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장수 스님. (효봉曉峰)》
☆☆이찬형 (李燦亨: 1888년~ 1966년)
평안도 양덕. 일본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 조선인 1호 판사 -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으로 엿판을 짊어지고 '석두 스님'을 찾아간 38세 나이의 엿장수가 있었다.
"그대는 어디서 오는 길인가?"
"스님을 뵈려 장안사를 거쳐 유점사에서 오는 길입니다."
"그래 몇 걸음에 왔는가?"
엿장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불쑥 일어서서 성큼성큼 방안을 한 바퀴 휘이 돌더니
"이렇게 왔습니다."했다.
석두 스님은
"허허, 이 놈이 보통이 아니로구나,
간만에 큰 물건이 왔구나!"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래, 왜 왔는가?"하고 물으니,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불가에서는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절집 살림을 익혀야 하는데,
늦은 나이에 출가하기란 어려운 일이라 스님은, 이튿날 엿장수를 데리고 벼가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논으로 갔다.
"석두 보택(石頭 寶澤,1882~1954) 스님"은 주머니에서 종이에 싸 가지고 온 것을 펴 보이며
"이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니
"바늘이옵니다"
엿장수가 대답하고 고개를 숙이는데, 스님은 바늘을 논으로 확 던져버리고,
"자네가 바늘을 찾아오면 머리를 깎아 주겠네" 하고는 돌아가 버리셨다.
석두스님이 떠난 뒤 엿장수는 팔과 다리를 걷어붙이고 진흙 논에 들어가 바늘을 찾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또 해가 뜨고 지고, 달이 뜨기를 세 번, 흙투성이가 된 엿장수는 마침내 바늘을 찾아 석두스님 앞에 내놓았다.
이 엿장수가 바로 일제시대에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판사가 된 '이찬형'이란 분이다.
그는 판사가 되어 처음으로 범죄자에게, 법이 정한대로 사형 선고를 내리고는 마음이 괴로워 사표를 냈다.
그리고는 엿장수 행세를 하며 방방곡곡을 떠돌아 다니다가 늦은 나이에 출가하여 득도한 '효봉 큰스님'이다.
효봉 스님은 '법정 스님'의 스승이며, 근대 불교의 혁신을 위해 계, 정, 혜(戒律, 禪定, 智慧) 삼학(三學)의 확고한 구도관을 설정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고, 대한불교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내셨다.
평소 제자들에게, 남의 잘못을 보면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교훈으로 삼아야지 비판하거나, 고발하거나, 벌 주려 하면 그런 마음이 더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고 하시며, 늘 "너나 잘 하거라!" 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1966년 10월 15일 79세 되던 해, 효봉은 새벽 예불을 마친후 제자들에게
“나 오늘 갈란다”했다.
스님들이 “마지막 한 말씀 남기셔야지요” 하자,
“내가 말한 모든 법은 다 군더더기/
오늘의 일을 묻는가/
달이 千江에 비추는데” 란 열반송을 읊었다.
그리고 그날 오전 10시, 앉은 채 호두알 염주를 굴리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유명 법관ㆍ검사 출신이라면 법률판매회사 로펌에서 억대 연봉을 주고 모셔가려 애쓴다.
명성과 전관예우가 엄청나니 ‘장사’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유혹을 초연히 뿌리친 ‘정의의 상징’들도 있다.
☆☆조무제 전 대법관은,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고 모교인 부산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직하다가, 부산지법 민원조정 센터장으로 박봉에 만족하며 산다.
공직자 재산공개 때, ‘최하 재산’에는 항상 조무제란 이름이 따라붙었다.
실로 ‘황금을 돌같이’ 보는 법관이었다
☆☆이강국 전 헌법재판소장은, 억대 연봉을 마다하고 대한법률구조공단에서 무료 법률상담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서류로만 접하며 법률적 판단만 했던 재판관 시절과 달리 국민의 어려움을 몸으로 부딪치며 해결책까지 제시해 주어야 하니, 어렵기도 하고 보람도 있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내내 하고 싶다”고 했다.
☆☆중앙선관위장 까지 지낸 "김능환" 전 대법관은, 퇴임후 부인이 경영하는 편의점 점원으로 막노동을 하고 있다.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그는 모든 세상 명리에 등을 돌렸다.
전문지식을 살려 공익에 봉사하는 것도 좋지 않으냐고 권유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또한 공명심이요 매명(賣名) 아니겠느냐 한다.
본인은 하심(下心)에 머물러 서민의 삶을 살고자 하는데, 남들은 “정말 멋진 인생이구나!” 존경하며 찬탄한다.
석가모니는 왕세자의 신분에서 행자(行者)로 내려섰지 않았는가.
공자님은 “상가집 개같은 사람”이란 말을 듣고도 “그 말은 나를 바로 말했다”며 웃었다.
유럽에서는 법관이 길거리를 걸어가면 사람들이 몰려나와서 “사회정의를 지켜주시는 분, 정의의 상징이 저기 간다”며 고개를 숙여 존경심을 표한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이 나라 귀감은 아닐지언정 삶을 무력하게 하는 밉상 무리들은 언제쯤 없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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