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서 8년간 옥살이… 내게 죄가 있다면 국군 포로를 존경한 것뿐"
[월간조선]
사업가였던 이재훈씨, 1990년대 말 정보기관 활동하다
국군 포로 일가족 호송 후 체포돼 '밀수'로 10년 형
수십여 년 만에 처음 꺼내는 이야기라고 했다. 가족과 친구들도 내막을 모른다고 했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때니 벌써 30년 가까이 된 일이다.
1990년대 말, 이재훈(63)씨는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했다. 수완이 좋아 사업지의 시장(市長)과도 친분을 쌓았다. 국내 정보기관 관계자 눈에 들었고, 에이전트(공작원)로 일하게 됐다. 기관의 요청으로 국군 포로 호송사업에도 참여했다.
그런데 믿었던 현지인 사업 파트너가 복병(伏兵)이었다. 어느 날 이씨를 ‘한국 특무(特務)’라고 신고했다. 간첩이라는 뜻이다. 이씨는 곧바로 중국 당국에 체포돼 8년간 옥살이를 했다. 지난 2월 1일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그의 사연을 들어봤다. 이씨는 “23년 전 바로 오늘이 국군 포로 일가족을 호송했던 날”이라면서 “그 일을 끝으로 내 40대는 중국 공산당 감옥에서 보내게 됐다”고 했다.

― 중국은 언제부터 오갔고, 어떤 사업을 했습니까?
“본격적으로 오간 건 1995년부터입니다. 무역·전시업을 했어요. 2002년 체포되던 당시에는 국내 모 일간지의 문화사업단 베이징 대표직을 맡았어요. 서울과 베이징을 오가며 전시·공연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 에이전트로 일하게 된 계기와 주요 업무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기관 관계자가 1990년대 중후반 협조를 요청해 왔습니다. 사업을 하며 국장, 시장, 세관장 등 네트워크를 탄탄히 쌓은 게 그의 눈에 들었던 거죠. 그 무렵 지린(吉林)성 한 도시에 있는 한중(韓中) 합작공장을 거점으로 삼고 일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 지역에 북한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고, 그 지역 내 제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어요. 주요 인물들은 틈틈이 한국 구경도 시켜줬습니다. 잠도 호텔에서 재웠고요. 중국 당국 직원의 옥바라지를 돕기도 했습니다. 북한 전시(戰時)에 중국이 적극 개입해 대동강 이북 지역을 장악 및 안정화한다는 내용의 ‘병아리 작전’ 계획서를 한국 정보요원에게 넘겨준 인물이죠. 2001년에는 서해상에서 북한 공작선이 사라지는 사건이 있었어요. 전진기지가 상하이(上海) 푸둥 앞바다 횡사도에 있었는데, 기관에서 이를 촬영해 달라는 의뢰가 오기도 했어요. ‘김◯◯’라는 위장명으로 상하이 출장을 가 그 결과를 보고하기도 했어요.”
이삼출 하사 일가족 7명 호송
― 그건 블랙요원들이 하는 업무 아닙니까.
“1999년 5월 대한항공 선양(瀋陽)지점장이 중국에서 체포된 일이 있었어요. 그 지점장은 대한항공 직원으로 위장한 한국의 블랙요원이었죠. 중국은 그 지점장 석방 조건으로 중국 내에 배치된 블랙요원의 전면 철수를 요구했고, 우리 당국은 받아들였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그때부터 민간인 에이전트의 일이 많아진 겁니다.”
국군 포로 호송사업에 뛰어든 것도 그 시기였다. 이씨는 “총 몇 분을 어떻게 모셔왔는지 상세하게 언급하는 것은 제한된다”면서 “다만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는 2002년 2월 1일 일곱 분의 국군 포로 일가족을 호송한 일”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최초의 국군 포로 일가족 동반 탈북 사례인데, 국내 언론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 그 가족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습니까?
