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 양

라인강의 기적을 한강의 기적으로 외2

太兄 2026. 4. 28. 21:25

◐라인강의 기적을 한강의 기적으로

재미동포 학자 양재윤 박사의 청와대 근무 18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직필 증언,

♠라인강의 기적을 한강의 기적으로~~

제가 오늘 여기 나온 것은 서독대사를 초빙해서 우리 경제개발 초기에 차관을 제공해 주고, 2차대전으로 페허가 된 독일을 다시 일으켜 부강한 나라로 만든 천금같은 경험과 지혜를 준 독일정부와 국민들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정으로 독일대사는 못나오셨지만 우리나라는 5천년 역사 이래 처음으로 가장 풍요롭고, 국민소득 3만5천불을 넘는 세계 10대에 들어가는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오늘 박정희 대동령이 탄생한지 107주년이 되는 성군의 생신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에 하늘이 내리신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은 어떻게 5천년동안이나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억압받고 수탈당해서 세계에서 가장 못살고 있는 가난한 나라를 이렇게 빠르게 부강한 선진국으로 만드셨는지 수많은 어려움을 어떻게 슬기롭게 국민의 의지를 하나로 모아 성공시켰는지 그런 우리나라를 도와준 나라는 또 어떤 나라였는지

그분의 애국 애족의 장신과 타고난 천재적인 지혜와 그리고 영웅적인 지도력을 여러분들과 함께 다시 한번 기억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합니다.

저는 1961년 5.16군사혁명정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비서실에 행정관으로 보직을 받고 공직생활을 처음 시작해서 18년동안 그분을 모시고 공직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최고회의는 혁명주최인 군장교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살기가 등등 했습니다.

그속에 민간인은 나혼자였고 혁명군 장교들은 국민복을 입은 나를 보는 눈빛은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박정희 장군은 어떻게 군사혁명을 일으킬 생각을 했고 목적이 무었이었는지 혁명과업을 어떻게 성공시켰는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어려웠던일들을 그분을 18년동안 모시고 공직생활을 했던 제가 옆에서 보고 느꼈던 세상에 잘알려지지 않은 어려웠던 일들을 다시 기억하면서 오늘 그분에 대한 애국심과 애민정신을 같이 추모하고자 합니다.

5.16 군사혁명의 배경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2번째로 제일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국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 들판에 나가 나물을 캐고 뒷동산에 올라가 소나무껍질을 벗겨다 삶아먹고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겨우 보릿고개를 넘겼습니다.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 대학을 나와도 취직할 곳이 없었습니다.
와중에 북한 괴뢰집단은 호시탐탐 무력남침을 획책하고 있을 때 우리는 돈이 없어 적을 막을수 있는 군장비도 변변치 않았고 나라는 데모천국이 되어 혼난에 빠져 있었고 군인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군장교들의 정군운동
이를 본 육군사관학교 8기생 엘리트 라고 하는 김종필, 김형욱, 오치성, 길재호, 옥창호 등 11명이 대표가 되어 당시 현석호 국방부장관에게 부패한 정군의 계획을 건의하려고 갔다가 면담을 거절당했습니다.
이에 실망을 한 대표장교들은 평화적인 방법이 아닌 부패한 민주당 정권 자체를 제거하는 거국적인 무력혁명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 5.16군사혁명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혁명거사계획을 4번이나 변경
이들은 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박정희 소장을 주군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국내외의 경제, 사회, 문화, 특히 농촌경재문제의 특수성 등에 관한 방대한 자료수집과 민족중흥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정부형태를 준비 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부산군수기지 사령관 박정희 소장을 주측으로 민족의 영원한 장래를 위해 1960년 5월 8일 군사혁명을 하기로 거사일을 정했다가 4.19 학생혁명으로 거사가 중지되었습니다.

해병대 단독 거사를 계획
4.19 학생혁명으로 거사가 중지된 후에 해병대 내에서도 군 인사에 불만을 가진 해병장교들이 제1여단장 김윤근 준장을 중심으로 해병대창설 기념일인 4월 15일 해병대 단독으로 거사를 하기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장군의 혁명계획이 진행되고 있음을 안 후 해병대 자체계획은 또 불발이 되었습니다.

