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 양

미8군사령관 워커중장의 죽음

太兄 2023. 7. 5. 18:56

2021-06-23 22:29:41


6.25북괴기습남침전쟁의 숨겨진 사연
현충일과 6.25남침전쟁을 회고하며 가슴아픈 일화를 생각해 봅니다

★ Episode #1
미8군사령관 워커중장의 죽음

“아버지는 그날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고전하고 있는 우리 미24사단 을독려하고, 후퇴작전 중 큰 전과를 올린 우리 사단에 대한 부대 표창과 함께, 미국정부가 저에게 수여한 은성무공훈장을 제 가슴에 직접 달아주려고 짚차로 달려오시다가 의정부와 문산간 어느 도로에서 후퇴 중인 한국군 트럭에 부딪혀 현장에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
계속되는 추위와 끝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려 전 전선이 계속 패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속에서 모처럼 아군이 큰 승리를 했고

그승리의 주인공이 아들이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크리스마스 이틀 전인 1951년 12월 23일 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며칠전 맥아더사령관은 미국 정부에 아버님의 대장 진급을 상신해 놓았 더군요.

이렇게 해서 우리 부자간의 한국 에서의 첫 만남은 영원히 이루어
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불독’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아버지 월튼 H 워커대장(중장으로 전사,사후 대장 추서) 의 우락부락한 모습과 달리,
멋진 미육군정장에 네개의 별이 반짝이는 바나나모자를 쓴
훤칠하고 잘 생긴 아들 S 워커 미 육군 예비역 대장은 알링턴 미 국립묘지의 아버지 무덤에 한참이나 거수경례를 한 뒤
눈물을 글썽이며
30년전, TBC-TV 6.25 30주년
다큐멘터리 제작팀과 인터뷰를 이어갔다.

“이틀 뒤 나는도쿄의 UN군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불려갔습니다.

사령관이 제게 말씀하시더군요.
‘워커 대위! 아버님 의 전사를 진심으로 애도한다.
월튼 워커대장은 정말 훌륭한 군인이었다. 그의 죽음은 우리 미군은 물론 미국의 커다란 손실 이다.
귀관에게 월튼 워커대장의 유해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임무를 맡긴다.'

저는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각하, 그것은 안 됩니다. 저는 일선의 보병 중대장입니다.
그리고 지금 저희부대는 후퇴중 입니다. 후퇴작전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하다는 것을 각하는 잘 아십 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 부하들은 목숨을 건 위험에 노출되어 악전고투하고 있습니다.
지금 중대장이 바뀌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 중대에 제가 없으면 안 됩니다.
월튼 워커대장의 유해는 의전부대에 맡기십시오.저는 전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때 문을 향해 걸어 가던 맥아더사령관이 뒤돌아 서더니 '이것은 명령이야’하고 조용히 말하고 방을 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버님의 유해를 안고 이곳 알링턴에 와서 바로 이 자리에 안장했습니다. 그때 저는 이미 워싱턴육군본부로 발령이 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그때 맥아더 장군이 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이해합니다.

부하와 아들을 한 전선에서 한꺼번에 죽이기가 싫었겠죠.
그러나 그 결정에 찬성하지는 않습니다.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를 수 밖에 없었지만 군인이 부하를 위험한 전장에 남겨놓고 치열하게 전쟁 중인 한국을 떠나왔다는 생각이 지금도 가슴을 무겁게 합니다.
·····················
초대 주한 미 8군 사령관이었던 고 월튼 워커대장과 함께 최초의 미군
父子大將이며 미육군 최연소 대장 진급자였던 전도유망한 워커가 젊은 나이에 예편된 것은 바로 한국 때문이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불화로 카터가 주한 미군을 철군하려고 했을 때

한국에서는 주한 미군 참모장인 싱그러브 소장이 반대했다가 예편되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미 육군의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이며 차기 참모총장이나 NATO군사령관으로 유력하던 워커 대장이 카터에게 반대를 하다 결국 예편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월튼 워커대장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것이 또 있다.