“국군 포로는 당시 71세였던 이삼출 하사입니다. 경상북도 경주 출신으로, 5사단 소속이었어요. 휴전을 한 달 앞둔 1953년 6월 김화지구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잡혔죠. 이 하사는 이후 북한에서 강제 탄광 노역 등 갖은 고초를 겪다가 2002년 일가족을 데리고 북한을 탈출했습니다. 부인 차문화 여사와 아들 셋, 그리고 며느리와 당시 10살이었던 손자까지 총 7명이었죠. 그중 큰아들이 중국에서 골동품 거래를 했었어요. 그래서 두만강을 거쳐 넘어오는 루트를 잘 알았던 거예요.”
― 이삼출 하사 가족을 어디서 처음 만났나요?
“두만강을 건넌 국군 포로들은 대부분 옌볜(延邊)자치주 어딘가에 숨어 있습니다. 가정집이거나, 지하교회거나, 빈집을 통째로 얻거나 해서요. 제가 찾아갔을 때 이들은 옌지(延吉)의 어느 시각장애인 집에 2개월째 은거(隱居)하고 있었어요. 밀고(密告)의 위험이 적은 곳이었죠. 정보기관이 브로커를 통해 안전한 곳에 모셔놓은 거예요. 이삼출옹(翁)을 처음 보고 거수경례를 했어요. ‘적지에서 정말 수고많으셨다, 모시게 돼 영광’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동업자가 신고, 밀수로 10년형 선고
― 7명이나 되는 대가족을 어떻게 한국으로 이동시켰습니까?
“한 명이면 쉽습니다. 당시만 해도 공항 안전관리 담당자에게 1만 달러만 주면 손쉽게 비행기에 태워 올 수 있었어요. 이 가족들은 인원도 많았지만 그 밖에도 어려운 점이 많았죠. 여성 두 분에다 열 살 소년도 있었으니까요. 관계기관에서도 뾰족한 수를 못 찾던 중 저를 찾은 거예요. 시간을 두고 두 가지 계획을 세웠고, 이 중 더 안전한 방법을 택했습니다. 우선 육로로 옌지-창춘-선양-다롄까지 이동하도록 했어요. 각 구역마다 다른 브로커를 고용했죠. 가령 A 브로커에게는 ‘창춘(長春)의 한 식당에 이들을 데려다 놓고 밥을 시켜주고 가라’고 하고, B 브로커에게는 같은 방법으로 선양의 식당에 데려다 놓으라고 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야 잡히더라도 상선(上線) 추적이 안 되니까요. 다롄(大連)에서는 300톤짜리 화물선을 빌려놓은 상태였어요. 가족들은 다롄의 작은 항구에서 화물선을 타고 이틀 반 만에 경기도 안산의 작은 어항(漁港)으로 들어왔습니다.”
― 잠수함도 아니고, 그렇게 중국 해역을 버젓이 지나오는 게 가능합니까?
“흔히 다 잡힐 거라 생각하지만, 허점은 있기 마련이에요. 우선 선박 대여처를 잘 골라야 합니다. 신뢰가 쌓인 곳이어야 하고 이 방면으로 노하우도 있어야 하죠. 이런 일도 있었어요. 단둥(丹東)의 한 배 주인이 ‘한국으로 보내주겠다’며 탈북민 30명에게 인당 수백만원씩을 받은 뒤, ‘한국 도착했다. 내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다름 아닌 황해도의 한 무인도였어요. 탈북민들은 거기서 흠씬 두들겨 맞고 도로 북한으로 끌려갔죠. 그렇게 사기 치는 업체들이 많아요.”
― 당시 중국의 감시 체계는 어땠습니까?
“지금과 마찬가지였어요. 탈북민이라는 게 발각되면 즉시 체포돼 북송(北送)되는 게 원칙이었죠. 특히 국군포로는 북한에서 파견된 추적조나 체포조라고 하는 특무요원들이 직접 체포한다고 들었습니다.”
― 어떡하다 공안 당국에 체포된 겁니까?
