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부, 호남은 반역향(反逆鄕)이 아니다 -
호남이 반역의 고향이라는 말은 '훈요십조 차령이남 배역지'를 바탕으로, 이를 구체화시킨 말이다. 거기에는 당쟁(黨爭)이 개입한다. 조작이 또다른 조작을 낳기 시작한 것이다.
호남이 반역향으로 지목된 것은 조선 선조 때의 일이다. 바로 1589년 일어난 정여립 사건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현대의 사가(史家)들도 인정하지 않는 반역사건이다.
그러니까 당파에 밀려난 정여립이 황해도에서 사람들을 모아 대동계를 만드는데, 당시 황해도 감사가 이를 모반으로 고변한 것이다. 임꺽정이 토벌된 후, 민심이 흉흉한 시절이라 이를 속히 받아들인 선조는, 정철을 비롯한 모략가 송익필과 서인들을 동원하여 기축옥사를 일으킨다. 임진왜란 3년 전의 일이었다.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죽었는지 모른다. 무려 1000여명의 선비들이 죽는다. 만약 이들이 살았다면, 임진왜란 전투가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란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수많은 선비들과 김덕령 장군 이하 남명 조식 선생의 수제자마저도 죽임을 당한다.
그뿐이랴. 광산이씨 문중의 원한은 하늘을 찌른다. 이발과 그 형제들은 물론이거니와 82세 노모마저 무릎 위에 다듬잇돌을 놓아 압슬형으로 죽인 일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공분(共憤)할 일이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이 누구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후 선조는 호남을 '반역향(反逆鄕)'으로 지정한다. 그리하여 호남 출신 인재 등용은 물론 작은 벼슬마저도 제외시킨다. 조정이 그러하니 일반 백성들도 이런 분위기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조선 조정에서 호남 인재의 맥은 끊긴다. 그리고 천대가 시작되었다.
그 통탄할 일이 300년을 이어간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기록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는 호남인들의 처절하고도 헌신적인 호국투쟁을 기록하고 있다. 전라좌수사로써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명량대첩의 신화적인 승리까지 호남인들은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이순신 장군은 이를 가감없이 난중일기에 기록한다.
왜장 중에 이시다 미쓰나리란 인물이 있다.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패하고, 히데요시 가문의 멸족을 앞당긴 인물이다.
이 인물이 권율장군의 행주대첩 당시 행주산성을 2회에 걸쳐 공격하였다. 그러나 두번 다 패퇴하고 나자, 곁에서 왜장들이 이를 위로한답시고 한 말이 있다.
"장군, 저들은 전라도 병력입니다.“
권율은 전라도 관찰사였다. 그리하여 권율을 따라온 수많은 전라도 사람들이 행주산성 전투에 임하였다. 그리고 대첩을 이루었다. 일본군들이 이길 수 없음을 자인했던 호남 장졸들의 힘이었다.
호남을 배역지 반역향(背逆地 反逆鄕)이라 낙인을 찍은 선조는, 종전 후 승리를 축하하는 잔치에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들을 단 한 사람도 부르지 않았다. 의주로 피신할 때 말고삐를 잡았던 천한 노복(奴僕)들도 치하를 받았던 자리였다.
이 정도였으니, 선조가 호남 백성들의 공을 단 한번이라도 생각했겠는가. 오히려 반역향이라는 누명만 씌웠을 뿐이다. 그리고 호남인의 출사(出士)길을 막았던 것이다.
비겁하고 무능했으며, 도량조차 협소하여 왕의 그릇일 수 없는 인물이 역사에 '호남반역향'이라는 크나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이 상처 또한 훈요십조의 영향력이 컸다고 생각한다.
이에 '부산포 해전'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1592년 10월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의 본진이 있는 부산포로 배를 몰고 나아갔다. 무려 왜선 100여척을 태우고 있을 때, 쇠뇌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쇠뇌는 일본군이 사용하지 않는 무기였다. 오직 조선만의 무기였다. 그렇다면 누가 이 쇠뇌를 쏘았겠는가.
결국 이 전투에서 정운 장군을 비롯하여 다수의 장수들이 전사한다. 이에 대한 이순신의 한탄이 난중일기에 사실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하였으니, 어찌 호남이 반역향이겠는가.