5.16 한국 군사혁명
그후도 박정희 소장은 혁명 거사일을 3번이나 연기한 끝에 드디어 1961년 5월 12일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제5사단장 채명신 준장과 혁명동지회 김종필, 김형욱, 오치성, 길재호, 옥창호 등 11명을 만나 거사일을 5월 16일 새벽3시로 확정을 합니다.
이렇게 군에서 혁명거사일을 4번이나 변경하는 동안 장면 정부나 군수뇌부에는 그 기밀이 많이 알려 있었지만 드디어 올 것이 오는구나 하고 제지할 의지도 힘도 없었고 국가나 국민들은 당연한 일로 군사혁명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혁명군은 드디어 5월 16일 새벽 3시에 영등포 문래동에 있는 제6관구사령부에서 출발해서 서울로 한강다리를 건넜습니다.
마침내 혁명군은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무혈로 국가 3권을 장악한뒤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을 위원장으로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이것이 혁명정부 국가재건최고회의 입니다.

그리고 혁명제1성에서
“우리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궐기한 것이다” 고 발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는다.
UN 헌장을 준수 한다.
지금까지 사회의 부패와 구악을 일소해서 새로운 기풍을 진작한다.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 한다“.
이렇게 혁명공약을 발표했습니다.
이와같이 혁명정부의 야심찬 계획은 도탄에 빠진 국민들에게 하늘같은 희망을 불어넣개 되었습니다.

국가 3권을 장악하고 혁명에 성공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은 맨 먼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국민을 구하고 경제개발계획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우리와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John F. Kennedy 미국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Kennedy 미국 대통령은 헌정을 중단시키고 군인들이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받은 박정희 의장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원조로 먹고사는 나라에 무슨 돈을 꿔줄수 있는가 하고 박정희 의장 일행을 만나주지도 않고 문전박대를 했습니다.
미국대통령도 만나지 못한 박정희 의장 일행은 Hotel에 돌아와 가난한 나라의 설움에 복받쳐 서로 얼사안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왔다고 합니다.
가장 믿었던 미국에 가서 문전박대를 받은 박정희 의장은 가난한 나라의 설움에 목이 메었다.
고심 끝에 우리 민족역사에 처음으로 서독 상업차관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켜 신흥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서독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처럼 분단국가의 아픔과 패전의 상처를 딛고 당당하게 일어나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을 보면서 같은 입장에 있는 우리의 사정을 호소해 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전쟁의 잿더미에서 서독처럼 한강의 기적을 이뤄보자 라는 각오를 하게 됩니다.
혁명정부는 61년 11월 말 정래혁 상공부장관을 주축으로 차관 교섭단을 구성해서 서독으로 보내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런데 당시 독일어 통역을 할사람이 없었습니다.
알아본 결과 이승만 대통령시절 국비유학생으로 서독 뉘른베르크 에를랑켄대학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고 중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백영훈 박사와 연락이 되어 사절단의 통역관으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사절단이 서독에 도착은 했으나 듣도 보도 못한 가난한 나라에서 차관교섭단이 왔다고 누구도 만나주려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를 옆에서 본 백영훈 박사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2년 후에 서독 총리가 됨)재무장관과 같은대학을 나온 자신의 대학은사를 찾아가서 장관을 좀 만나게 해달라고 눈물로 호소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61년 12월 11일 우리 사절단은 마침내 루트거베스트리크 재무차관을 만나게 되었고, 그 다음날 에르하르트 재무장관을 만나서 마침내 1억 5천만 마르크(약 3,000만 Dollars) 상업차관을 얻는데 합의를 했습니다.
사절단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은행의 지급보증이 있어야 하는데 국가신인도가 없는 나라에 지급보증을 해주겠다고 하는 나라는 세계에 어디도 없었습니다.
기적적으로 성공한 차관협상이 물거품이 될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독일에 광부. 간호사 인력진출
못사는 나라의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있을 때 백영훈 박사에게 구세주 같은 독일친구가 찾아왔습니다.
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던 노동부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슈미트 라는 독일 친구였습니다.
찾아와서 하는 말이 “너희 나라는 길거리에 실업자가 널려있다고 하던데” 지금 서독은 탄광에서 일 할 광부가 모자란다.
지하 1,000m를 파고 내려가야 하는데 지열이 뜨거워서 파키스탄 터키 노동자들이 다 도망을 가버렸다.
혹시 한국에서 광부 약 5,000명 정도, 간호조무사 약 2,000명 정도를 보내줄수 있다면 이사람들 급여를 담보로 하고 돈을 빌릴 수 있다고 한다.
이말을 들은 백영훈 박사는 신응균 당시 주서독 한국대사를 찾아가 이야기를 했고 대사는 즉시 한국정부에 전문을 띄웠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바로 모집공고를 냈습니다.
그래서 1차 광부 500명 모집에 2,894명이 몰려와서 6대1의 경쟁률이 되었는데 선발자격이 2년이상 경력자 였지만 실은 30%가 대학졸업자 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연금 저축 생활비를 제외한 월급을 고스란히 고국 가족에게 송금을 했습니다.

