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1 23:04:01
판사들 승진 없어지자… 재판 ‘세월아 네월아~’
김은정 기자
입력 2021.05.21 03:00
““다음 재판은 내년 3월에….”
경기도 의정부에서 활동하는 이모 변호사는 작년 12월 재판에 참석했다가 재판장이 다음 기일을 3개월 뒤로 잡자 깜짝 놀랐다. 비교적 간단한 민사 사건이었고 재판도 거의 막바지 단계였다. 그 정도 사건은 매년 2월 법원 정기 인사 전에 현 재판부가 선고하고 떠나는 게 판사들 사이의 ‘불문율’이었다. 새 재판부가 와서 다시 사건 기록을 보고 재판을 시작하면 그만큼 재판 진행이 느려지기 때문이다. 이 변호사는 “망설이는 티도 없이 다음 재판부에 사건을 던지는 걸 보고 ‘법원이 많이 변했구나’ 싶었다”고 했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뉴시스
서울에서 주로 활동하는 김모 변호사도 “연말에 이듬해 3~4월로 다음 재판 날짜를 잡는 경우가 이제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사건 처리 기간 4년 전보다 40일 늘어
요즘 법조계에선 법원 재판이 지나치게 더디다는 비판이 많다. 이는 대법원 통계로도 확인된다. 전국적으로 1분기에 선고된 형사 합의부 1심 사건의 경우, 평균 처리 기간을 따져 보니 2017년 162.5일에서 올해는 215.3일로 52.8일 늘었다. 처리 기간이 32.4%나 늘었는데 그사이 사건 수는 10.5% 증가했을 뿐이다.
민사 합의부에서 맡은 1심 사건도 4년 전에 비해 처리 기간이 43.6일(15%)이나 늘었다. 사건 수는 4.8% 줄었는데 처리 기간은 오히려 15% 늘어난 것이다. 한 변호사는 “예전엔 민사 단독 재판부 사건은 소장을 법원에 넣고 나서 2개월쯤 뒤면 첫 재판을 받을 수 있었는데 요즘은 4~6개월 정도 걸린다”고 했다.
◇승진, 감독 없고 ‘워라밸’이 대세
재판·선고 날짜는 판사가 결정한다. 과거엔 월·주 단위 ‘적정 선고 건수’가 암묵적으로 존재했고, 법원장이나 그 밑의 수석부장판사가 이를 챙겼다. 그런데 2018년 ‘양승태 대법원’의 권한 남용 사건이 터진 이후 일선 재판부에 대한 ‘권고’ ‘감독’ 자체가 없어졌다. 한 법원장은 “개별 판사에게 사건 처리를 빨리 해달라고 얘기하는 순간 재판 개입, 직권남용이란 얘기가 나오니 요새는 아예 터치를 안 한다”고 했다.
또 김명수 대법원장이 2017년 취임하면서 고법부장 승진제 폐지 방침을 밝히고 올 2월부터 이를 시행하면서 법원엔 ‘승진’이 없어졌다. 법원장도 과거처럼 고법부장 중에서 올라가는 게 아니라, 각 법원의 판사들이 추천한 사람들 중에 임명하는 ‘법원장 추천제’가 확대되고 있다. 굳이 고법부장으로 있으면서 성과를 낼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한 30대 판사는 “이젠 승진도 없고 또 요직에 가려면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이어야 한다는 말까지 돈다”며 “굳이 몸 상해가며 일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했다.
여기에 ‘워라밸(일과 개인 삶의 균형)’ 분위기가 법원 내에서 급속히 퍼지는 상황도 맞물렸다. 한 지방법원에선 재판 중이던 배석판사 중 하나가 “오후 6시가 되면 칼퇴근 하겠다”고 해 다른 재판부의 배석 판사를 ‘대타'로 법정 앞에 대기시켰던 일도 있었다. 2019년 서울중앙지법에선 평판사들이 부장판사들에게 ‘한 달에 합의부 사건은 2~3건만 선고’ ‘배석판사가 쓴 판결문 수정은 한 번만 할 것’ ‘배석판사와의 합의(논의)는 일주일에 두 번만 할 것’이라는 요구 사항을 전달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한 부장판사는 “부임 초기 한 달에 5~6건씩 선고를 하려고 진도를 뺐더니 어느 순간 후배 판사들로부터 ‘벙커’(피해야 할 선배 판사)로 찍혔더라”며 “의욕적으로 하려는 판사는 모난 돌로 찍혀 정 맞는 분위기”라고 했다.
◇재판받는 사람들만 피해
작년 코로나 사태 이후엔 판사와 법원 직원들이 주 1회 재택근무를 하고 있어 재판이 더 지연되기도 한다. 재택근무 땐 재판부 판사들과 연락이 되지 않아 지난달 서울지방변호사회가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변호사들은 “재판받는 사람 입장에서 재판 기간이 길어진다는 건 ‘고통의 기간’이 그만큼 길어지는 것”이라며 “피해자는 결국 국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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