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진이 <제31話>
늦은 아침을 먹던 선비들이 무엇에 놀란 듯이 일제히 초당 쪽으로 몰려갔다.
초당 옆엔 화담 연못이 있다.
못의 동쪽으로 금강송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으며 나무 밑엔 이름 모를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리고 그 꽃들 중앙에 널따란 바위가 있다.
지금 그 바위 위에서 화담 스승이 학춤을 덩실덩실 추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그 모습을 보려고 몰려갔다.
화담이 학춤을 출 때엔 새 격물치지(格物致知 : 중국 사서의 하나인 대학에 나오는 말로 사물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여(격물) 지식을 넓히는 것(치지))로 새로운 지식을 얻었을 때 기쁨을 못 이겨 추는 춤이다.
20평 남짓 넓이의 바위 위에서 하늘로 훌쩍 날아갈 듯 두 팔을 벌려 껑충껑충 뛰어 비상했다가 아래로 내려올 때에는 두 손을 흔들어 급격하게 떨어짐을 예방하기 까지 하였다.
흰 수염이 학의 깃털처럼 펄럭이었으며 나비 날개같이 금방 부서질 듯한 흰 옷들의 펄럭임이 학의 두 날개로 보였다.
진이가 맨 앞에 섰다.
선인(仙人)의 춤이다.
진이의 손에는 어느새 거문고가 들렸다.
손이 춤에 맞추어 현란하게 움직이었다.
화담의 학춤의 동작이 바뀔 때마다 거문고의 음률과 진이의 노래도 변화되었다.
흥에 겨워 춤에 몰입한 화담은 제자들이 모두 나와 춤을 구경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을 게다.
화암(花岩 : 필지 작명) 주위엔 마치 병풍처럼 둘러있는 백양나무들로 앞이 확연히 내다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진이까지 나와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 장면을 상상도 못할 터다.
사실 화담은 진이가 자신의 문하로 들어오는 자체를 마뜩해 하지 않았다.
사내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에 홍일점이 들어오면 분위기 흐릴까 걱정이 앞서서다.
그것도 보통 여자가 아닌 천하의 재색(才色) 황진이가 아닌가!
그 같은 화담의 마음을 꿰뚫은 진이는 더욱 언행이 정제되었다.
평상시엔 오누이 같은 분위기의 허엽과 얘기를 주로 하며 스승과 대화엔 학문 외엔 입을 일체 다물었다.
‘시냇가 초가집에 한가로이 사노라니/
달 밝고 바람 맑아 흥이 절로 난다./
바깥손님 오지 않고 산새만 우짖는데/
대 숲에 자리 옮겨 누워서 책을 본다.’
고려 말 삼은(三隱 : 포은 정몽주.목은 이색.야은 길재)의 한 사람인 길재(吉 再·1353~1417)의 《뜻을 펴다》를 염두에 둔듯하다.
지금 학춤을 추고 있는 화담이 길재의 마음과 유사할 것이라고 진이는 보고 있는 것이다.
진이는 이따금씩 화담과 특정 주제에 대해 날카롭게 토론을 벌렸다.
그럴 때마다 화담은 귀찮다는 기색 없이 결론이 나올 때까지 상대하여 주었다.
그럴 때마다 화담의 표정엔 기쁨의 무지개빛이 얼굴 전체에 환하게 피어나기도 하였다.
여자라고 문하에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큰 후회를 할 뻔 했다는 표정이다.
한 번은 정치에 대해 물었다.
화담은 명분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라 갈파하였다.
그는 개성이 다 다른 문하생들에게 그들의 학문에 맞춤옷 같이 학문의 세계를 가르쳤다.
배움에 뜻이 깊은 응길(應吉:홍인우 자字)에게는 《소학》(小學)을 논했고 화살 맞아 다친 새의 가련한 신세를 꼭 되갚아 주겠노라 안타까워한 태휘(太輝:허엽 자字) 한테는 《근사록》(近思錄 : 중국 송나라 때에, 주자와 그 제자인 여조겸이 함께 편찬한 책)으로 마음을 다스리라 하였다.
