우주 최고의 법리로서 완성이 되어가는 순간, 그것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있음을 생성시키게 된다.
이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옛이야기 하나 살펴보자. 삼천갑자 동방삭이 젊은 시절 삼 년 고개에서 넘어지고 만다. 그 고개에서 넘어지는 자는 삼년 밖에 살지 못한다. 이것이 일곱 차원의 법리라고 하자. 그런데 그 법리가 적용되는 순간에도 동방삭은 십팔 년을 살았다. 매일 밥 먹고 그 고개로 올라간 동방삭은 그 고개에서 넘어지기를 계속한다. 결국 그는 영원히 살 수 있는 티켓을 얻었다. 삼년 밖에 못 산다는 법리가 훼손된 것이 아니었으나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삼 년의 삶을 살 수 있음을 믿었고, 결국 이야기 속의 그의 삼천갑자를 살았다.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이 옛이야기 속에 여덟 차원으로 건너가는 비밀이 숨어 있었다. 우주 존재와 그 진화를 논하는 천부경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이야기 속에는 새로운 있음이 있다. 물론 기존의 모든 것을 그 속성으로 하면서도 그 차원이 다른 새로운 있음이 말이다.
그것은 동방삭의 믿음이다. 밥 먹고 새로 넘어졌으니 이제 삼 년은 더 살 수 있으리라는 그의 믿음이 그를 십팔만 년이나 살게 만든 것이다. 기존의 인연의 법칙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그 굴레적 고리를 끊어내는 새로운 있음이란, 그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인 것이다.
불교에서의 해탈이 바로 이 여덟 차원에 들어가는 것과 흡사하다면, 기독교에선 구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살펴본다.
구원, 즉 영혼이 여덟 차원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 사도 요한은 말한다. 주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성경은 어떻게 일곱 차원 인연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지 그 비결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사도 요한은 주 예수에 대한 믿음만을 강조했지만, 보다 더 확실하게 마가복음은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보는 바대로 그것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말이다. 그것이 이제껏 벗어날 수 없다고 믿었던 나의 운명일지라도, 그 운명을 이제는 벗어나겠다고 기도하고 그 벗어남을 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하고 구하는 바대로 운명의 굴레를 벗어났다고 믿으면 더 이상 인연은 나를 옥죄는 운명의 굴레가 아닌 것이다. 왜? 내가 그렇게 믿으니까.
내가 내 운명의 고리를 끊었다고 확실히 믿으면 그 운명이라는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될 수 있을까? 가능하다. 본문이 주장하고 있던 것처럼 이 믿음이라는 새로운 있음이 진정 여덟 차원의 새로운 있음이라면, 이 차원의 가장 작은 한 조각이라도 그 아래 하위 차원의 모든 것을 상대하고 극복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렸다. 피를 흘리며 천천히 죽어가는 그 모든 순간, 그는 단 한 순간의 짧은 시간에도 자기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을까?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굳센 믿음으로, 자기의 가장 소중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기쁘게 흘리겠다는 숭고한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려 있었음을 믿는다. 그의 마지막 말, 이제 다 이루었다는 그 말 속에 그의 진정한 자유 의지와 그에 대한 믿음이 있었음을 능히 헤아릴 수 있나니.
한 순간 옥상에서 뛰어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몸을 던졌다고 해보자. 추락하는 나는 어떨까? 아마도 사차원의 시간으로는 불과 몇 초에 불과한 그 시간이 내게는 영원 같은 것이었으리라. 모든 내 과거 삶의 각 부분이 내 영혼을 스치듯 지나가며, 그 기억의 편린들이 지나는 순간 순간 내 영혼은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그 매순간 방금 전 내 선택을 뼈가 저리게 후회하며,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려 다시 옥상 위에 서 있고 싶어 할 것이다. 아마도아마도 그럴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추락하는 그 매 순간, 진정으로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것이라는 희열을 느끼며 추호도 내가 한 선택에 단 한 숨의 후회도 없다면, 나는 내 운명을 스스로 벗어낸 것이리라.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사실 여섯 차원에도 이 믿음이라는 것은 있는 것이다. 그 수많은 개념들 속에 믿음이라는 것도 엄연히 한 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여섯 차원의 그 믿음과 여기서 말하는 여덟 차원의 믿음은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일곱 차원의 통제를 받는 믿음과 일곱 차원을 넘어서는 계기로서의 믿음으로 말이다. 같은 단어요, 같은 뜻으로 쓰지만 차원이 다르다. 이 묘한 이치를 깨닫는 순간 다음 차원, 아홉 차원으로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
이제껏 왜곡되어져 왔다고 생각되는 진리 한 부분을 말하고자 한다. 인간의 영혼은 영원불멸이라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 육체는 비록 죽으나 그 영혼은 그 육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하다는 것. 우리 마음이 어느 정도는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진리이다. 그러나 이 진리가 의미하는 보다 심오한 경지가 있다.