“같이 일하던 현지인 사업 파트너가 있었어요. 상호간 신뢰가 컸죠. 전진기지 촬영차 상하이 출장과 이삼출옹 가족 호송 현장에도 동행했고, 서울에 데려와 2002년 월드컵 구경도 시켜줄 정도로요. 당시 저는 국가사업에 참여하면서 한국에서 열릴 전시회도 준비 중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이 친구가 제게 거액의 돈을 요구하더군요. 20만 달러. 2002년 당시 환율로 약 2.5억원에 달하는 돈입니다. 주지 않으면 그간의 행적을 다 신고하겠다고요.”
― 결국 신고를 했나 보군요.
“한국 특무, 그러니까 간첩이라고 신고를 한 거예요. 그렇게 2002년 7월 중국 훈춘(琿春)시 장영자해관(海關·세관)에서 체포를 당했어요. 희한한 점은, 관할 해관이 아닌 600km 떨어진 선양해관 특수수사대에서 파견을 나와 저를 체포했다는 겁니다.”

“구금 28개월 만에 가족 면회”
― 이후 조사 과정은?
“간수소(구치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특수수사관으로부터 20차례 이상 신문을 받았습니다. 신문 초기 신고자가 제게 ‘밀수’ 혐의도 씌웠다는 걸 알았어요. 서울 전시회용 물품을 문물국에서 정식 수출 허가를 받고 한국으로 보낸 건데, 그걸 밀수로 신고한 거예요. 차근히 설명을 했더니, 수사관은 이내 수긍하는 듯했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에이전트 활동과 관련된 사항만 집중적으로 묻기 시작했습니다. 다롄에서 배는 누가 빌렸느냐, 7명이 북조선 사람이냐, 상하이는 왜 갔느냐….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조사해도 증거가 없었어요. 그렇게 1년을 넘게 끌었습니다.
그 무렵 한 국의 한 중앙 일간지에 ‘어떤 한국인이 중국에서 재판도 없이 1년 넘게 구금돼 있다’는 보도가 나왔어요. 이 보도 이후 곧바로 ‘밀수’라는 죄명으로 1심 판결이 떨어졌습니다. 참 기가 막혔죠.”
― 변호사는 없었습니까?
“있어도 소용이 없었어요. 일반적으로 중국 형사사건의 소송 기간은 1년이면 상고심까지 끝납니다. 그런데 제 사건은 2심 판결까지 2년 4개월이 걸렸어요. 그 기간 동안 변호사, 가족, 대사관 영사 면담도 모두 제한됐습니다. 구금 28개월 만에 처음으로 가족 면회가 공식적으로 허락됐어요. 밀수범이라면 이렇게까지 외부와 차단시킬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 한국 정부의 도움은?
“그 긴 시간 비정상적인 소송을 벌이는 동안 우리 공관에서는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었어요. 돌아봐야 할 대목입니다.”
이씨는 2004년 12월 ‘중국 문화재 밀반출’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29개월간의 간수소 생활을 거쳐 선양 제2감옥소, 허베이(河北)성 연성감옥소까지, 총 7년 6개월을 복역했다.
“아직도 기억합니다. 1심 선고일이 2003년 11월 30일, 일요일이었어요. 일요일 재판이 가당키나 합니까. 간수가 ‘옷 입고 나갈 준비하라’기에 집에 가는 줄 알았어요. 주변에서는 축하한다고 박수까지 쳤죠. 그 길로 10년 선고를 받은 겁니다. 2심 때는 법관이 검사, 변호사도 부르지 않고 저 혼자만 출석시켰어요. 검사도 없는데 공소 유지가 떨어졌고요. 또한 1심을 진행한 선양시 인민법원과 2심을 진행한 랴오닝(遼寧)성 고급법원 모두 베이징 최고법원에 유권해석을 의뢰했습니다. 스스로 판결을 유보(留保)한 거죠.”
양빈 “김정일에 1억 달러 바치고 장관 돼”
― 수감 생활 중 고문은 없었나요?