이들이 한국에 송금한 돈은 년간 5,000만 Dollars 로 그때 우리나라 국민총생산의 2%에 달한 큰 돈입니다.
이렇게 해서 1977년 까지 독일로 간 광부는 7,932명 이고, 간호사는 1만226명 으로 집계 되어 있습니다.
독일에 취업한 광부, 간호사월급을 담보
이렇게 이들의 급여는 모두 독일 코메르크방크를 통해서 한국에 송금되었으며 코메르크방크가 지급보증을 서서 우리 민족 역사이래 처음으로 외국차관이 들어오게 되었고, 이 돈이 오늘의 경제,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종자돈이 된 것입니다.
이후에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에 국빈방문 초청을 받게 됩니다.

박정희 대통령 서독 국빈방문
서독정부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광부를 보내주고 간호사를 보낸 한국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마음으로 한국 대통령을 국민방문으로 초청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의 서러움은 다시 계속됩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대통령 전용기는 고사하고 비행기가 없었습니다.
할수없이 미국 North West 항공기를 1대 전세 계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후 미국으로 부터 항공기를 빌려줄 수 없다고 연락이 온 것입니다.
그 이유는 원조로 먹고사는 가난한 나라에 비행기를 빌려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
그래서 처음 외국초청을 받은 우리 대통령의 서독방문이 허사가 될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서독에 특사를 보내 우리나라는 비행기가 없으니 서독에서 비행기를 좀 보내줄 수 없겠는지 부탁을 한 것입니다.

고맙게도 독일정부는 그때 독일에서 홍콩을 거쳐 일본을 왕래하는 루프트항공 일반 여객기를 서울에 일부러 들려서 우리 대통령 일행을 태우고 오도록 조치를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비행기는 홍콩 방콕 뉴델리 카라치 로마를 거쳐서 28시간만에 1964년 12월 7일 서독 쾰른공항에 도착했고, 뤼브케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총리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필자가 보기에는 말이 국빈방문이지 대통령 숙소는 10평도 안 되고 수행원들은 아침에 샤워를 하면 샤워값을 별도로 내면서 여관방 같은 곳에서 잠을 잤습니다.
연도로에 걸린 태국기도 불과 20여개 밖에 안 걸렸었고, 말로만 듣던 독일의 근검한 정신을 새삼 나는 느끼게 되었습니다.
차관교섭은 급속도로 진행되어 1억5천만 마르크를 빌리기로 내부 합의를 했는데 절차상 국제은행의 지급보증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용도가 없는 우리나라에 지급보증을 써 준다는 나라는 지구상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독일정부는 궁여지책이지만 독일에 와있는 광부와 간호사가 받는 월급을 1개월간 은행에 예치하는 조건으로 당초 한국이 요구한 금액보다도 많은 3억 마르크를 차관하기로 결정을 헀습니다.
당시 서독에 취업한 우리 광부 간호사들이 본국에 송금한 총액은 년간 약 5천만 달러였습니다.
여기 교포들 중에 서독광부로 간호사로 다녀오신분들 중에 그때 제 얼굴을 지금도 기억하고 걔신 분도 계십니다.
이분들이 서독에 가서 고생한 덕택으로 얻은 차관이 종자돈이 되어서 가난했던 우리나라 경제를 재건하게 된 기초가 된 것입니다.
우리 다시 한번 이분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냅시다.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함부론 탄광회사 방문
그리고 12월 10일 우리나라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헤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독일 함브론 탄광회사를 방문했습니다.

