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내가 겪은 1,21사태(事態)
1968년 1월21일은 나의 군 복무기간중 잊을수 없는 또한 그당시 국가 안위에 엄청난 혼란과 충격을 가하고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50년전 1월21일은 금년과 같이 일요일, 당시는 영하 10여도의 강추위에 여늬때와 같이 외출 외박을 다녀와 20시 대대 연병장에서 일직사령으로 부터 각 중대 인원 점검과 하달사항이 있은후 20시 30분경 취침시간에 들어가자 작전과장(대위 장세동)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전 부대원 완전군장 연병장 집합 구령이 떨어졌다.
당시 나는 전방에 신원미상의 부대가 훈련중이라는 작전과장의 명을 받고 각과에서 1명이상 외출 외박 중지 명을 받고 대기중이었기 때문에 생생히 기억..
당시 5분대기조 훈련이 익숙한 전부대원은 평상시 훈련으로 알고 연병장에 집합, 중대별 인원보고와 동시 작전과장은 수송관에게 차량 연병장으로, 병기과에 실탄운반 하달, 화기중대에 청와대 좌방향으로 박격포 8문설치 명령이 떨어졌다.
그무렵 청운동 쪽으로 부터 기관총 난사 소리를 들었다.
각 중대별로 인원보고후 실탄분배, 차량승차 1중대가 선도(중대장 대위 안현태) 2, 3중대가 청운동쪽으로 출동하면서 화기중대는 박격포 8문에서 조명탄 발사로 개미새끼 움직임까지 응시할수 있도록 밝은 대낮같이 비추었고 출동한 3개 중대는 목전에 은신한 김신조 일당31명을
3인 1조 단위로 경계에 들어갔고, 조명탄 발사로 움직일수 없으니 고요가 한동안 지속되기도 하였다.
간간히 기관단총 소리와 아군의 M1대항사격, ..
9시경 최규식 총경은 부대 출동전 이미 사망하였고 30대대에서 5명사살, 33대대와 30사단이 동원 경찰과 합동작전으로 29명 사살, 1명도주(박재경-북 고위직) 김신조 투항 최총경, 민간인 4명이 사망하였다.
김신조부대는 북한군정찰국 소속 124군 1기생으로 대위1, 중위2, 소위3명 간부와 조직원으로 편성 되었으며 1월18일 자정 연천군 장남면 휴전선 철책선을 끊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에 임진강 빙판을 건너 야간을 이용하여 파주 세검정을 경유하여 경복고앞에서 종로서 최총경이 차에서 내려 수하를 하자 기관단총을 난사 사망케 되었다.
124군 부대 주 임무는 청와대습격 및 요인 암살 지령을 받고 대한민국 국군복장을 하고 수류탄, 기관단총으로 무장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한 사건이며
반세기가 지난 현재 북한 김정은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각종 화학살상무기를 개발하여 엄포, 전세계가 한반도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엄연한 현실에 위기를 기회로 돌릴수 있는 전략과 지혜, 튼튼한 안보, 국민의 단합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2부- -내가겪은 1,21사태(事態)
남파경위 및 사태수습까지 간략하게 조명해 봅니다.
김일성이 남파한 124군 특수부대는 대통령이 일요일에는 청와대에 머문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작전명령.
1월18일 자정 연천군 장남면 휴전선 철조망을 끊고 빙판의 임진강을 건너 야간을 이용하여 행군하고 낮에는 땅굴을 파고 휴식과 낮잠을 자고 한파를 견디며 산을 타고 강행군 발자국이 남을까봐 맨뒤에 2명이 발자국을 지우며 치밀한 계획에 우리 국군은 정확히 감지하지 못했고 1월19일 파주시 법원리 초리골에 사는 우씨 4형제가 삼봉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납치되어 감금 7시간만에 구사일생으로 6시경 풀려나 우씨 4형제와 집안식구들과 협의끝에 파주경찰서에 신고로 군경 비상경계태세가 발령되었다.