그것은 영혼에 대한 위 진술은 글자 그대로 당연히 참이지만, 항상 무조건, 모든 경우에 참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부경에 말하는 우주 차원의 원리를 고려한다면 영혼의 영원불변성을 거론할 때 당연히 차원을 참고해야만 하는 것이다. 즉 모든 인간의 영혼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여덟 차원 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한 영혼만이 영원한 것이다.
다섯 차원에서 인간으로 몸을 갖고, 여섯 차원에서 영혼을 가지게 된 나는 일곱 차원의 주관하에 살다 죽었다. 내 몸을 이루는 분자 하나 하나는 완전히 분해되어 이제는 원소 차원에서 존재할 뿐이다. 여섯 차원에 머물던 내 영혼은 어찌 될까? 내 영혼도 내 몸이 분해되는 그 순간에 같이 분해되어 여섯 차원 이하의 모든 존재를 구성하는 또 다른 있음의 일부분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천부경이 바라 본 영혼에 대한 진리이다. 여섯 차원 안에서 일곱 차원의 통제를 받기만 한 영혼에게 주어지는 영원성이란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믿는 영혼의 영원불멸성의 그 진짜 내용은 바로, 일곱 차원을 넘어서 여덟 차원에 들어간 영혼만이 영원불멸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영혼이 영원불멸하다는 우리의 믿음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모든 영혼이 그러하다는 믿음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그럼 생칠팔구의 마지막 글자 구가 의미하는 아홉째 차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여덣 차원에 들어선 영혼이 그 육체가 죽으면 들어가게 되는 차원이다. 이른바 진정한 영의 차원이다. 더 이상 영혼이 아니라 혼백이 아니라 순수한 영, 그 자체로서 아홉 째 차원에 있음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 우주는 靈風緣心生時空間 영심시공간이 되었다.
이제 앞에서 언급한 천부경 그 참된 진리의 왜곡 아이러니의 한 부분을 설명할 때가 되었다.
만약, 내가 스파르타쿠스였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노예였고, 온갖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나는 이 세상이 싫다. 나를 짓밟은 모든 놈들에게 피의 복수를 하고 싶다. 내 삶은 오로지 그것만을 갈구한다. 오, 악마가 있다면 내 영혼을 사라. 내 영혼을 가지고 내게 힘을 다오.
매일 밤 이렇게 기도하던 어느 날, 악마의 목소리 같은 것을 듣는다. 나도 모르는 엄청난 힘이 내 몸 속에서 꿈틀되는 것을 느끼고, 그 순간부터 나는 내 기도가 받아들여졌음을 온전히 믿게 된다. 나는 세상에 대해 복수하기 시작한다. 나는 나를 노예로 사람들과 관련된 모든 사람을 찌르고 자르고 베어 죽인다. ......
내가 복수의 화신 스파르타구스라면 나도 여덟 차원에 들어간 것일까? 내 영혼은 내 육체가 죽는 순간 아홉 차원에 옮아갈 수 있을 것인가?
천부경이 전하는 있음의 사상과 그 원리로 비추어 보아 가능하다. 내 운명을 내 스스로 선택한 길로 바꾸어버렸다. 그 과정에 온전한 자유 의지와 믿음이 있었다. 나는 내 운명을 개척한 영혼인 것이다. 내 영혼이 가야 할 길을 내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다. 당연히 나는 아홉 차원의 세계에서 새로운 있음으로서 순수한 영으로 존재할 것이다.
이것은 똑똑하고 착한 사람들에게 아주 불편한 진실이다. 아홉 차원은 우리가 상상하던 극락 혹은 천국 같은 곳이어야만 한다. 사방이 풍요롭고 향기로운 곳, 아름다운 선율과 밝음, 사랑이 충만한 그런 곳이어야만 하는 극락, 천국에 피로 물든 복수의 화신이 함께 있다니...
안 될 말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 일을 도대체 어찌한단 말인가?
이제껏 해설을 통해 보았듯, 천부경에는 다른 모든 사상과 철학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가르치는 한 가지가 없다. 바로 권선징악적 사고이다. 천부경을 제외한 다른 사상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선과 악, 이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바탕 위에서 과정과 결과를 통해 그 사상이 설파하는 것은 결국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라는 가르침이다. 약간의 포장과 왜곡이 덧붙여지지만 결국은 선을 행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악을 행하는 것은 그른 일이며 따라서 궁극적인 목적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선만을 취해야 한다는 요지이다. 모두가 그러하다.