월튼 워커 미8군사령관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의정부 문산 간의 도로가
바로 미군이 탱크훈련 중 미선과 효순이라는 두 소녀를 치어 죽게 한 바로 그 도로이며 사고지점도 거의 같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워커힐 호텔은 바로 이런 워커장군의에피소드 를 기억하며 명명되었다.
·······················
그뿐 아니라 워커 미8군 사령관의
짚차와 부딪힌 한국군 트럭 운전병을 이승만 대통령이 사형시키려 하자
미군 참모들이 적극 만류하여 사형을 면하게 해주고 대신 가벼운 징역형으로 감형했다는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
의정부와 문산 간의 같은 길에서 난 교통 사고!

1951년 미8군사령관을 죽게한 한국병사를 미군과 미국은 용서해 주었는데
2002년 훈련 중에 두소녀를 과실로 죽게 한 미군 탱크 병을
아니 미군과 미국 전체를 싸잡아서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증오하고 저주하며 촛불을 켜들고 한국을 떠나 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워커사령관의 에피소드를 알았다면 어떠 했을까....

★ Episode #2
워커 중장과 딘소장

1950년 7월 1일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으로 경무장한 보병만을 급히 일본에서 오산 전투에 급파한 도쿄의 맥아더 장군은 후속병력으로 딘소장 휘하의 24 보병사단을 투입 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도취감이 채 사라지지 않은 미군 병사들이 한국전쟁에서 치루게 될 처참한 상황들이 첫 전투인 오산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푹푹 찌는 1950년 8월 어느날
대전을 사수하라는 워커사령관 명령을 받고 탱크를 앞세워 밀려
오는 적을 보병만으로도 막아야 했던 불리한 전황 속에서 어떻게든지 대전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소 3·5인치 로켓포를 발사하여 적의 T-34 탱크 한 대를 직접 폭파시키면서 까지 혼전양상에서 사투를 벌이던 미24사단 사단장 윌리암 딘 소장이 부대와 떨어져 홀로 36일 동안 산속을 헤매다가 한국인 농부의 밀고로 북한군에게 사로 잡히게 되었다.

후일 포로생활에서 풀려나자
미국은 사단장이 직접
적 탱크와 맞닥트려 싸울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급박한 상황과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리고 3년동안의 포로생활 중 보여준 미군장성으로서의 군인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미국이 줄 수 있는 최고훈장을 수여했지만
‘내가 한국에서 사단장으로서 적의 포로로 사로잡힌 행위는 결코 훈장을 받을 수 없다고 극구 사양 하였다.'

적 탱크를 격파한 것은 어느 하사관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부끄러워하며 은둔했던 그가,

단돈 5 달러에 자기를 밀고해서 미군 장성으로서의 인생을 포로라는 치욕으로 마치게 한 그 농부가 5년 형을 받아 복역 중이라는 것을 알고

'무지한 농민이 살기 위해서 한 행동이니 감형해 줄 것'을 한국정부에 간청하여 출옥시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 딘 장군 포로생활은
북괴군이 그를 심문할 때 통역을 맡았던 민간인 이규현이 탈출, 귀순,진술함으로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규현은 후에 중앙일보사장과
문공부장관을 역임했다.

만약 외국에 파견한 한국군 사단장이 그 나라 민간인의 밀고로 전투 중에 포로가 되고 군사령관이 전사하는 경우를 당했다면 우리 국민과 나라는 어떻게 했을까...

★ Episode#3
이승만 대통령과 밴프리트 장군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어머니 저는 지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機首에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後尾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지금 한국에서 싸우고 계십니다. 드디어 저도 미력한 힘이나마 아버님에게 힘을 보탤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애인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 1952년 4월2일 당신의 아들 지미 올림 >

이 편지는 워커장군의 후임이었던
릿지웨이장군이 맥아더장군에 이어 UN군 총사령관으로 영전한 뒤,
그 후임으로 부임한 벤프리트 미8군사령관의 아들 지미 밴프리트 2세 (공군중위)가
이제 막 해외 근무를 마쳐 한국전에 참여할 의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원해서 아버지가 사령관으로 있는 한국전에 참가하면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편지였다.

지미 벤프리트 중위는 압록강 남쪽의 순천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다.
새벽 3시 김포 비행단의 레이더와 접촉한 후 표적을 향해서 날아가더니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겼다.

즉시 수색작전이 시작된 것은 물론이다. 4월 4일 아침 10시 30분경 8군 사령관 밴프리트는
미 제5공군사령관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지미 밴프리트 2세 중위가 폭격비행 중 실종되었고
지금 수색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고 한다.