우리 대통령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광부와 간호사 250여명은 양복과 한복을 깔끔히 차려입고 뒤스부르크 교외의 타운홀을 가득 메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단상에 올라 애국가 반주가 울려 퍼지자.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란 마지막 대목에서 여기 저기서 흐느끼기 시작했고, 대통령도 옆에 있던 육영수 여사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지하 1,000 m 까지 파고 들어가 뜨거운 지열을 받아 얼굴이 새까맣게 탄 우리 형제들, 그리고 이국만리 타국 변두리 시골병원에서 덩치가 큰 시신들을 알콜이 묻은 가제로 시신을 이리 저리 딩굴리며 닦고 있는 어린 간호사 우리 딸들의 얼굴을 본 박정희 대통령은 벅차오르는 가난의 설음에 미리 써가지고 온 연설문은 꺼내지도 못하고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열심히 합시다.
우리 후세들을 위해서도 열심히 합시다.
나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우리도 서독의 라인강 기적처럼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냅시다.
우리 대통령은 눈물을 훔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광부와 간호사들은 서독 루브케 대통령 만세를 부르며 우리 대통령을 도와 주십시오.
우리 열심히 하겠습니다.
무슨일이든지 하겠습니다.
이렇게 광부 간호사 육영수 여사 대통령이 한데 엉켜서 얼사안고 울었습니다.
옆에 있는 서독 루브케 대동령은 자기 손수건을 꺼내서 우리 대통령 눈물을 딲아 주셨습니다.
세계역사에 일국의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서 동포들을 얼사않고 이렇게 울었던 이야기는 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대통령 영부인 옷자락을 붇들고 우리 대통령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며 울며 놓아주지 않은 광부 간호사를 겨우 떨치고, 차에 올라 호텔로 가는 중에 대통령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고 옆에서 루프케 서독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계속 우리 대통령 눈물을 닦아 주시면서 

이제 그만 우세요
각하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우리 독일 국민들이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위로를 해주셨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필자는 가난한 조국을 후대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가득했던 젊은 박정희 대통령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을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12월 8일 에르하르트 서독총리와 회담을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혁명정신과 나라를 재건하려는 절절한 애국심에 감명을 받은 에르하르트 총리는 서독의 경재를 부흥시킨 경험을 토대로 몇가지 조언을 하게 됩니다.

"내가 경재장관을 할 때 한국을 두 번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한국은 산이 많던데 산이 많으면 경제발전이 어렵습니다.
고속도로를 깔아야 합니다.
독일은 히틀러가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깔았습니다.
다음엔 자동차가 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국민차 폭스바겐도 히틀러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판이 있어야 하는데 제철공장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연료도 필요하니까 정유공장도 있어야 합니다.
경제가 안정되려면 중산층이 탄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돕겠습니다.
경제고문을 보내주겠습니다.
그리고 일본과도 손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도 프랑스와 16번을 전쟁을 했습니다.
독일사람들은 지금도 프랑스에 한이 맺혀있습니다.
그렇지만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우리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을 찾아가 악수를 청했습니다.
한국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도자는 미래를 볼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오늘날 한강의 기적을 이루게 한 황금 같은 지혜와 경험을 우리 대통령한테 이야기 하면서 당초 우리가 요구했던 금액보다 더 많은 3억 마르크 차관을 조건없이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우리국민은 이 고마움을 앞으로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박정희 대통령은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캐딜락을 타고 160 킬로 속도로 달렸습니다.
미끄러지듯 달리는 차를 타고 가다가 2번이나 중간에서 차를 세우고 내려서 무릅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고 비볐습니다.
장기영 부총리를 비롯한 우리 일행들도 울면서 이를 지켜보았습니다.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독일농촌은 한폭의 그림 같이 아름다웠습니다. 너무도 잘 정돈된 정원도시 였습니다. 뛰엄 뛰엄 보이는 농가는 마치 별장처럼 아름다웠습니다.
대통령은 이것을 보고 "바로 이것이다" 하고 무릅을 쳤습니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우리도 이렇게 농촌을 가꿔야 한다"고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에서 에르하르트 총리의 경험담과 충고로 경부고속도로를 깔고, 포항제철공장을 짓고, 정유공장을 짓고, 원수로만 여기고 있었던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 해서 대일청구권자금을 받아내고, 새마을 운동을 시작해서 농촌을 근대화 시켰습니다.
독일은 이렇게 우리나라 역사이래 처음으로 돈을 꾸어준 나라이며 라인강의 기적을 이뤄서 부강한 나라를 만든 에르하르트 총리의 층고를 받아서 종자돈도 없고 기술도 없었던 우리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일으켜서 지금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 발달하게 된 것입니다.
필자는 박정희 대통령 서독방문 수행을 마치고 청와대에 돌아와서, 필자가 보고 느낀 기적같은 일들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행문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 기행문을 국회에 보내 실었습니다.
당시 국회의원들이 이기행문을 읽고 눈물을 흘린 의원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코 우리는 독일정부와 국민들의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될것입니다.
가난에 찌들은 우리 나라를 선진국으로 끌어올려 부강한 나라를 만드신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 탄신일을 맞이해서 다시 한번 그분의 업적과 애국정신을 가슴으로 추모하는 바입니다.

