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수렁'에 빠진 李대통령... 1500원 방어용 실탄 부족
[김기훈의 생각]
환율 상승에 정부 대책 백약무효
방어용 실탄인 외환보유액도 태부족
달러 확보 서둘러 외환방어막 재건해야

이재명 대통령이 ‘환율 수렁’에 빠진 모습이다. 정부가 연일 고환율 대책을 내놓으며 금융기관·기업·국민연금을 압박하고 있지만,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1달러당 1500원을 향한 진군을 멈추지 않고 있다. 수출기업이 달러를 계속 벌어오고 있으나 기업·개인투자자·국민연금 등의 해외투자 수요는 여전히 많다. 정부도 미국에 매년 200억달러 정도 투자금을 보내야 한다. 환율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외환 트레이더들은 향후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1달러당 1500원대를 넘어설 가능성이 높다는 쪽에 판돈을 걸고 두둑한 성과급을 고대하고 있다. 시장 심리의 쏠림 현상을 막아야 하는 정부는 큰 효과 없는 대책만 나열하면서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외환 문제는 국가부도와 관련된 매우 민감한 사항이라서 모든 정부가 공개 언급을 삼가고 극비리에 외환보유액을 동원해 대응책을 시행한다. 한국 정부가 비밀 작전을 포기하고 이처럼 공개 대응에 나선 것을 두고 이미 3차 외환위기 상황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정부가 장부상 4300억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액을 갖고 있으면서도 시장 쏠림을 막지 못하자 정부 작전의 실탄인 외환보유액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왜 그럴까?
외환보유액의 최종 용도
1차 외환위기가 발발한 1997년 11월 재정경제원(기획재정부의 전신) 외환 당국자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단기금융회사와 수입업체들이 달러를 구하려 서울 외환시장에 맹수처럼 몰려들었으나 공급되는 달러가 없었다.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매일 오전 개장하자마자 당시의 가격변동제한폭(상한가)까지 뛰어올랐다. 이러한 비상 상황에서는 정부가 외환보유액을 시장에 풀어 달러를 공급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도 달러가 바닥났다.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고 있다는 사실이 해외에 알려지자 미국 농산물 수출업체들이 대책회의를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 정부의 지급보증을 믿지 못하겠으니 달러 현금을 들고 오는 한국업체에만 곡물을 수출하자는 내용이었다. 중동의 석유 수출업자에게도 이러한 움직임이 번질 기세였다. 한 외환 당국자의 머릿속에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얼굴이 그려졌다고 한다. “만약 곡물을 수입하지 못해 음식을 구할 수 없다면? 석유를 수입하지 못해 전기 생산이 끊기고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도중에 멈추어 등교하던 아이가 그 속에 갇히면? 혹시 전쟁이 날 경우 전투기 연료는 어떻게 공급해야 하나?” 국가부도라는 벼랑 끝에 서자 그의 머릿속에 정부 외환보유액의 최종 용도가 명확하게 나타났다. 곡물과 석유 등 최소한의 생필품 수입과 수출업체들의 원자재 수입을 위한 ‘달러 배급’이 최종 용도였다. 그 밖의 기업은 부도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난파선 구명정에 모든 승객을 태울 수는 없다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부족한 외환보유액을 늘리기 위해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이후 외환보유액 확충에 전력을 기울였다. 외국인 투자를 막아놨던 한전과 포스코 같은 알짜 공기업에 외국인 투자를 허용했다. 외국기업의 한국 내 공장 설립을 유도하면서 달러 유입을 늘렸다. 비상시에 징집할 ‘제2의 외환보유액’ 확보에도 나섰다.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를 적극적으로 늘리고, 한국투자공사(KIC)를 설립해 달러 자산 불리기에 나섰다. 한국을 달러 부채보다 달러 자산이 많은 나라로 바꾸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겪은 2차 외환위기 때에도 정부는 외환 보유액을 지키는 데 최우선 목표를 뒀다. 환율 급변동을 막기 위해 수백억달러의 외환보유액을 중간중간에 쏟아부었지만 ‘배급용 달러’가 위험해질 때는 환율 상승을 용인했다.