“지미 벤프리트 2세 중위에 대한 수색작업을 즉시 중단하라.
적지에서의 수색작전은 너무 무모하다.” 라고..

아버지가 아들 구출작전을
무모하다고 중지시킨 것이다.
이것은 인접 한국군 부대장으로서
회의에 참석했던 전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장군의 증언이다.

며칠뒤 부활절을 맞아 그는 전선에서 실종된 미군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모두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말한 벗이 곧 한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밴프리트 미8군 사령관은 한국을 벗이라고 생각했고
그 벗을 위해 자기 자식을 기꺼이 내놓았던 것이었다.

* 참고로 벤프리트 장군과 해군 초대 참모총장 손원일 제독과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사이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의형제를 맻었고 독립운동가인 상해임정원/국회의장 손정도 목사의 큰 아들인 손원일 제독과는 호형호제하는 아주 막역한 사이로 후일 국방력을 키우는 지한파 형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 Episode #4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그의 아들 존 소령

1952년 12월 어느날,
대통령 당선자인 노르만디의 영웅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한국 전선을 살피기 위해 방한하여 8군 사령부를 찾았다.

8군과 한국군의 고위 장군들과 참모들이 모두 참석하고 전세계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밴프리트 사령관이 전선 현황에 대해서 브리핑을 끝내자 조용히 듣고 있던 차기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뜬금없는 질문을 하였다.

“장군, 내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 안 있어 대통령에 취임할 당선자의 야전 전투 사령관에 대한 첫 질문 치고는 너무나 대통령 답지 않은 사적인 질문이기도 했지만 상대가 아들을 잃고도 꿈쩍하지 않은 밴프리트장군이기에 모두들 무슨 일이 벌어질까 바짝 긴장되는 상황이었다.

" 아이젠하워 소령은 전방의 미 제3사단 정보처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라고 밴프리트 장군이 사무적으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이젠하워는 참석자 모두가 놀라자빠질 사적인 부탁을 했다.
“사령관, 내 아들을 후방 부대로 배치시켜 주시오.”

참석자들이 모두 서로 두리번 거리면서 웅성거리고 밴프리트 사령관도 언짢은 표정으로 아이젠하워를 응시하면서
의아해 하자 당선자가 조용히 말했다.

“내 아들이 전투 중에 전사한다면 슬프지만 나는 그것을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존 아이젠하워소령이 포로가 된다면 적군은 분명히 미국대통령의 아들을 가지고 미국과 흥정을 하려들 것입니다. 나는 결단코 그런 흥정에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령관이 잘 알다시피 미국국민은 대통령의 아들이 적군 포로가 되어 고초를 겪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대통령의 아들을 구하라’고
외치며 적군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압력을 가할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태를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령관이 즉시 내 아들이 포로가 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의아해하던 분위기가 반전되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표정이 되었다.
“즉각 조치하겠습니다. 각하!”
밴프리트 장군의 힘차고 또렷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이 에피소드는 이 자리에 참석했던 미 2사단 72 탱크 대대의 대대장 T.R Fehrenbach 중령이 전역 후 쓴 "This kind of war(한국 전쟁)"
라는 책에서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 페렌바하는 전역 후 유명한 역사저술가와 칼럼니스트가 되었다.


★ 에필로그

마지막 UN군 사령관인 마크 클라크 대장의 아들 클라크 대위도 금화지구의 저격능선에서 중대장으로 싸우다가 세번에 걸친 부상으로 전역을 했으나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 했다.
한국전에 참가한 미군 장성과 유명인사의 아들들은 모두 142명,
그 중 35명이 전사하였다.
한국전에서의 미군 전사자는 모두
54,000여명 부상 자는 10만 명이 넘었다.

노블레스오브리쥬 정신...!!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하여 사령관이 전사하고 사단장이 포로가되고 자기자식 들마저 참전시켜 전사하게 하는 장군들, 남의나라 전쟁에 54,000여명 의 전사자를 내고도
꿈쩍않는 국민을 둔 미국이란 나라...

이 글을 보시는 분들 께서도 미국민의 국가에 대한 사명감을 짚어 보시고, 다 함께 자성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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