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경제

충성하는 사람에서 질문하는 사람으로

太兄 2025. 11. 28. 19:36

충성하는 사람에서 질문하는 사람으로

이 땅에 발 디딘 지 2년
北에선 침묵하고 충성할 뿐
자유도 '내 삶'도 없었다

한국에선 권력을 선택하고
질문하며 책임을 묻는다
나는 '국민'이 되는 중이다

이일규 前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정치참사
입력 2025.11.27. 23:50
여행 중이던 7월 제주도 어느 호텔에서 필자 /이일규 제공

11월의 한국 하늘은 유난히 맑다. 햇살은 차갑지만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이 계절이면, 나는 자연스럽게 2년 전 이 땅에 처음 발을 디딘 공항의 풍경을 떠올린다. 비행기 창문 너머로 보이던 하늘은 낯설었고, 이곳에서 과연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가족의 삶을 책임질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오늘, 나는 조심스럽게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이제 정말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가?’

북한에서 나는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이었지만, 정작 ‘내 삶’을 대표하지는 못했다. 생각은 있었지만 말할 수 없었고, 진실을 보았지만 기록할 수 없었다. 내게 주어진 것은 국가의 입장이었지, 나 자신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 모든 시간 속에서 나는 ‘입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침묵하는 체제의 도구’였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충성하는 것이 의무였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 애국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온 뒤, 처음으로 내 목소리로 세상을 향해 내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 정착 과정에서 나는 말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자유이고 용기이지만 동시에 책임이 뒤따른다는 진리도 깨달았다.

대한민국은 나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거리를 가득 채운 불빛과 카페의 웃음소리, 덤덤해 보이지만 스스로의 삶을 묵묵히 일궈가는 청년들, 그리고 무엇보다 대통령과 정부를 자유롭게 비판하는 국민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국회 생중계였다. 여당과 야당은 격렬하게 서로를 비판했고, 언론은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전달했다.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싸우는지 혼란스러웠지만, 곧 깨달았다. 싸울 수 있는 자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에 대한 국민의 심판,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을.

북한은 ‘생각의 통일’을 강요하지만, 한국은 ‘다름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이 땅에서 본 자유는 단지 빛만 가진 것은 아니었다. 말할 수 있는 자유는 있지만 들어주는 귀는 부족할 때가 있었고, 비판은 넘쳤지만 이해와 관용은 종종 뒤로 밀렸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북한은 자유가 없는 나라였고, 한국은 책임이 따르는 성숙한 자유가 필요한 나라라는 것을.

대한민국에 정착하면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사태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동안 누려온 자유가 흔들릴 수 있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는 오히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힘을 보았다. 정권을 심판하는 국민, 그리고 민심에 의해 이 권력이 바뀌는 과정을 목격했다. 북한에서는 권력이 국민 위에 있지만, 한국에선 국민이 권력의 주인이었다. 나는 그 모든 과정을 그저 관망하는 입장이었지만, 당당한 한 표를 행사하는 국민이라는 긍지를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북한에서 국가는 주민에게 충성과 희생을 강요하면서 인간을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여긴다. 교과서에는 ‘인민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적혀 있지만, 현실 속 주민은 복종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은 선택할 수 있고, 질문할 수 있고,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나는 그 차이가 ‘국가의 품격’이라고 믿는다.

물론 나는 아직도 자유를 배우는 중이다. 자유란 내게 주어진 권한을 마음껏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한 앞에서 책임을 자각하는 것임을, 이제는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정착 2년이 되는 오늘, 나는 아직 스스로를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6·25와 군부독재, 민주화와 경제 부흥이라는 격동의 현대사를 견뎌내며 세계 경제와 문화를 선도하는 선진국을 만든 국민. 그 국민의 이름 앞에 서기에는 아직 내가 한 일이 너무 보잘것없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이 땅에 온 지 2년, 나는 이제 더 이상 충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하며 살아가는 국민이 되어가는 중이다. 복종에서 자유로, 충성에서 책임으로 가는 길 위에서, 언젠가는 나도 당당히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동포의 더 나은 삶을 앞당기고, 대한민국에 온 탈북민들의 존엄과 단합을 도모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의 작은 역할을 기꺼이 보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