그러나 천부경에는 단 한 구절도 선악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나 판단이 없다. 아니 사실 있기는 한데, 진정 그 뜻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워 오해하기 쉽다. 이것이 바로 천부경의 진리가 참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수 천 년 동안 왜곡되어지고 거부당하게 된 중요한 이유이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앞서 설명한 여덟 차원에 대해서조차 선악의 구분을 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논리상 정당하다. 여덟 차원이 열리는 것은 일곱 차원을 극복, 초월한 있음이 생겨났기 때문이며 그것에 선악의 구별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즉, 일곱의 원리, 그 운명이라는 인연의 굴레를 벗어나는 가능성으로 시작된 믿음은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었다.
그 믿음이 주 예수에 대한 것이든, 마호메트에 대한 것이든, 부처 싯달타 고타마에 대한 것이든 말이다. 더 적나라하게 말해서 뒷 산골짝 처녀 보살에 대한 믿음이든 말이다. 그것을 통해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것은 그 새로운 있음이 가지는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인 가치 때문이다. 어떤 매개체를 통해 믿든, 운명의 고리를 벗어나고 싶고,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면 천부경의 원리, 있음과 긍정의 원리로 인해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초기 천부경을 알고 있던 몇 몇 사람들은 앞에서 예를 든 스파르타쿠스와 비슷한 경우를 생각해 냈다. 그러자 이 가르침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른 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까 하는 걱정, 기우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도 몇 배 더 큰 걱정이었을 수도 있다. 천국에 악마가 같이 있을 수 있다면 말이다.
만약,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이 여덟 차원에 악한 영혼이 접근해서 들어가는 것에 성공할 경우, 그 악영향에 대해 걱정이 앞선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일 것이다. 이들이 진정 천부경의 참뜻, 본심본태양의 뜻을 충분히 깨닫고 있었다면, 전혀 불필요한 것이었겠지만.
이들은 천국을 천국으로 지켜내기 위해 급기야 본말을 전도해서 왜곡하는 한이 있더라도 천부경의 진리가 널리 퍼지는 것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그 참 진리를 가리고, 허튼 소리를 진리로 호도하면서라도 그것만은 막아야겠다는 새로운 믿음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 믿음이 또 다른 새로운 있음으로 되어 그 믿음을 가진 영혼이 여덟 차원에 들어가게 된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다. 천부경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다. 그 어떤 믿음이라도 온전한 자유 의지에 의한 온전한 믿음일 경우 여덟 차원으로 인도하는 나침반이 될 수 있는 것이 우주의 원리 중 가장 중요한 원리로 자리하는 여덟 차원이 이미 열려 있기 때문에.
그러나 이것은 생각할수록 아이러니한 결과가 되고 만다.
그런 이치가 바로 천부경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이로 인해 천부경의 참된 긍정의 원리는 심하게 변질되고 만다. 다시 말하자면 천부경은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는다. 선악 모두들 한 자리에서 선은 선대로, 악은 악대로 있는 그대로 긍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선이라 해서 긍정하고 악이라 해서 부정해야 할 대상이 아닌 것이 원래 천부경의 참뜻이었다. 이런 온전한 긍정을 그들은 선악을 기준으로 왜곡된 긍정과 부정으로 바꾼 것이다. 즉 선만을 긍정하고, 악은 절대 부정해야만 한다는 당위를 끼워 넣어버린 것이다.
생각해보라. 선을 선으로 긍정하고 악을 악으로 긍정한다는 것은 선은 그대로 좋고 악은 좋지 않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일이었다. 즉 악을 긍정한다는 것을 악을 부정하는 것이 바로 그 악에 대한 참된 긍정이라 믿으면 될 뿐이었다. 그런데 걱정이 앞선 일부가 이것을 선은 오로지 긍정의 대상으로, 악을 온전한 부정의 대상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있음이 시작되고 나서 없음이 시작되었다는 천부경 첫 구절에 대한 것부터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있음이 시작된 이후 없음은 필연적으로 있음과 같이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는 있음은 긍정하고 없음을 부정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있음만 존재하고 없음 그 자체를 없애버려야만 직성이 풀리겠다는 듯 그들은 모든 없음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있음과 함께 시작된 없음을 없애버리려는 모든 노력은 오히려 그 없음이 생겨난 근본 원인이 된 있음마저도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빛이 있는 곳에, 그 빛이 다다른 끝자락에 비로소 어둠이 존재하는 것이다. 어둠을 없애려면 그 빛을 더 환하게 밝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천부경이 갈파한 우주의 참 긍정의 이치인데, 일부는 빛을 키울 생각보다는 어둠을 없애려는 방향으로 접근한 것이다. 어둠을 없애려면 이에 대한 인식이 앞서야 하고, 그 인식을 위해서는 그 어둠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연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 이런 생각의 연장과 확장이 우주적 긍정의 원리로 인해 어둠 그 자체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우주는 그들의 원래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가려지고 왜곡된 진실로 인해 우주는 더욱 혼란스러워졌으며, 그들이 당초 유일한 목적으로 삼았던 선, 그 참된 빛조차 어둠에 가려지는 부조리가 판치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천부경은 말한다. 本心 本太陽 본심본태양이라고, 여섯 차원에 생성된 마음 그 자체는 태양과 같이 크고 스스로 환한 것이라고. 그러니 여기에 어둠으로 상징되는 악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애당초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그저 크고 밝고 환한 그 태양 같은 마음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던 것을 그들은 애써 가리고 왜곡하고 변질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덟 차원에 악한 영혼이 들어가는 것을 막아보겠다는 그들의 조급한 의도는 완벽한 실패가 되었다. 앞서 예를 든 그 사람에 대한 그 선량한 믿음이 실제로 이천 년 동안 우리 세상에 가져온 그 처절하고 안타까운 결과가 그 증거이다. 우주 그 자체로 상징되는 자기의 온 생명을 온전히 그리고 기꺼이 남을 위해 희생하면서 그가 이룩하고 했던 그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 겉모습만 사랑이요 그 내면은 악마적 성질로 가득 차게 되었던 것이다.
