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1500원 되면, 대기업도 버티기 어렵다"
달러당 1450원, 장기화 우려
예상 밖 급등에 초긴장 모드
원·달러 환율이 15년 만에 1450원대를 기록하며 예상을 빗나갈 정도로 치솟은 고환율 현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에 국내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들도 ‘환율 대책 마련’에 나서는 등 ‘초긴장 모드’에 돌입했다.
올 초만 해도 1300원대를 기록했던 환율은 미국 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며 상승세가 잠시 주춤했으나, 도널드 트럼프의 미 대선 승리 후 다시 뛰기 시작했다. 비상계엄 선포와 대통령 탄핵소추 등 불안한 국내 정국과 미국 통화정책 전환이 겹치면서 지난 19일엔 1451원을 넘겼다.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유독 환율에 민감하다. 흔히 환율이 오르면 수출 대기업의 경우엔 이익이 크게 늘어나 실적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최근 국내 대기업 상당수는 미국으로 제조업체를 옮겨 환율이 요동칠수록 영향을 크게 받는다. 큰 금액의 선(先)투자를 한 탓에 환율이 오르면 채무 부담도 커져 영업이익이 줄어드는 곳도 적지 않다.
당장 기업들은 생존 기로에 섰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1300원대 환율을 기록했던 것을 염두에 두고 경영 계획을 세운 기업들은 갑작스레 환율이 1450원까지 뛰자 원자재 값만 10%씩은 더 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여기에 “내년 환율이 1500원까지 오를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일각에선 “이대로 가다간 대기업도 버티기 어렵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 제조 중소기업들의 영업이익률은 보통 4~5% 수준으로, 환율이 이 정도까지 뛰면 환차손이 커져 일부 소규모 기업은 영업이익이 최대 20%까지 줄어들 수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산업연구원은 환율이 10% 오를 경우 대기업의 영업이익률은 0.29%포인트 하락한다고 봤다. 이 정도로 급격하게 환율이 뛰어오를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쉽지 않아 대비하는 데 어려움이 큰 데다, 원화 가치 하락(환율 상승)으로 매출 증가 효과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예상을 빗나간 고환율 사태에 대기업과 중견기업들은 잇따라 사업 계획을 재조정하는 모습이다. 석유화학, 철강, 항공 등 일부 기업은 구조 조정 일정을 앞당기는 등의 검토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高환율 타격, 중소기업에 먼저 온다
경기도 의왕에서 스테인리스 부품을 파는 H 회사는 최근 국제 니켈 가격이 다소 내려갔음에도 환율이 치솟는 바람에 그 이익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 이 업체 대표는 “환율이 말도 안 되게 오르는 바람에 작년 니켈 가격이 갑자기 치솟을 때보다 원자재 대금을 더 많이 치르게 됐다”면서 “영업이익도 30% 넘게 깎였지만, 요즘 주변에서 영업이익이 반 토막 났다고 울고 있으니 어디 하소연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또 다른 중소기업 사장은 “정치 혼돈이 아무리 심해도 경제는 살려내야 하지 않겠느냐”며 “이러다간 중소기업들은 연쇄 부도 사태가 우려될 지경”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국내 중소기업 중 환율이 오르면서 환차익으로 이익을 얻는 경우는 10%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 90%는 원자재를 수입해서 다시 가공한 것을 국내 대기업에 납품하거나 내수 시장에 내놓으면서 매출을 올리는데, 이런 기업일수록 환율이 오르면 원자재를 더 비싼 가격에 사게 되니 이익이 크게 줄어 휘청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 18일 국내 수출 중소기업 513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긴급 설문 조사에서도 10곳 중 3곳은 ‘최근 국내외 상황으로 매출에 피해를 입고 있다’고 답했다. 이 중 22%는 ‘고환율로 인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이 지난 9월 발표한 ‘중소기업 환율 리스크 분석 연구’에 따르면 국내 중소기업들의 상당수는 환율이 1% 오르면 손해는 약 0.36% 증가했다.
특히 중소기업 상당수가 원자재를 구매하면서 6개월 혹은 3개월 뒤에 결제 대금을 은행에 원화로 갚는 어음인 ‘유전스(Usance)’를 쓰고 있어 피해는 더욱 커지는 상황이다. 추문갑 중소기업중앙회 본부장은 “중소기업 입장에선 환율 상승으로 원자재를 구입했던 시점보다 더 많은 돈을 물어내게 생긴 셈”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 상당수는 환 헤지(환율 위험 분산)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도 환율 피해 확산을 부추기고 있다. 환 헤지를 할 자체적으로 관리할 능력도 없고, 그런 전문 인력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중소기업중앙회가 회원사 304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절반에 육박하는 49.3%는 환 리스크를 전혀 관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이 중 큰 이유는 ‘관리 인력 부족’으로 나타났다.
◇대기업도 ‘긴장’
단기간에 환율이 가파르게 오르자 대기업도 긴장하고 있다. 대기업 상당수는 환율 변동 보험을 드는 등 환 헤지를 통한 손실 보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지만, 환율 변동이 예측을 벗어날 정도로 크게 요동치면 이마저도 안전 범위를 벗어나기 쉬워서 예민하게 상황을 보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가 22일 국내 매출액 10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진행한 ‘2025년 수출 전망 조사’에서도 응답 기업들은 내년 전년 대비 수출 증가율이 1.4% 정도에 그칠 것으로 전망한다고 밝혔다. 수출 감소의 주된 이유로는 환율 상승으로 인한 원자재·유가 상승에 따른 가격 경쟁력 약화(11.1%)가 꼽혔다.
업종 특성상 외화 부채가 많은 기업들은 특히 걱정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3분기 실적을 공시하며 달러 표시 외화 부채만 6조8283억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당시 LG엔솔은 “환율이 10% 오르면 세전 이익이 2388억원 감소할 수 있다”고 공시했다.
철강, 석유화학 업종 등은 가뜩이나 글로벌 시장에서 중국의 저가 공세로 고전하는 상황에서 고환율로 큰 부담을 겪고 있다. 원재료 수입 비율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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