감사 합니다--

     민족중흥회 양  재  윤 (Ph.D. in LA)
사단볍인 한미동맹연합회
       이사장 조 성 태

 

■중국 동포 '카르텔'에 의해 장악된 요양병원 간병인들

자식에게 집 해주고 요양병원서 매맞는 노후 /김진안 전 삼성전자 중동구지역장 전무

자식에게 집 해주고 요양병원서 매 맞는 노후, 이 ‘위선의 쇠사슬’을 끊어야 한다.
필자가 코로나19 백신 후유증으로 전신마비의 사투를 벌이며 요양병원 중환자실에서 보낸 6개월은, 대한민국 노인 돌봄 시스템이 이미 ‘파산’했음을 알리는 처절한 고발현장이었다. 그곳에서 목격한 것은 국가의 방치와 가족의 무력함, 그리고 그 틈을 파고든 무소불위의 외국인 간병 인력이 만들어낸 ‘돌봄의 지옥도’였다.
현재 대한민국 요양병원 현장은 사실상 ‘간병인 중개소’에 장악되어 있다. 간병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 동포 등 외국인 인력의 실태는 가히 충격적이다. 이들은 병원 소속이 아니기에 병원의 통제권 밖에 있으며, 사설 중개소의 지휘 아래 카르텔을 형성한다.
내가 입원했던 요양병원은 간병인의 80% 이상이 중국 동포들에 의해 장악되었는데 이들의 횡포가 심하여 누구의 견제도 거의 받지 않는 무법지대와 같았다.
내가 목격한 그들은 언어 소통의 부재를 넘어, 환자를 ‘인격체’가 아닌 ‘치우고 치워야 할 업무 대상’으로 취급했다. 24시간 상주라는 명목 아래 좁은 간이침대에서 생활하며 쌓인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환자에 대한 폭언과 방치, 심지어 학대 수준의 강압적 처치로 이어졌다.

더 무서운 것은 이들이 없으면 요양병원 자체가 돌아가지 않는 기형적 구조 탓에, 환자와 가족 그리고 심지어 병원조차도 이들의 환자 학대를 목격하고도 입을 다물어야 하는 ‘을(乙)’의 처지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국가가 간병 교육과 인력 관리를 민간과 외국인 인력의 자율에 맡겨 둔 결과, 우리 병든 부모들은 생의 마지막을 낯선 이의 손에 맡긴 채 인권의 암흑지대에서 죽어가는 중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 비극의 뿌리에는 한국 특유의 기형적인 주택 점유 구조인 ‘전세 제도’와 ‘자산 대물림’이 있다고 본다. 대한민국 부모들은 평생 일궈온 전 재산을 자식의 주택 마련을 위한 목돈으로 상납한다. 자식은 그 돈으로 전세를 끼고 집을 사며 ‘부동산 계급’에 올라타지만, 그 대가로 부모의 노후 금고는 텅 비어버린다.