그 사람이 외치던 사랑이 그 처절한 성지 탈환 전쟁이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사람이 원하던 사랑이 가득한 세상이 너는 노예요 나는 주인이므로 너의 모든 자유를 빼앗고 짓밟아도 된다는 독선이었을 리가 없지 않는가 말이다.
하여간 가려지고 왜곡된 천부경의 진리는 비록 그 내용이 변질되었을지라도 그 참된 긍정의 원리 그대로 우리 우주에 가득 찬 그런 있음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야 말로 천부경 진리 왜곡의 아이러니이다. 모든 잘못된 믿음이 판치는 세상. 그 믿음이 비록 악할지라도 그 믿음이 온전한 자유 의지의 결과일 경우 새로운 있음으로서 여덟 차원으로 입성하게 되는.
만약 천부경의 진리가 순탄히 세상의 도리로 자리 잡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여덟 차원에 들어선 그 영혼들의 온전한 밝음으로 인해 그 아래 차원의 모든 것이 온전한 밝음이 되었으리라. 그야말로 세상은 서로를 위하고 배려하고 도와주는 사랑이 넘치는 그런 세상, 지상 천국이 되었을 터이다.
스파르타쿠스가 피의 복수를 할 그런 사연일랑 애당초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랑을 펼치려는 노력만 해야 하는 시점에서 악을 생각하고, 악을 저주하려는 일부의 잘못된 행동이 온갖 부정과 부조리가 판치는 세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쯤에서 풍류에 대한 이야기 한 자락을 덧붙이고자 한다. 앞서 풍류는 천부경의 참뜻을 새기고 있는 우리 선조들이 궁극적 목적으로 추구하는 도임을 밝혔다. 그것이 왜곡된 지금의 세상이 되는 과정을 이해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符都誌 부도지에 보면 五味의 變과 五行의 禍에 대한 구절이 나온다. 이 두 가지 큰 사건으로 인해 천부경의 참뜻이 가려지고 왜곡되어지게 된 것이다. 그로인해 풍류가 현묘한 도라는 것이 비밀이 되어 간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오미란 쓴 맛, 신 맛, 단 맛, 매운 맛, 짠 맛 등 우리가 느끼는 다섯 가지 맛을 말한다. 이 다섯 가지 맛이 초기 우주의 타락 과정에 가장 큰 사건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부도지에서 밝히는 초기 세상에서 인간이 먹는 유일한 것은 마고성 안에 흐르는 생명수 지유뿐이었다. 그것만 마시고도 사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인간이 늘어나게 되자 그 생명수인 지유를 마시려면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어느 날 지소씨가 노약자와 임산부에게 그 순서를 양보한 후 지유를 마시지 못한다. 집에 돌아온 지소는 집 근처 난간에 열린 포도 열매를 보고 그것을 따 먹게 되고. 이 일로 지소의 몸속에는 다섯 가지 맛 즉 오미의 변화가 일어난다. 맛이란 것을 처음 느낀 사람들은 그 맛을 즐기려 너도나도 포도를 먹게 되는데, 이 사건이 바로 오미의 변이다.
부도지는 설명한다. 다섯 가지 맛을 느끼기 위해 포도, 즉 다른 생명을 취하는 것이 옳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금지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제까지 사람들 스스로 알아서 하늘의 뜻에 맞춰 살아가던 자재율이 파괴되는 최초의 사건이다. 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야 말로 선악에 대한 불필요한 판단의 결과였던 것이다.