“소(小)도시 간수소의 경우 미결수라도 노역(勞役)을 시키고 때리기도 한다는데, 다행히 그런 건 없었습니다. 대신 회유의 연속이었어요. ‘이것만 얘기하면 집에 보내줄게.’ 어느 날은 사진을 한 무더기 들고 와서 ‘이 중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더군요. 철수한 블랙들의 얼굴이었어요. 이미 신원 파악을 다 하고 있었던 겁니다. 모를 척할 뿐….”
― 안다고 안 했군요.
“일절 안 했어요. 원칙입니다. 일을 시킨 사람은 없어야 해요. 민간인 에이전트를 쓰는 이유죠. 유사시 꼬리자르기가 유용하니까요. 사건에 연루되는 사람이 많을수록 일이 복잡해집니다. 혼자 감당하면 될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요.”
― 함께 수감된 사람들은 어떤 이들이었습니까?
“감옥소에 있을 때는 어느 일본인 노인이 한 명 잡혀왔어요. 길거리에서 700위안(당시 한화 약 9만원)어치의 중국 구화(舊貨)를 샀다는 이유로 무기징역을 받았더군요. 간수소에서는 2002년 11월 뇌물 공여·사기 혐의로 붙잡힌 양빈(楊斌) 전 북한 신의주특별행정구 장관과 잠깐 같이 있었어요. 어떻게 장관이 됐냐고 물어봤더니, 뻥을 친 건지 진짜인지 ‘김정일에게 1억 달러(당시 한화 약 1000억원)를 상납하고 받은 자리’라고 하더군요. 간수한테도 돈을 얼마나 먹였는지, 간수가 아침마다 그에게 담배 2갑을 몰래 가져다주더군요. 양빈은 공판에 불려 나갈 때마다 난동을 그리 피웠어요. 어디 딴 데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 것 같았습니다.”
― 그 긴 복역(服役) 생활을 어떻게 보냈습니까?
“중국 감옥소에서는 모든 걸 돈 내고 했어요. 밥과 물은 물론 밥그릇, 수저, 이불, 치약, 칫솔 모두 사 써야 했죠. 밖에서 10원인 게 안에서는 50원씩 했습니다. 뉴스를 보려면 TV를 사야 했어요. 매달 간수 급여의 2배씩은 써야 했습니다. 빚이 쌓여갔죠. 저는 밥 먹고 만날 뛰기만 했어요. 수용실에서는 책과 신문을 보기도 했는데, 어느 날 간수가 그걸 다 치워버렸더군요. 접견도 안 되고 글도 못 읽으니, 말하는 법을 까먹었어요. 어느 날은 신발 밑창에 ‘3519’라는 숫자가 눈에 띄었어요. 신발을 제작한 부대명인 듯했는데, 어쩐지 익숙한 번호였어요. 며칠이 지나서야 내가 쓰던 휴대폰 뒷번호와 같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중 먼발치서 발자국 소리가 나면 ‘나 집에 보내주려나?’ 싶었어요. 오늘도 아니구나, 하는 게 8년째 이어졌죠.”

‘40대 사주가 없다’
2009년 12월. 출소 후 한국에 왔더니 대통령이 두 번 바뀌어 있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사주를 보면 ‘40대 사주가 없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그제야 알았다”고 했다.
― 그사이 가족들은 어떻게 지냈나요?
“집사람이 고생했어요. 과외도 하고 빵집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죠. ‘돈 얼마만 있으면 남편을 빼올 수 있다’고 접근하는 사기꾼도 있었다더군요. 내 슬하에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습니다. 애들이 초등학생 때 들어갔는데 나오니까 대학생·고등학생이 돼있었어요. 요만한 애들이었는데 나보다 훨씬 커졌더라고요. 한동안 서로 서먹했어요. 서글픈 일이었습니다. 안에서 몇 년간은 딸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었어요. 아직도 미안해요.”
― 트라우마 같은 건 없습니까?
“귀국 후 한동안 사람을 못 만났어요. 제정신을 찾는 데만 5년이 걸렸어요. 전에는 없던 폐소공포증으로 일상생활에 불편함도 많아요. 요즘도 별안간 누군가가 끌고 가 구금해 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환상을 겪기도 합니다.”
― 귀국 후에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습니까?