심지어 일부 여유 있는 부모는 자식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준다는 명목으로 대치동 과외와 해외유학 등 최상의 교육을 제공하며 자식을 위해 무리한 투자를 감행했다. 마지막 순간에 또 자식들 결혼에 최소한 전세자금을 마련해주며 노인이 된 부모들은 겨우 남은 자산마저 소진하다 보면 노후에 자신의 간병비조차 감당이 어려운 거의 파산상태에 이른다. 이것이 자식교육과 자식의 주택 마련을 위해 평생 헌신한 보통 부모들이 겪는 일반적 현실이자 결말이다.
이제 우리는 역설적으로 ‘월세 제도의 보편화’를 환영해야 한다. 전세가 사라지고 월세가 정착되는 것은 단순한 주거 트렌드의 변화가 아니다. 이는 부모가 자식에게 목돈을 빼앗기지 않고, 자신의 자산을 평생 직접 통제하며 ‘현금 흐름’을 쥘 수 있는 경제적 독립의 기회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대한민국에서 월세제도의 정착은 노인들의 노후 독립선언이요. 자식 주택문제로부터의 노예해방과도 같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자식이 대학을 졸업하여 독립하고도 일부 부유층을 제외하고는 부모가 자식의 주택까지 책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웬만한 부유층 자식들도 그런 생각조차 품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서구사회는 오래 전부터 월세제도가 정착되었고 국가적 차원에서 '리버스 모기지'나 저리의 장기 주택담보대출이 제도화되었던 덕택이다. 서구 젊은이들은 대학 진학과 함께 등록금은 지원받을 망정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사회에 진출해도 스스로 임대주택에 들어가 사는 것을 당연시한다.
자식에게 유학자금까지 지원하고 주택 자금을 대주느라 ‘노후 파산’을 선택한 부모들이 병든 노후에는 결국 자식의 눈치를 보며 요양병원으로 실려 가는 비극은 이제 멈춰야 한다. 월세 시대는 자식에게는 ‘부모 찬스’라는 허황된 기대를 버리고 자기 힘으로 주거를 해결하게 하며, 부모에게는 묶여 있던 집값을 유동화하여 당당하게 고품격 전문 간병 서비스를 선택하고 구매할 수 있는 ‘구매력’을 선사한다. 자산이 있는 노인이 남은 자금으로 자신의 간병과 존엄을 지키는 것, 이것이 자식의 짐을 덜어주고 부모의 품격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병든 노인이 품격을 지키며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려면, 더 이상 ‘자식의 효도’라는 희망 고문에 기대서는 안 된다. 이런 기대는 오히려 부모와 자식관계를 소원하게 만든다. 부모는 부모의 의무인 자식의 대학교육까지는 책임지지만 그 이후에 더 이상 해줄 생각을 버려야 하고, 대신 부모도 자식의 효도나 노후봉양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간간히 찾아오는 며느리, 그리고 손주에게 용돈을 쥐어주는 여유 있는 노후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노후와 간병은 본인의 재산으로 스스로 책임져야 하고 부모가 사망한 후 남는 재산이 있다면 자식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물론 재산이 아주 많은 부모나 스스로 노후를 책임지지 못해 국가의 지원에 전적으로 기대해야 하는 부모는 별개의 이야기다.
노인의 노후독립을 위해 다음의 제언을 한다..

첫째, 부모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자산을 자식에게 넘기지 말아야 한다. 주택연금을 통해 집을 현금화하고, 그 현금으로 외국인 간병인의 횡포를 감시할 수 있는 전문적인 맞춤형 돌봄을 스스로 계약해야 한다. 수백억 원을 보유했던 자산가 할머니가 전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준 후 자신이 살던 저택에서 쫓겨나 14평 아파트 전세에서 전전하며 쓸쓸히 생을 마감한 경우를 실제로 목격했다.

둘째, 정부는 외국인 간병인에 의존하는 현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간병인을 국가 자격화하고, 이들을 병원이 직접 고용하도록 법제화해야 한다. 간병 범죄나 학대 이력이 있는 인력은 영구히 시장에서 퇴출하는 강력한 관리망이 필수적이다.