생명을 취하였다 한들, 그 자체가 악이 되고 그 자체가 곧바로 엄격한 부정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모든 생명은 또 다른 생명을 취함으로써만 생존이 가능하니 이 말이 옳다 할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생명을 취함이 옳지 않다고 믿는 그 믿음에 있었다. 즉 앞서 언급한 부분, 있는 그대로 긍정할 것을 긍정하면 될 일을 선과 악을 구분하고 악을 추방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바로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여덟 차원에 악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바로 그 믿음이 바로 이것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그것을 금지하게 되면서 하늘의 뜻에 맞춰 살아가던 사람들의 자재율이 깨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천부경 왜곡의 시작이라면 오행의 화는 그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오행이란 金木水火土의 다섯 가지 성질을 말한다. 부도지 십칠장 이후에 나오는 이 오행의 화를 간단히 말하자면,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 부도를 반역하여 이에 대립한 당도가 세워졌는데 이 당도의 기본 사상이 되는 것이 바로 오행의 원리이다. 부도에서는 水火氣土 이 넷이 기본 원리였다. 요,순,우로 대표되는 도당의 무리가 이 원리를 배척하고 오행의 원리를 세운 것이다.
즉 기존에 있던 4행 중 기를 없애면서 이를 금목으로 대체하고, 또한 토를 중앙에 세워 모든 것의 중심으로 만든 것이 바로 오행의 원리이다. 부도지는 단언한다. 이 오행의 원리는 바로 오행의 화이다. 오행이 만들어진 것 자체가 인간 세상 모든 화의 근원이라는 선언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모든 천지만물은 각자 고유한 특성과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 중 기본이 되는 것이 수화기토 이 넷이다. 서로 연관되어 합화되고 분리되며 만물 존재의 기본 원리가 되지만 이는 그야말로 자연스런 흐름으로 그 어느 것도 다른 것을 배척하거나 통제하지 않는다. 즉 서로 독립적이면서 자주적인 원리를 가지는 것이 원래 우리 조상의 사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 순, 우 이 반역의 도당들이 이 중 현묘지도, 풍류로 대표되는 이 기를 아예 없애버렸다. 그 자리에 금과 인을 나누어 넣고, 한 가운데 중앙 토를 세워 모든 것이 중앙인 토를 통해서만 서로 순환 상생, 상극할 수 있는 지배와 통제의 원리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즉 요, 순, 우가 스스로 사람의 중앙, 사람의 지배자가 되어 자기를 통해서만 세상이 통치, 통제되는 독선적인 거짓 원리를 강요한 것이다.
이전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던 천부경의 풍류의 도가 충만한 부도의 그 순진하고 아름다웠던 세상이 누구는 지배하고 착취하고, 누구는 지배당하고 착취당하는 그런 패악한 구조로 전환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도지가 말하는 오행의 화이다. 소수의 지배자 외에는 모두가 억압받고 홀대받고 착취당하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반역의 도당들이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하여 중앙이라는 천리에 위배되는 억지 이론을 만들어 놓고 지금까지 세세토록 그 지배와 피지배 구도를 유지하면서, 착취와 수탈을 일삼고 있으니 참을 수 없는 부조리가 이제까지도 이 세상에 만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된 진리인 천부경이 세상의 비밀이 되어가는 과정을 두 가지 사건을 통해 알아보았다. 오미의 변은 있음의 도요 긍정의 이치인 천부경의 참 뜻을 오해한 이론가들이 선악에 대한 천부경의 가르침에 반기를 들고, 모든 것을 선악을 기준으로 재해석한 후 선을 취하여야 하는 가치로, 악을 무조건 배척해야 하는 역리로 몰아간 것을 의미한다.
사실 현존하는 거의 모든 사상과 종교 철학에서 그런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 스스로는 권선징악적 가르침이야 말로 진정 가치 있고, 따라야 하는 것이라 굳게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그 믿음과는 아무 상관없이 세상은 악이 더욱 창궐하게 되었다.
오미의 변이 이론가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면, 오행의 화는 권력자들에 의해 행해진 것이다. 세상을 지배하고자 했던 소수가 자기들의 지배를 당연시하고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인간 사회를 자기들을 중심으로 하는 통제 지배 시스템으로 만들었고, 그 시스템의 최상부에 군림하면서 누려서는 안 되는 권력을 휘둘렀다.
이 권력에 너무나 찌들어서일까? 사람들은 여전히 음양 오행이 동양 사상의 모든 것인 양 생각한다. 세상에서의 자기만의 물질적 이익을 위한 경우라면 음양 오행을 잘 살피는 것이 좋다. 오랜 시간 세상을 움직이고 설명하는 이치로 자리잡은 만큼, 또한 그럴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만큼 자기만의 물질적 이익을 갈구한다면 음양 오행으로 세상을 바라 볼 일이다.