자신들의 정체가 발각된 무장공비들은 약 7시간 잡아놨다가 살려 주는데 공비들간에 살려주자, 죽이자 의견이 양분되었으며 남루한 옷차림과 우씨형제들의 임기웅변, 동정삼으로 살려주었고 이로 인하여 흔적을 감지못한 군경이 비상경계태세를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양주 비봉산근처 사모바위에서 숙영, 서울까지 61km 지점에서 북악산으로가 청와대뒤 북악산에서 마지막 밤을 지내고 바로 청와대 비서실, 경호실 폭파 박정희 암살후 창와대 차를 탈취해 북으로 복귀예정으로 사복으로 갈아입고 도로를 이용 행군중세검정고개 자하문을 지나 경복고 앞에서 종로서 최규식 총경의 검문을 받게되자 방첩대라 둘러댔으나 신분증 제시를 요구 위기에 처하자 최총경을 사살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그당시 30대대에서는 전 대대비상과 함께 1,2,3중대가 차량승선 출동중이었고 화기중대에서는 박격포 8문을 설치 조명탄을 발사하기 시작 하였다.
당시 대대장은 중령 전두환, 부대대장 소령 이종구, 작전과장 대위 장세동이 지휘하였다.
출동한 병사들은 평상시 훈련으로 알고 강추위에 준비없이 출동하여 체감온도 영하 15-6도의 온도를 견디며 공비들과 교전하면서 밤새 견디기에 엄청난 고통과 시름을 겪어야 했다.
3부 내가 겪은 121사태(事態)
1968년 1월 21일 오후 전국 군,경(軍,警)비상경계령이 발동된 가운데 참모총장 명령으로 육본 참모장(중장)이 단장으로 수경사 30대대에 작전지휘본부를 설치하고 육본 참모장 외 다수, 수경사령관(소장 최우근), 방첩부대장, 위수지역 관련부대장, 치안본부장, 종로경찰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작전과장 장세동대위가 연천군 장남면에서 부터 보고받은 자료를 중심으로 지도를 놓고 사건경위 설명과 구체적인 브리핑, 향후 전개될 작전과 대처방안에 대한 심도있는 숙의를 하였다. 나무꾼 우씨4형제의 신고를 하기 전까지는 1개소대가 훈련중이라는 막연한 보고로 공비가 지나간후 진상파악 하기에 급급했던 것으로 예상된다.
공비들은 청운동의 세검정 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수류탄 및 기관단총을 쏘면서 저항하는 과정에 시내버스에 총탄이 날아들어 민간인 피해도 발생했으며 보고를 받은 종로서장이 출동 경복고앞에서 수하를하자 총기를 난사 최총경이 사망무렵 30대대 3개중대가 출동하고 화기중대에서 청와대 자하문 방향으로 박격포 8문 조명탄 발사로 대낮을 방불케 하는 개미새끼 움직임까지 직시할수 있는 상황이 전개 되면서 밝은 불빛아래 3개중대가 공비들을 경계, 공비들은 나무밑 또는 계곡등에 몸을 숨기고 위장 움직임이 없이 한동안 고요한 적막의 시간을 보내기도.. 공비들이 갑자기 기관단총을 난사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인왕산, 부암동, 북한산으로 흩어지기 시작하였으며, 그시간 소사 33대대 4개중대, 30사단 92연대 소속 장병들이 출동하여 세검정계곡, 북악산 5부 능선까지 퇴로를 차단키 위하여 진지구축을 하였다.
1월 22일 오전 1시이후 영하 15~6도에 칼바람까지 몰아쳐 살을 외는 듯 강추위에 세검정계곡은 조명탄불빛아래 군,경 플래시 불빛, 확성기 소리로 메아리침의 울림은 등골을 오싹하게 했고 정신을 집중 경계에 임했으며 군,경은 공비들에게 포위되었으니 투항하라, 나와라, 살려준다 계곡을 메아리치는 일촉즉발의 순간순간이 이어졌다.
