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일반상식

6. 순천 여수 탈환

太兄 2024. 10. 14. 19:38

6. 순천 여수 탈환

= 반란군 지리산 입산 -

 

아침 6시 진압군은 장갑차를 선두에 세우고 순천 시내로 진격하면서 순천교 근방의 반란군 진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시내에 도착하고 보니 반란군은 지난 밤 다 도망쳐버리고 한 명도 없었다. 지휜관들은 그때서야 백선엽 참모장의 주장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더욱 기막힌 것은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시내로 들어갔으나 반란군은 보이지 않고 젊은이들과 남녀 학생들이 진압군을 향해 총을 쏘고 있었다. 결국 자기들은 도망치고, 그 도망을 위해 어린 것들을 엄호(掩護)하게 한 것이었다. 참으로 가증스런 빨갱이들의 생각과 행동이었다.

 

드디어 진압군이 순천을 탈환한 후 순천경찰서에 도착하여 보니 수많은 시체가 쌓여 있었다.

아무리 혁명도 좋고 좋은 세상도 좋지만, 동족(同族)끼리 싸우지 말자 하면서 동족을 이토록 죽일 수는 없다. 빨갱이들은 동족이 아니고 적이다!”

이렇게 진압군들은 좌익들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고, 이 잔인함은 국군과 경찰에 전염되어 후일 부역자 처형과 같은 극렬한 피의 보복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진압군은 약 5만여 명의 순천시민들을 순천 북초등학교와 다른 학교에 분산하여 집합시킨 후, 남로당원과 반란 가담자를 찾아내기 시작하였다.

 

1. 우선 40세 이하 남자로 군용 팬티를 입은 자,

2. 머리를 짧게 자른 자를 찾아 반란군 여부를 조사하였다.

 

이때 경찰서에서는 인민재판을 하여 수십 명의 경찰을 죽인 인민재판 검사 박창길과 인민재판위원 11명을 공개처형 하였다. 이때 김종원 대위의 좌익 공개처형 방법은 눈을 뜨고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반란 첫날 여수에서 자행된 좌익반란군들의 학살은 이보다 더한다. 여순경 2명을 그것도 성기(性器)에 죽창을 찔러 죽인 예는 세계 역사상 오직 대한민국 좌익들밖에 없다.

 

무수한 양민(良民)을 인민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처형한 좌익들과 그에 대한 보복, 그리고 어디에 어떻게 박혀있을지 모르는 좌익 색출을 위한, 그리하여 여수와 순천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수복하기 위한 일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피는 피를 부르고 있었다.

 

김지회 반란군은 21일 밤중에 순천 방어에 실패하여 그 길로 순천에서 광양까지 8킬로 걸어 비봉산까지 도착하여 숨는데 성공하였다.

 

백선엽 참모장은 지금이라도 3연대와 6연대로 하여금 하동에서 구례까지 봉쇄해야 하여 반란군이 지리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12연대와 15연대는 반란군을 추격하고, 3연대 1개 대대와 장갑부대로 여수를 탈환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백선엽이 이러한 작전계획을 참모회의에서 설명하자, 지난번의 실패를 다시 하지 않으려고 모두들 동의하여 백선엽의 작전 계획대로 작전을 세워 반란군이 지리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봉쇄하였다.

 

10 24일 아침 6. 송호성 사령관이 직접 지휘하여 장갑부대가 선발부대가 되고 3연대 1개 대대가 뒤를 이어 여수 탈환을 위해 진격해 들어갔다. 여수 반란군은 순천에서 맥없이 진압군에 당한 것을 기억하고 이번에는 2개 중대로 고지에 60밀리 박격포와 기관총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좌익청년들로 조직하여 호를 깊이 파서 진지를 구축하고 도로 양쪽에서 매복하고 진압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수도 순천과 같아서 도로 양쪽에 200고지의 장군봉을 점령하기 전에는 여수를 탈환하기 어려웠다. 지창수가 지휘하는 반란군은 미평동 330고지와 종고산과 구봉산 고지를 점령하고 진압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송호성은 진압군이 순천을 쉽게 탈환하였기 때문에 여수도 쉽게 탈환할 것으로 판단하고 고지에 수색대를 보내 수색하지도 않고 바로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고지에서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주방한 반란군의 공격으로 진압군은 부상자가 속출하고 전열이 흩어졌으며, 송호성 사령관은 고막이 찢어지고 차에서 떨어져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송석하 3연대 부연대장이 장갑부대와 장병들에게 진격하라!”고 아무리 고함을 치고 격려해도 고지에서 공격하는 반란군을 해볼 수가 없었다. 진압군은 대패하여 순천으로 후퇴하였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진압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신문에는 <송호성 사령관 부상, 1차 여수공격 실패>라고 대서특필하였다. 이를 보고 남로당에서는 만세를 불렀다. 10 25일 하루 동안 진압군은 겁을 먹고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수 반란군 1개 대대는 진압군이 장갑차를 동원하여 고지를 점령하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밤중에 아무런 피해 없이 백운산으로 도망쳤다.

 

백선엽 참모장이 광양에서 반란군이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던 12연대로 하여금 여수를 공격하게 하였다. 2연대가 1개 대대, 5연대 1개 대대까지 여수 탈환에 투입하였다.

 

여수에 있는 반란군은 광양을 거쳐 백운산으로 도망쳤다. 지창수 등 일부는 벌교로 도망쳤고, 남로당 무장세력 1천여 명과 동조세력 1,200여 명이 여수를 지키고 있었다. 역시 순천과 마찬가지로 반란군의 후퇴를 지원하기 위해 남겨진 불쌍한 엄호세력들이었다.

 

10 26일 아침 6, 진압군 12연대, 3연대,2연대, 장갑부대, 5연대 1개 대대가 여수로 진격하고, 여수항에서 다른 부대가 상륙 협공하기로 하고 진격해 들어갔다. 장갑부대가 선발부대가 되어 전진하고, 12연대가 동쪽, 3연대는 200고지와 종고산, 2연대는 여수 서부를 담당 공격하였으나 반란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진압군은 고지에서 여수 시내를 향해 81밀리 박격포로 위협사격을 하였다.

 

백인엽 소령이 장갑차를 타고 선두에 서서 여수 시내를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여수는 순천과 달리 저항이 의외로 강하였다. 반란군은 보이지 않고 젊은 학생들이 99식 소총을 가지고 저항하고 있었다. 27일 오후 3 30, 진압군은 하루 종일 시가전을 해서 여수를 완전히 탈환하였다.

 

이 틈에 반란군은 백운산에서 지리산 화엄사 옆 문수골로 진압군의 방해 없이 들어갔고, 여수 시내에서는 (20일부터 인민공화국 세상이 되어 26일까지 숨어 있던) 국군, 경찰, 우익들이 만세를 부르며 나왔다. 7일 동안 우익이 죽는 세상에서 이제는 좌익이 죽는 세상이 되었다.

 

불과 일주일을 점령하기 위해 수많은 동포를 죽이고, 끝내 자신들도 사살당하는 이 우매함. 우리 민족사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한()의 강은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