그러나 홍익인간의 말을 들을 때 왠지 가슴 한 켠이 뜨거워지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내용을 바로 알아야 한다. 사상이 권력의 도구로 전락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행의 원리요, 상생과 상극의 이치로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들만의 이익이라는 것을.
천부경 구절 중 萬往萬來 用變 不動本 만왕만래 용변 부동본 이 구절은 만큼은 거의 모든 해설에 이견이 없다.
모든 삼라만상이 오고 가면서 그 쓰임은 변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부경의 원 의미를 무엇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 부분 역시 확연히 다른 내용으로 정리가 된다.
본문대로라면 삼라만상이 오고 가더라도 천부경이 말하는 있음의 원리와 긍정의 도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면 마지막 숫자 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삼라만상이 오고 간다는 문구에서 힌트를 얻어보자. 우주의 존재 그 근본을 논하는 차원의 천부경에 나오는 이 만왕만래가 이제껏 논의했던 3차원의 물질만을 의미할 리가 없다.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는 이미 아홉 차원을 이해했고, 마지막 열 차원을 생각해 보고 있는 중이다.
우리말 열은 열매의 뜻이라고 볼 수 있고, 열다의 열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열로 이해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열매이면서 열어내는 것. 우주의 열차원은 바로 현존하는 우주의 마지막 차원이면서, 새로운 우주 창조의 처음 차원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 흘러 드디어 우주의 아홉 차원에 순수한 영들이 가득 차는 그런 시점이 도래한다. 결과적으로 선한 영들도 있고, 악한 영들도 있다. 양쪽이 비슷하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선과 악 양쪽이 자기들의 특성대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선한 영들은 선한 영들끼리 모여 서로 배려하고, 서로 사랑하며 행복을 줌으로서 행복을 나누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일 테고, 악한 영들은 악한 영들끼리 모여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며 남의 행복을 뺏음으로서 행복을 느끼는 그런 추악한 모습으로 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과 지옥은 원래 구분되어 생각되어졌다. 그러나 천부경 원리라면 구분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한 경우가 된다. 이른 바 천국과 지옥이 같은 차원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라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느 순간,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 간에 다툼이 벌어진다. 이 다툼은 동료를 사랑하는 착한 선한 영들로 하여금 동료인 착한 영을 돕게 만들고, 천성적으로 다툼을 즐기는 악한 영들로 하여금 더욱 강하게 다툼에 참여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아홉 차원에 있던 모든 선한 영들과 모든 악한 영들이 자기들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시키는 어느 한 순간이 도래하게 된다.
그 한 순간 한 곳에 집중된 그 에너지는 대폭발을 일으킨다. 현존하는 우리 우주가 종말을 맞이하고, 그 에너지가 집중된 바로 그 한 점에서 새로운 우주가 탄생한다. 이것이 빅뱅이며, 이것이 우리 우주의 열 차원이며 새 우주가 열리는 원리이다.
아인쉬타인보다 훨씬 위대하다는 살아있는 천재 에드워드 위튼이 우주는 십차원이라는 가설을 십일차원이라고 수정한 것을 알고 있는가? 위튼의 설명이 충분치 않다면 이 말을 들어 보라. 우주는 열 차원이고, 그것은 곧 새로운 우주의 처음 차원임으로 동시에 십일차원인 것이다.
자 이제 용변 부동변이라는 문구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우리 우주는 그 쓰임이 다했기에 가는 만가지 중 하나가 되었고, 그리하여 만 가지 우주 중 새로운 우주 하나가 또 탄생하는데, 이렇게 만왕만래하여 쓰여짐이 다른 우주가 생겨나고 없어지더라도 우주가 생성되고 소멸되는 이 근본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보이는가?
빅뱅에 대한 이 원리가 말로는 재미있지만 과연 우주를 소멸시키고 탄생시킬 만큼의 에너지를 영들이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의아해할 것이다. 하여 쓸 데 없는 한가지 설명을 덧붙인다.
여덟과 아홉 차원은 엄청난 에너지가 모여 있는 곳이다. 무슨 에너지? 그야말로 여덟 차원의 에너지와 아홉 차원의 에너지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새로운 우주를 탄생시키는 빅뱅을 야기할 만한 에너지는 아닐 것이라 생각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물음을 던짐으로서 그 해답을 구하고자 한다.
우주의 삼차원의 그 모든 것을 준다면 사차원의 시간 그 한 조각을 살 수 있을까?
삼차원에 존재하는 그 모든 물질과 공간을 모두 허비하여 그 어떤 작업을 하면 그 삼차원만으로 사차원의 짧은 시간 한 조각을 만들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다. 불가능하다. 이 말이 이해가 어렵다면 다음의 예를 주의 깊게 살펴보시라.