계곡의 바위 뒤 곳곳에 3명 1개조씩 자리 잡은 장병들이 총을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움직임이 포착되면 사격과 공비들의 응수로 새벽녘 동틀 무렵 공비사살 5명, 33대대에서 3명사살 김신조를 투항케 하는 전과를 올렸고 30대대 1중대 장병 1명이 허벅지 관통상을 입고 수도육군병원에 입원 육영수 여사가 병문안을 하였다.
당시 김신조가 포위되어 투항하기까지 급박했던 당시의 심경을 동아일보와 인터뷰 내용을 옮겨본다.
무기는 수류탄 하나뿐이다. 북한에서 가져온 총과 350발의 실탄, 13개의 수류탄은 도주 과정에서 인왕산 바위 밑에 숨겼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됐다.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수류탄 안전핀에 손가락을 걸었다.
수년 동안 훈련받은 대로 자폭해야 할 시간이다 되뇌이는 순간순간은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이 머릿속에서 꿈틀거렸을 것이리라..
확성기 소리가 다시 귀를 파고들었다. “반드시 살려준다. 믿고 나와라.” 순간 나는 모든 것을 결심하고 자포자기 두 손을 들고 플래시 불빛을 향해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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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내가 겪은 121사태(事態)
투항한 김신조는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6기지 2조 조장 소위로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지시를 받고 남파된 특수부대 장교로 당성과 실력을 인정받은 엘리트 군인이었다. 조선인민군 정찰국장인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요인 암살 지령을 받고 대한민국 국군의 복장과 각자 소지품은 수류탄, 장총, 권총과 1인당 수류탄 10개, 탄알 30개씩 소지 무장하고, 1월 17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대한민국 수도권에 잠입하였다.
1968년 1월 22일 새벽 국군에 투항한 북한 특수부대 김신조 소위가 장병들에게 투항 호송 후 기자회견에서 “왜 내려왔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말한 기세등등한 26세 군인으로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현재 결혼과 아내 덕분으로 신앙을 갖게 되었고 손주들을 포함해 11명의 대가족을 이뤘다.
1996년 목사 안수를 받고 안보강연과 신앙생활하면서 서울 영락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69년부터 2,800여회 안보강연과 50여년간 대한민국의 안보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힘을 기울였으며 사회갈등으로 안보가 논쟁거리가 돼서는 안 된다는 반공 최 일선의 애국인이 되었다.
경기 파주 문산 쪽에 적군묘지라고 있다. 1·21사태 때 숨진 동료, 친구들이 묻혀있다.
북한이 이제 그들의 유골을 가져가야 한다. 그리고 가족 생각이 난다.
나는 한국에서 행복을 얻었는데… 가족생각을 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그는 기자들 앞에서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말했다. 동아일보DB
“처음에 내가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다’고 했을 때는 북한에서 나를 영웅 대접했다고 하더라.
그러나 내가 안보강연 다니고 하니까 1980년쯤에 부모님을 고향인 함경북도 청진 시내 운동장에 세워놓고 1만 명이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 했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인민재판을 한 거지.
그 얘기도 몇 년 후에 청진에서 온 탈북자에게서 들었다.
기자- 북한의 가족은 어떻게 됐나?
7남매였는데 6명의 형제는 아예 행방을 알 수 없다.
여러 루트를 통해 수소문해 봤는데 북한에서 아예 주민등록이 말소됐다고 한다. 우리 가족의 기록 자체가 없어진 거지…
나도 내 인생을 한번 정리할 시점이 된 것 같다 며 말문을 열었다.
“한국은 북한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다”
기자- 50년 전과 지금의 남북 관계를 비교한다면….
“북한의 속성은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북한은 변하지 않았는데 북한을 바라보는 한국 사람들의 생각만 너무 많이 바뀌었다.”
기자- 우리 국민의 안보 의식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나?
“180도 바뀌었다.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당시에는 6·25를 직접 겪었던 사람들이 많았고, 늘 북한의 위협과 도발 속에 살았다.