마지막으로 존엄은 돈과 권리에서 나온다
내가 경험한 요양병원은 ‘현대판 고려장’ 그 자체였다. 부모의 재산을 미리 가져간 자식들은 바쁘다는 이유로 면회조차 뜸해지고, 무법과 횡포에 방치시킨다. 돈 없는 부모는 외국인 간병인의 거친 손길에 몸을 맡긴 채 눈물로 밤을 지샌다. 그리고 결국 어느 날 주변에 아무도 없이 외로이 숨을 거둔다.
요양병원에서 방치된 노인들은 병으로 죽기보다는 외로움과 서러움으로 생을 포기하여 죽는다. 내가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같은 병실에 있던 3명의 노인들이 그렇게 외롭게 저세상으로 떠났다..자식들은 오후 늦게 부모의 시신을 인수하러 나타났다. 그동안 그들의 시신 곁을 지킨 것은 같은 병실에 있던 우리 환자들이다.

전세의 종말과 월세의 확산은 우리에게 고통이 아닌 ‘노후의 독립’이라는 선물을 줄 것이다. 자식의 주택 부담을 부모가 짊어지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그 자산으로 자신의 노후를 사고, 자신의 존엄을 계약하라. 자식에게 집을 물려주는 대신 ‘자립하는 부모의 뒷모습’을 물려주는 것, 그것이 초고령사회를 맞이하는 대한민국의 노인들의 마지막 생존 전략이다.

 

<업>

사람은 태어나 ‘길(道)’을 갑니다.
‘인생’이라 합니다.
사람은 길을 가며 ‘업(業)’을 짓습니다.
‘인과’라 합니다.

‘바른 길(正道)’을 가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욕심과 습관으로 ‘굽은 길(曲道)’을 갑니다.
거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좋은 업(善業)’을 지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어 ‘후회할 업(惡業)’을 짓습니다.
거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기위 같은 길이라도 굽은 길이 아니라 ‘바른 길’을 가야 하고,
기위 짓는 업이라도 후회할 업이 아니라 ‘좋은 업’을 지어야 합니다.
하여
무엇이든 ‘떳떳이 행하는 것’을 ‘도(道)’라 하고,
무엇이든 ‘은혜가 나타나는 것’을 ‘덕(德)’이라 합니다.

그래서
도덕(道德)
도덕(道德) 하는 겁니다.
걸릴 것 없이 떳떳이 행하고(自由自在),
행하는 대로 은혜가 나타나는 것을(步步一切 大聖經) ‘도덕’이라 합니다.

그것을
‘궁극적 자리’라 하여 ‘태극(太極)’이라 하고,
‘모두 조화를 이룬 상태’라 하여 ‘태화(太和)’라 합니다.

‘그리하는 사람’을 ‘깨달은 사람’이라 하여 ‘부처(buddha)’라 하고,
‘둘이 아닌 사람’이라 하여 ‘하나’라 합니다.
‘절대적인 것’을 ‘진리(眞理)’라 하고, 인격적 신으로 표현하니
‘부처님’이라 하고,
‘하나님’이라 합니다.
모두 같은 말입니다.

물론 걸릴 것 없이 떳떳이 행하는 것과(自由自在)
내 뜻에 의해 마음대로 하는 것은(自行自止)
판이하게 다르고, 행하는 대로 은혜가 나타나는 것과(步步一切 大聖經)
어떤 힘을 써서 공덕을 삼는 것도(他力的 偶像化) 판이하게 다릅니다.
걸릴 것 없이 떳떳이 행하고(自由自在),
행하는 대로 은혜를 나투는 사람을(步步一切 大聖經) ‘부처’라 합니다.
흔들림 없는 ‘신념’과, 오직 해야만 하는 ‘의무’와, 베풀고 품는 ‘자비’로 업을 짓기 때문입니다.

반면 내 뜻에 의해 마음대로 하고(自行自止),
엉터리인데도 고집 부리며 사는 사람을(自己合理化) ‘중생’이라 합니다.
나만 높이려는 ‘명예’와, 내 것만 요구하는 ‘권리’와,
나의 이익만 쫓는 ‘이욕’으로 업을 짓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명예와 권리와 이욕에 평생 ‘방황’이요,
‘부처’는 낮추고 놓는 것 같으나 저절로 ‘돌아’ 옵니다.

우리!
‘어떤 길’을 걷고,
‘어떤 업’을 지으며 사십니까?

우세관교무님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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