日·中에 턱없이 못 미쳐
두차례의 외환위기를 체험하면서 정책 당국자들은 외환위기 재발을 막기 위한 외환보유액의 적정 수준에 대해 많은 논의를 했다. 단기외채, GDP(국내총생산), 무역량 등 많은 변수가 거론됐지만, 1차 위기 때의 체험에 따라 ‘1년(12개월)간 수입액(상품·서비스)+α’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정부가 1년간 달러 배급을 통해 필수 소비재와 서비스, 수출업체의 원자재 수입을 유지해주면 그 사이에 수출업체들이 수입 원자재를 가공해 다시 달러를 벌어와 경제가 유지될 수 있다고 봤다. 또 환율의 급변동을 미세조정하기 위해 추가로 α달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이러한 기준에 적합할까?

세계은행과 각국 중앙은행의 통계를 보면, 일본의 경우 2024년 상품과 서비스 수입은 9520억달러였다. 반면 지난 11월 말 현재 외환보유액은 1조3594억달러로 17개월분의 수입액에 해당한다. 중국은 2024년 수입액이 3조2193억달러인 반면, 지난 11월 말 현재 외환보유액은 3조7236억달러로 수입액의 약 14개월분이다. 한국의 경우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지난 12월 현재 외환보유액 4307억달러는 2024년 수입액 7555억달러의 약 7개월분에 불과하다. 일본 수준이 되려면 1조780억달러, 중국 수준이 되려면 8760억달러가 되어야 하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한국은 일본처럼 달러채권 발행이 쉬운 기축통화국이 아니다. 중국이 가진 세계 1위 수출대국이라는 이점도 없다. 외환 전문가들은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달러 배급’ 수준(12개월 수입분)에도 못미치는 점을 들어,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외환시장 안정 조치는 실탄 부족으로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본다. 중국이 몇년전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외환 헤지펀드들의 공격을 외환보유액을 대량 써가며 패퇴시켰던 승전보를 한국에서 기대하기 쉽지 않다고 말한다.
외환보유액 확충 시급
한국의 이번 환율위기는 미국이 요구한 3500억달러 투자와 국내 투자자들의 해외 주식 투자 러시 때문에 불거졌다. 한국은행의 국제수지표를 분석해 보면 기업들은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 중 해외 투자 등에 필요한 일부를 회사 내에 유보한 뒤 나머지를 외환시장에 팔고 있다. 그리고 국내 주식투자자와 국민연금이 기업이 판 달러와 국내 은행에 예금되어 있던 달러로 미국의 주식과 채권을 매입하고 있다. 예컨대 올해 1∼10월 해외의 주식과 채권을 사들인 규모가 사상 최대인 1171억달러에 달하면서 같은 기간의 경상수지 흑자 폭(896억달러)을 크게 웃돈다고 한국은행은 설명한다. 수출기업이 수출대금으로 받은 달러를 원화로 환전하지 않고 갖고 있으려는 경향도 환율위기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1차 외환위기 당시 미국이 한국의 자본시장을 완전 개방시킨 이후 내국인의 해외 투자를 막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외환거래 통제를 재개할 경우 한국경제가 1990년대로 퇴행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업이나 금융회사의 팔을 비틀던 관치금융 시대도 이미 지났다. 결국 정부가 의지할 수단은 든든한 외환보유액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한 외환 전문가는 “정부가 외환보유액을 1조달러 정도 갖고 있었다면 구두 개입만 해도 쏠림 심리가 진정되면서 시장에 달러가 쏟아져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해외투자가 늘면서 외환방어막이 취약해졌기 때문에 외환보유액 확충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단기간에 확충할 수 있는 비상대책으로는 ①해외 주식 양도세율 대폭 인상으로 해외 투자금의 국내 환류 유도 ②금리 인상을 통한 해외 자본 유입 촉진 ③외국과의 통화 스와프(교환) 확대를 꼽는다. 장기 대책으로는 ④공기업 매각 ⑤해외기업의 국내 직접투자 유치 ⑥중동과 중남미 등 새 수출시장 개척 등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중 많은 대응책이 이재명 대통령의 돈 풀기, 큰 정부, 포퓰리즘 정책 방향과 상충돼 실현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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