“조그만 1인 출판사를 운영 중입니다. 2015년에는 군 장병들을 위한 《내마음의 군사우편》이라는 월간지를 창간했었는데, 폐간했어요. 그러다 작년에 비정기간행물로 재발행했는데, 계간지로 만들어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 석방 후 밀고했던 사업 파트너와 만날 일은 없었습니까?
“누군가가 그를 찾아주겠다고 했지만,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만난다고 해서 과거가 회복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 순간 인생이 또다시 불구덩이에 빠질 수도 있는 거고요. 지금은 잊고 삽니다.”
― 왜 그때 기관을 도왔을까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제가 원해서 한 일이니까요. 지금도 하라고 한다면 할 겁니다.”
1만 명의 국군 포로 중 81명 귀환
― 귀국 후 과거에 호송했던 국군 포로나 가족들은 만나봤습니까.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2014년도에 가장 기억에 남는 국군 포로인 이삼출옹을 찾아갔더니 2006년도에 이미 고인(故人)이 됐더군요. 채탄 작업으로 인한 진폐증이 원인이었어요. 10여 년 만에 만난 부인 차문화 여사가 제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셨죠. 여사님은 그간 유족연금을 모아 남편이 복 무했던 5사단 위문방문을 하며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계셨어요. 냉면공장을 세워 어엿한 중견기업인이 된 막내아들과 함께 매년 여름철이면 육군 5사단을 비롯해서 119구급대원 등에게 냉면 봉사도 하셨죠. 이후 2016년에는 저와 함께 육군부사관학교를 찾아 냉면 기증식을 하기도 했어요. 지금은 연세가 아흔이 넘어 요양원에 계시는데, 그럭저럭 건강은 유지하고 계십니다.”

이씨는 2015년 9월 1일 차 여사가 그에게 보내온 감사 편지를 보여줬다. “세대주(남편)가 고향에 온다고 해서 쥐약 하나씩 들고 일곱 식구가 왔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더니, 북에서 사람 행세도 못하고 살던 이가 고향에 오니 군복에 무궁화훈장도 달았다”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북한에서 미송환 국군 포로는 ‘43호’로 불린다. 이들이 결혼해 자녀를 낳으면 배우자와 자녀도 모두 43호가 된다. 일가족이 모두 성분불량자 가운데 최하위로 분류된다. 당연히 삶은 비참하다. 북에 억류됐다고 추정되는 국군 포로는 6만 명. 1호 송환 국군 포로는 1994년 한국땅을 밟은 조창호 소위다. 이후 4반 세기 동안 단 80명만이 귀환했다. 2010년 이후 새롭게 탈출한 이가 없는 걸 보면 대부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90년 중반쯤에는 생존해 있는 분이 1000명 이상이라 들었는데, 지금은 100명도 안 될 것으로 보입니다. 진작 송환이 이뤄졌다면 더 많은 분이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역대 어느 정부에서도 북한에다 국군 포로를 송환해 달라는 소리를 공식적으로 못했어요. 미국은 6·25전쟁 전사자의 유해 한 점이라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우리는 살아있는 국군 포로도 안 찾아요. 전쟁 시 관군(官軍)보다 의병이 앞장서 적을 물리쳤듯, 국군 포로 송환 문제도 실질적으로는 의용군이 나서는 형국이죠. 그분들이 대한민국 발전의 기초이자 주춧돌입니다. 인당 10억원을 주고라도 모시고 와야 합니다.”
― 세월이 흘러 이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유가 뭡니까?
“제가 올해로 만 63세입니다. 중국 현지 요직에 있던 이들 모두 퇴직을 했어요. 국내 정보기관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죠. 이제 이 얘기를 털어놔도 부담을 가질 이들이 없습니다. 또 하나는, 내 자식 중 하나는 결혼을 했고, 나머지도 혼기가 찼어요. 훗날 손주에게 ‘밀수범 할아버지’가 아닌 애국자로 기억되고 싶어서입니다. 제게 죄가 있다면, 국군 포로를 진심으로 존경한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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