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경제

'피 튀기는 경쟁'에서 생존한 기업인 3세들

太兄 2025. 11. 4. 18:22

'피 튀기는 경쟁'에서 생존한 기업인 3세들

한국에서 재벌 3세는
오너 리스크 같은 환경을
다 이겨낸 생존王이다

엔비디아 GPU 26만장도
기업이 나서 가능한 낭보
국내서 우리끼리도 잘하자

입력 2025.11.03. 23:50
지난 달 29일 경북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열린 'APEC CEO(최고경영자) 서밋'에서 참석자들이 이재명 대통령의 특별연설을 경청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 정기선 HD현대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겸 SK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장인화 포스코홀딩스 회장, 허태수 GS그룹 회장, 여승주 한화그룹 부회장./연합뉴스

경주 APEC은 글로벌한 관점에서 볼 때 무탈하고 무난했다. 다자회의를 꺼리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번에도 한·중·일과 양자 정상회담만 치르고 먼저 떠났지만 부산에서 열린 6년 만의 미·중 정상회담에서는 희토류, 관세 등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등 갈등 수위를 낮췄다. 많은 나라 정상이 안도하며 돌아간 것 같다. 우리 입장에서도 스스로에게 높은 점수를 줘도 될 한 주였다.

이재명 대통령과 정부가 잘했다. 관세 협상이나 핵잠 연료 승인 같은 실질적 성과는 한참 뒤에 가늠할 수 있겠지만 이 대통령은 순발력과 실용주의를 발휘했다. 신라 금관 복제품 선물은 히트작이었다. 긴장감이 꽤 높았던 한중 정상회담 이후 시진핑 주석으로부터 샤오미 스마트폰 2대를 선물 받은 이 대통령이 웃으면서 “통신 보안은 되냐”고 묻자 시 주석이 역시 웃으며 “백도어(해킹 경로)가 있는지 확인해보라”고 응수한 장면도 빛났다. 서유럽 정상들 사이에서나 나올 만한 ‘티키타카’였다.

이제는 너무 뻔한 이야기지만 K푸드·K팝·K뷰티 등 ‘K시리즈’의 힘도 발휘됐다. 지난주 수퍼위크의 최대 스타였던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은 자신에게 쏟아진 스포트라이트에 특유의 쇼맨십을 더해 한껏 ‘K’를 띄웠다. 그는 깐부치킨, 테슬라(테라 맥주+참이슬 소주) 폭탄주,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와 김밥의 홍보대사를 자처했고 한국의 PC방과 게이머들 덕에 오늘의 성공이 가능했다고 고백했다. 코엑스에선 e스포츠 황제 페이커(이상혁)의 이름을 삼창(三唱)해서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리더니 “요즘 세상에 누가 팝, 로큰롤, 재즈를 듣냐? 우리는 K팝을 듣는다”고 외치며 아이돌 그룹 ‘르세라핌’을 무대 위로 불러 올렸다.

그리고 한국 기업인들. 돌아보면 2005년 부산 APEC 때는 황창규 당시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 사장 정도만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낯을 가리는 편이고 우직한 스타일인 재벌 2세 회장들은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재벌 3세’들은 스스럼없이 세계 무대에 올라섰다. 작년 비상계엄 이후 대선까지 몇 달 동안의 혼란기에 CEO 서밋뿐 아니라 APEC 전체 준비를 실질적으로 이끈 사람도 대한상의 회장인 최태원 SK 회장이었다. 이재용 삼성 회장, 정의선 현대차 회장은 티셔츠를 입고 맥주를 마시며 자신들이 젠슨 황의 친구이자 엔비디아의 비즈니스 동맹이며 AI 새 질서의 주요 축임을 세계에 과시했다. 작업복을 입은 김동관 한화 부회장은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를 자기 회사 잠수함에 태웠다. 서울공대 김영오 학장은 “AI 전략자산인 엔비디아의 GPU 26만장 한국 공급이라는 파격은 민간(기업)이 나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지난 9월까지도 5만장 확보가 우리 정부 목표였다”고 했다.

그간 ‘재벌 3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선은 그리 좋지 않았다. 거인이라 불린 할아버지들, 할아버지에게 배우고 물려받은 회사를 키운 아버지들에 비하면 핏줄밖에 더 있냐는 거였다. 일감 몰아주기 등 승계 과정의 불법성, 가족 간의 재산 분쟁과 사생활 문제 등으로 종종 빈축을 샀다.

하지만 지금 무대 위의 3세들은 사실 수십 년간 이어진 ‘피 튀기는 경쟁’의 생존자들이다. 어려선 형제간, 사촌들과 밥상머리 위의 경쟁에서 우위를 증명해야 했고 그다음에는 검찰과 법원을 오가며 이른바 ‘오너 리스크’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 싸움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남의 시선에서 벗어나 양녕대군처럼 자유롭게 살고 있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한국 사회의 매서운 눈초리와 시장 앞에서 계속 검증을 받아 왔다.

이재명 대통령 취임 직후 트럼프 정부에 대한 긴장감이 한껏 높아졌을 때 한 3세 회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우리(재벌 3세)는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게다가 일본, 중국 기업인들보다 영어를 잘하고 워싱턴, 뉴욕에 동문들이 수두룩해서 글로벌 네트워크도 넓다. 판이 흔들리면 싸움이 벌어진다는 이야긴데 다른 나라에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50대 후반인 그는 “이제 우리 또래도 전력을 다할 시간이 10년에서 15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들이 세계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미래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 한국 기업이 HBM(고대역폭 메모리 반도체)과 초고압 변압기를 공급하지 못하면 AI의 미래가 없고, 한국 기업의 자주포와 잠수함이 없으면 세계의 안보 균형이 흔들리는 세상이 됐다. 좋은 이야기 끝에, 한마디 보태자면 국내에서 우리끼리 있을 때도 좀 더 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