다섯 차원의 있음, 즉 생명 중에서, 그 많고 많은 현존하는 생명 중에서 그 어떤 단 하나의 생명이 죽는 순간 삼차원의 모든 물질과 공간과 그리고 사차원의 태초부터 영원까지의 그 모든 시간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그야말로 내가 죽는다면, 내가 죽는 그 순간 내가 관계한 지금의 이 우주 그 자체는 통째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오차원의 그 작은 한 조각에 불과한 내가 없어짐으로 인해 그 하위 차원의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물어보자. 삼차원과 사차원의 모든 것을 준다면, 과연 오차원의 죽은 생명 하나를 산 생명으로 바꿀 수 있을까?
여섯 차원 이상은 설명한 대로 마음인 여섯 차원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부여하는 그 의미가 바로 그 차원의 에너지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섯 차원의 그 모든 생명보다도 여섯 차원의 마음 한 조각이 더 큰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면 일곱과 여덟, 그리고 아홉 차원이 지니는 에너지는 어떠할지 상상이 되는가?
차원이 다른 것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런 엉터리 같은 비교를 해야만 한다. 그래서 얻은 작은 직관의 한 조각이라도 손에 쥐고 있어야 진정 위대한 진리를 찾아낼 수 있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여덟 차원은 이처럼 상위 차원이 가지는 고에너지 외에 특수한 성질의 에너지가 더해져 있다.
그것은 일곱 차원의 인연의 고리가 끊어지는 순간 방출되는 에너지이다. 어느 정도의 크기이기에 엄청난 이란 표현을 써야만 할까? 이렇게 생각해 보라. 우라늄 수 그램이 원자폭탄의 재료가 되어 핵폭발이 일어난다. 그 때 발생하는 에너지의 그 엄청남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운명, 인연의 고리가 끊어지는 그 순간에 발생하는 에너지는 아마도 우리 우주 전체삼차원의 물질이 우라늄일 경우, 그 전부가 한 순간 핵폭발을 할 때 방출하는 전체 에너지보다도 더 클 것이다.
우라늄 원자가 핵폭발을 하면서 우라늄이라는 삼차원의 물질적 인연의 고리가 끊어지고, 그 인연의 고리 안에 각 입자를 묶어두기 위해 보유하고 있던 에너지가 방출되는 것이다.
일곱 차원 인연의 고리가 끊어지는 그 순간에도, 그 원리는 마찬가지이다. 앞서 상위 차원이 가지는 에너지와 하위 차원이 가지는 에너지에 대해 그 의미를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이 일곱 차원 인연의 고리가 누군가에 의해 단 한 번 끊어지는 그 순간만으로 한정한다 하더라도 이런 엉터리 같은 주장을 맘 놓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에너지는 삼차원 우주의 모든 것이 우라늄이고 그 모든 것이 한 순간 핵폭발을 일으킬 때 발생하는 에너지보다 클 것이라는...
빅뱅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에서 그치고 이 여덟 차원,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향유하는 에너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 차원의 에너지를 맛 본 한 사람 이야기이다.
한 사람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 채 태어나 자라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이후 이천 년은 온 우주가 그를 신으로 받드는 과정에 불과했다. 그와 관계된 특정한 도시가 성지가 되었고, 그 도시를 이교도로부터 되찾기 위해 온 유럽과 아시아가 수 백 년 간 처절한 전쟁을 해야만 했다. 이후에는 이교도가 아닌 사람들 간에 그 사람에 대한 찬양의 방도를 놓고 또 수 백 년 간 전쟁을 했다.
한 때는 그 사람을 신으로 믿는 사람들이 그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지구 전역에 군대를 파견했으며, 그 전후로 검은 사람들을 수없이 납치해서 그 아들의 아들의 아들까지도 노예로 삼았다. 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경망스런 언행을 했다는 이유로 하루 아침에 마녀가 되고 마녀는 곧바로 화형에 처해졌다. 심지어 그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게도 만들었다.
살아있을 때 그는 많은 병자를 아무런 행위도 없이 치료했고, 떡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마리로도 오천 명을 배불리 먹였다. 그가 시킨 대로 항아리만 바꾸어도 물이 포도주가 되었을 뿐 아니라, 죽은 사람도 살려 내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죽은 후 다시 살아났다. 그런 사실을 적어도 오늘을 사는 이십 억 명이 믿는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또한 믿는다. 그 사람이 다시 살아나 하늘 위로 올라가서 천국이라는 곳에서 창조주 오른 편에 자리 잡고 앉아서 자기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죽으면 그 영혼을 맞이해 영원한 새 삶을 준다고.