부산포는 이순신 장군이 진격을 꺼려한 유일한 곳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다시 부산포 진격을 명한다. 왜군의 본진을 치라는 것이었으나, 그에 따른 위험이 너무 큰 곳이었다. 왜군들이 본진을 방어하기 위해 대책이 철저하게 준비된 곳이었다. 또한 이순신은 1차 부산포 해전에서 쇠뇌를 쏘던 조선인들을 잊지 않았다. 비록 포로가 된 조선인들이라 하지만, 다시 또 부산포로 향한다면 그들로부터 쇠뇌를 맞을 것이 분명하였다. 명령을 받들지 않자, 선조는 이순신을 잡아들여 모진 형벌을 가한다. 의주에서 하늘만 바라보던 무능한 인간이 저지른 대참사였다.
그리고 원균으로 하여금 부산포로 진격할 것을 명하였으니, 조선해군이 1597년 7월 16일 칠천량에서 전멸을 당하는 치욕을 겪는 것이다. 다시 이순신을 내려보낸 선조. 그에게도 자존심은 있었는가. 이순신에게 곧바로 벼슬을 주지 않고 백의종군을 시킨다. 벼슬 없는 몸으로 그 먼 남도길을 걸어오던 이순신의 뒷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신이 내린 결론을 쉽게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무슨 시비꺼리를 집어넣어서든 주장을 관철시키려 한다.
임진왜란을 극복하고자 의병에 나선 의로운 선비들이 있었다. 율곡 이이의 제자부터 중봉 조헌, 남명 조식의 문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선비들이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퇴계 이황의 제자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이황이 추구한 허구적인 성리학의 세계에 빠져든 결과였다. 이것이 영남학파의 실체일 것이며, 국난을 당할 때마다 나타나는 비겁한 자들의 본모습일 것이다. 그러므로 퇴계 이황은 율곡 이이처럼 존중받을 인물이 절대로 아니다.
그런 이황이 오늘날 대한민국 지폐에 그려져 있는 것은 현대로 이어온 영남학파의 영향력 때문이라 믿는다. 소위 훈요십조를 조작했던 최승로 최제안 등 신라계열의 후신들이었던 것이고, 이황 이후 영남학파로 이어진 이들이 조선 학문의 주류가 되어 호남 천대와 멸시를 주도했다고 보아야 한다.
조선조 때 반란은 연이어 일어난다. 태조를 따르던 '조사의 난'부터 '진주민란'까지 헤아려보면, 20여차례에 이른다. 그러나 정여립은 군사를 일으킨 적이 없다. 또한 관청을 습격한 적도 없다. 반란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호남 반역향이란 오명(汚名)은 타당하지 않다. 당시 당쟁을 주도한 실권자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정략적으로 정여립을 이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후일 송강 정철은 귀양지에서 굶어죽는다. 그가 굶어죽었다는 기록에서, 우리는 천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음은 호남 유배지(流配地)에 대한 조롱이다. 선조 이후 호남 반역향이란 분위기가 경기와 영남을 중심으로 확산되면서,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정권에서 밀려난 귀양객들이 호남으로 집중된다. 이는 귀양객 같은 귀찮은 존재들을 떠넘기고자 하는 조정의 의도였을 것이지만, 이 귀양객들로 인해 호남이 반역향으로 불리우는 일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
당시 귀양객들을 받아들일 만한 여력이 없는 고을은 상소를 올려가며 반대하였었다. 서포만필의 저자 서포 김만중이 거제도로 귀양갔을 때, 거제군수가 그렇게 장계를 적어올렸다. 고을이 가난해서 귀양객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의 상소였다.
귀양지 처소를 지키는 군졸을 세워야 하고 식량과 땔감을 대줘야 하는 등 필요한 물품이 어디 한두가지겠는가. 아프면 죽도록 놔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귀양도 자기 돈으로 가야했던 시절이었다. 귀양 간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아들 중 하나는 반드시 귀양지로 따라오기도 했다.
그러나 물산이 넉넉하고 인정 많은 호남인들은 이들을 차별없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귀양문화를 꽃피웠다. 다산 정약용이 그러했고,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이 그러했다. 그 무렵 우리의 다도가 해남 대흥사에서 초의선사의 손에 의해 완성되었다.
나라가 풍족하지 못해 거둘 수 없는 귀양객들을 받아들여, 귀양문화를 꽃피운 호남인들은 간사하고 경박하다는 말에 조소(嘲笑)를 떠올리곤 한다. 그리하여 호남인들의 그 쓰디쓴 비웃음이 1000년을 이어갔다는 점 잊지 말라.
그러나 호남인들의 한(恨)은 더욱 깊어진다. 훈요십조와 풍전세류 해석의 악의적인 행태가 일반화되는 과정을 겪기 때문이다.
2024. 1. 24. 전라도에서 시인 정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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