북한 정권에 대해 적개심이 없다. 오히려 북한에 동조하는 사람들만 늘고 있다.
기자- 50년이 흘렀다. 북한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북한은 바뀐 게 하나도 없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서 예전처럼 적화통일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뿐 요즘은 ‘한민족’이라고 강조한다.
‘한민족’에 대해 대한민국에 반대할 사람 얼마나 있겠느냐? 하지만 그게 잘못된 생각이다.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 김정은으로 바뀌었지만 북한은 한 정권이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
북한은 망할 때까지 절대 대남전략을 바꾸지 않는다.
남한 대통령을 직접 살해하려는 원시적인 도발이 핵개발이라는 치명적 도발로 바뀌었을 뿐 남북 간의 대치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라며 말문을 닫는다.
이상 1,21사태 발발 50주년을 맞아 기자회견 내용을 발췌 명기하였음을 밝혀 둡니다.
* 대한민국 군·경은 68. 1. 18일부터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하여 소탕 작전을 벌였으며, 공비들은 북한산, 도봉산, 송추, 파평산 일대로 도주 하였다.
군경은 퇴로를 차단 공비들을 사살하기 위하여 야간 경계태세를 가일층 강화하고 병력은 주,야교대로 낮에는 취침, 야간 경계 근무자와 맞교대하며 세수할 겨를도 없는 숨막히는 순간순간들로 강추위와 싸우며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1월 31일까지 전개, 생포 1명, 사살 29명 도주 1명 전과를 올리고 작전이 종료 되었다.
1, 21사태 발발로 군,경, 사회 등 많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30대대에서는 청와대 외곽 근무를 담당하고 33대대는 30대대 아래 천막을 치고 소사에서 이사 주둔, 방공포 1개소대와 전차 2대가 경복궁 30대대에 편입 되고 각 중대별 청와대 경비 및 주기적으로 청와대를 중심으로 북한산 외곽일대 순찰강화와 청와대 앞길이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으로 설정되고 각 부대마다 경계태세가 가일층 강화되었고 정치, 경제 사회 각 부문의 궤도수정으로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청와대 뒤편 서울 성곽길 북악산(백악산)을 걷다보면 50년전 1,21사태 흔적이 여러곳에 남아있다. 이름하여 1,21사태 소나무라하여 15발의 총탄자국이 있으며 군경과 도주하는 북한공비들과 총격전을 벌렸던 흔적이다. 1,21 사태후 청와대 앞길이 전면 통제된 후 50년만에 청와대 앞길이 완전 개방되었다.
1,21사태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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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내가 겪은 121사태(事態)
1968년은 1년 내내 한반도에서 전쟁의 기운이 감돌던 비상 시기였다.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북한이 김신조 등 특수부대원 31명을 보낸 1·21사태를 비롯 1월 23일엔 미국 해군소속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승무원 83명을 태운 채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에 나포되고, 11월에는 경북 울진, 강원 삼척에 북한 특수부대원 120명 침투,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도사리의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살해당한 9세 소년 이승복사건과 광화문에 충무공 이순신 동상을 세워 왜구를 물리친 충무공이 북한을 막는 국가의 수호신으로 등장한 시기였다.
또한 1·21사태는 한국의 방위 체제가 새로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어 2월 육군 병사의 복무 기간이 2년 6개월에서 3년으로 연장되고, 4월 1일 향토예비군 창설, 육군3사관학교 창설, 일반학교 교련 실시, 11월 주민등록증이 처음 발급되었다. 1,21사태로 충격과 자극을 받은 정계나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집중하던 계획을 국가안보 우선주의, 중화학공업 육성과 군 무기현대화, 자주국방건설, 새마을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 1,21사태로 인해 군과 안보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 무장공비 일당은 생포1명, 도주(박재경)1명 29명 사살, 아군은 군인, 경찰, 민간인 34명이 희생되고 1월31일 1,21 사태는 종료되었으며 이북으로 도주한 박재경은 조선인민군 대장, 총정치국 부총국장을 역임하고 2000년 9월 김정일 특사로 김용순과 방한 송이버섯을 선물한 일이 있다.