지난 이천 년간 이 우주에서 벌어진 이 엄청난 사건들은 그 여덟 차원 에너지 때문이다. 아니 단 한 사람이 여덟 차원 에너지의 한 조각을 맛본 결과이다. 실로 엄청난 에너지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진정 대단하지 아니한가?
또 다른 사람 역시 칼 한 자루와 책 한 권을 앞세워 자기의 사상을 전파하는 전쟁을 했다. 전쟁에서 이기면 강제로 자기의 사상을 강요했다. 이 사람을 추앙하는 사람들은 앞선 그 사람과의 전쟁에서 결국 승리했다. 이 사람을 신으로 받드는 사람 중 오늘을 사는 사람이 십오억 명에 달한다.
이 사람도 모든 인간의 사후 세계까지 주관한다. 천국과 지옥을 결정한다. 영원한 행복과 또한 영원한 고통을 줄 권세가 있다. 대단하지 아니한가? 이런 엄청난 사건이 실재하는 우리의 역사인 것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이제는 안다. 우주의 여덟 차원에 가득 찬 그 에너지를 단 한 조각이라도 향유하면 누구나 가능한 일인 것이다.
다음 구절인 本心 本太陽 본심 본태양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을 한 바 있다. 대삼이 합하여 만들어진 여섯 차원에서 생성된 마음은 그 본성이 태양에 뿌리를 두고 있다로 해석해도 좋고, 태양과 같은 것이다 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어떻게 해석을 하든, 이 부분은 상당한 주의를 요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천부경이 전하는 참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면 선악에 대한 가치 판단이 별도로 필요없다는 경고가 들어있음 또한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원래 마음은 태양과 같이 크고 밝기 때문에 그 마음의 어두운 면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없다. 사람 마음속에 자리잡은 듯 보이는 악에 대해 과민하게 반응해서는 안 된다. 악을 없애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 악은 더 커지게 되는 것이다. 이미 강조했듯이 빛이 비취면 어둠은 사라지고, 사랑을 하면 미움은 저절로 없어지는 것, 이것이 바른 가르침이다.
昻明 人中天地一 앙명 인중천지일
그러니 우러러 밝히 알라, 사람 속에 천지가 있음을. 이렇게 읽는다.
앙명의 명은 밝히라는 동사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우리 말로는 밝히 알라 정도가 무난하리라.
마지막 문구이다. 一終無終 一 일종무종 일
이 구절과 첫구절 일시무시일은 서로 댓구를 이루므로 댓구로 읽어야 한다. 즉 첫 구절 일시무시일을 읽은 것과 같은 방식, 같은 어순으로 읽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첫구절을 일시무시로 읽었다. 다섯 번 째 글자인 일은 뒤에 이어지는 일석삼극의 일로 주어로 읽었다.
우리가 첫구절을 읽은 방식 그대로 댓구로 읽으면 있음이 끝나니, 없음도 끝난다가 된다. 그러면 마지막 한 자 일은 어찌 읽어야 할까? 최치원이 그냥 천하의 명시인이겠는가? 최고 수준의 시인 대접을 해주면 된다.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읽는다.
一終無終 一 일종무종 시
있음이 끝나면 없음도 함께 끝나는구나, 아~ 아 있음이여!
이상에서 수 천 년 간 감춰져왔던 비밀스런 천부경의 참 뜻, 참 원리를 해설했다. 그동안 구구절절 수많은 해석이 있었으나 옳은 해설은 단 하나로 족하리라.
이제 천부경의 참 뜻을 펼치는 의도는 세상의 모든 어긋난 것을 바로 잡아 올바른 제 위치로 돌려놓기 위함이다. 더 이상 악을 악이라 부르면서 그것을 멸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빛이 밝으면 어둠은 스스로 없어지는 것이다. 일석삼극이면 무진본이다. 그저 사랑하자. 본심본태양이 의미하는 것처럼, 그 밝음을 비춰 나만의 이익만을 탐하지 말고 모두의 이익을 만들어 내자. 이것이 제세이화요, 홍익인간의 참 뜻이리라.
현묘한 우리의 도 풍류를 이해하자. 구구절절 설명은 많았지만 단 한 마디면 되는 일이었다.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 바람처럼 거침없이 자유로운 영혼이 되자. 이것이 삶의 목적이다. 그 어떤 운명을 지니고 이 세상에 나왔든 간에, 풍류를 아는 순간, 내 인생은 내 맘 대로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고 바라는 것을 즐기며 살자. 내 인생은 내가 설계하고, 시행하고 내가 감독하고, 내가 사는 것이다. 내 인생의 목적은 나 스스로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 어떤 것이든, 그 무엇이든 당신이 선택하는 그 의미를 당신 삶에 충만하게 부여할 수 있다면 당신은 과연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가? 홍익인간의 뜻을 새기면서,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을 추구하자. 진정으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우리 모두 함께 살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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