- 68년도 GNP 250$ 전방에서 전출온 병사들에 의하면 보급과 식량이 원활하지 못해 통일화를 기어서 신고 식사량이 적절치 않아 배고품과 외출, 휴가시에는 제복하나가 지급되지 못하여 군화와 제복을 빌려 입고 휴가를 가는 등 아주 열악한 복무환경 이었으나 반면 경비사의 경우 동정복 2벌, 카키복 2벌, 군화, 통일화 등 식사량이 충분하였으며 매주 토요일마다 외출, 휴가때에는 줄선제복에 반짝반짝 빛나는 군화를 신고 시내를 활보하고 경비사의 긍지를 가졌는데 50년이 지난 현재의 병영생활은 여유로움 속에 부족함 없는 병영환경과 수시로 친구, 가족과 전화통화 함은 물론 조직자체가 수평화 되어 빠따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유분방의 그 자체인 듯 보인다. 좀 힘이 들면 이것저것 집에 고자질, 엄마 전쟁나면 나는 어떻해 철딱서니 없고 나약해빠진 병사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불가 가물가물.. 우리때의 군생활은 신병으로 중대배치 되면 저녁에 풋샾, 원산폭격, 줄빠다로 쫄따구는 고참들 응덩이까면 멘수리다마 발라주는게 전통이다 싶었는데... 50년이 흐른 현재 젊은이 들은 상상이나 되겠나?
3만불의 경제성장으로 무기의 현대화와 최적 환경에서 복무하다보니 천지가 개벽된 오늘의 풍요의 한국을 실감케 한다. 주지하건데 군인은 군인으로서 국토방위에 전념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의무를 수행하거늘 의타심에서 벗어나 투철한 애국정신으로 군복무로 자기를 인격체로 성장시키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 이에 김신조와 기자간 대화내용을 적시하면
남북 관계가 긴박하다. 한반도 비핵화 가능할까. 김정은에게 핵은 생존이다.
푸틴 대통령은 북한은 인민들이 풀을 먹어도 핵 포기 안 한다고 했다.
김정은과 북한 지도부는 체제가 붕괴되면 죽는 것이다.
북한 지도부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6자 회담 자체가 핵 개발에 필요한 시간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았고 필요할 때마다 치고 빠지며 밀고 당기는 것이 공산주의 전략이다. 지금도 변한 것이 없고 똑 같다.
평창 겨울올림픽에 북한이 선수단과 예술단 등 대규모 대표단을 보낸다.
북 체제를 선전하기 위해 오는 것이다. 북 체제는 선전·선동으로 유지된다.
국가적으로 선전·선동에 엄청 투자한다.
평창에 오는 것은 오래전부터 세워진 계획이라고 본다.
한국이 이명박 정부 때 겨울 평창올림픽을 유치했을 때부터 계산한 거라고 본다.
먼저 핵 개발하고 겨울올림픽을 통해 북한의 체제와 북한이 살아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선전하려는 계획이 서 있었을 것이다.
- 평화 올림픽이다.
북한도 손님인데 어떻게 대해야 하나.
“손님으로만 대해주면 된다.
박수 치고 환호하게 되면 북한은 대한민국을 자신들이 장악했다고 선전할 것이다.
김정은 체제 유지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한국은 북한의 전술을 너무나 모르는 것 같다.”
북한은 절대 선의를 선의로 받아들이지 않는 집단으로 원리 원칙대로 해야 한다.
경각심을 일깨우는 모든 것이 함축돼 있는 내용으로 참고 하시고
준비 없이 쓰다보니 두서없는 부분, 미흡한점 이해하시고 6부에서는 마지막회로 반세기가 지난 당시 군복무 기간을 조명 봅니다.
宋 治淳 병장제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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