화담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뻔히 알면서도 멀찍이 떨어져 있으며 신선놀음을 즐긴 듯하다.
여러 번 출사할 기회가 있었으나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속세의 물결에 물들지 않으려는 신선의 마음일 게다.
그는 잠시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이승에 휴가 왔다 갈 신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노니는 몸 하늘 가운데 있으니/
걷는 발길에 구름안개 밟히네./
신선공부 애쓸 것 없이/
한가한 마음으로 세월 보내네.’
화담의 《산놀이》를 불현 듯 떠올렸을 것이다.
화담은 때 묻지 않은 주기론의 비조(鼻祖 : 어떤 학문이나 기술 따위를 처음으로 연 사람)이며 조선 최고의 지성으로, 진이 자신은 속세에 찌든 여인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화담에 들어왔음이 후회되기도 하였다.
청정지대에 있는 유생(儒生)들에게 누가될까 온몸이 고슴도치처럼 움츠려 들었다.
그래서 진이는 허엽과 박지화 외에는 우연히 만나게 되면 고개를 끄덕 인사를 할 뿐 의도적으로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허엽과 박지화는 진이가 밥 짓고 빨래하는 것이 안타깝다며 스스로 도와주어 어쩔 수 없이 눈만 뜨면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허엽(1517~1580)은 여섯 살 아래고 박지화(1513~1592)는 두 살이 적다.
세속적이고 생물학적으론 서로 그리워 할 대상이다.
천하재색 진이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와 눈만 뜨면 볼 수 있는 거리에 있으니 이 얼마나 하늘이 준 기회가 아닐까?
진이 자신도 문득문득 욕정이 꿈틀댈 때면 허엽이 이사종으로 보이고 박지화는 벽계수로 보여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진정 시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두 사내도 마찬가지다.
화암에 가서 빨래하는 진이를 보면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토해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빙그레 웃음을 지어보였다.
양팔을 걷어붙이고 치마를 무릎까지 추켜올리고 빨래하는 진이의 모습을 멀찌감치 뒤에서 보고 있는 두 사내의 표정이다.
마음 같아서는 한걸음에 달려가 끌어안고 사내역할을 하고 싶을 게다.
그들은 진이의 유혹에 넘어가 30년 벽면 수도승 지족선사가 하룻밤 운우지락으로 파계하였다는 소식을 알고 있다.
헛기침을 서너 번 한 허엽이
“그만 내려갑시다. 내려갔다가 빨래가 다 되었을 즈음 다시 올라옵시다.”
라고 말을 하면서도 그의 뜨거운 시선은 실팍한 진이의 엉덩이에 가 있었다.
“예 그렇게 하시죠!”
박지화의 뜨거운 시선 역시 뭇 사내들의 욕망을 채워주었던 터질 듯 볼륨이 있어 보이는 엉덩이에서 아쉬운 시선을 거두며 허엽의 발길을 따랐다.
그렇게 진이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뜨겁고 멀리 하기엔 너무 그리운 존재로 화담의 유생들 가슴을 휘어잡았다.
두 사내는 빨래하는 진이의 뒷모습을 목욕을 준비하는 알몸의 여인을 상상하며 운우지락을 즐겼으리라...
* 황진이 <제32話>
화담 스승은 오늘 목욕을 하였다.
1545년(명종원년) 7월7일이다.
허엽에 업혀가는 화담의 모습을 진이는 뒤따라가며 살폈다.
애벌레가 성충에서 나비가 되어 날아가고 남은 껍데기 같이 보였다.
허엽의 뒤를 따라가며 진이는 스승의 위기지학(爲己之學:자기 자신의 수양을 위한 학문)에 대한 가르침을 떠올렸다.
그는 움직임 보다 멈춤을 강조하고 마음의 정(靜)을 주로 가르쳤다.
물론 스승은 멈춰야 할 경우 세심한 상황판단을 주문했으며 동(動)을 조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고 세상의 인연을 끊고 면벽으로 생을 보내라는 것은 아니며 세상과 인연이 열리면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흔들림 없는 마음을 먼저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정암(靜庵:조광조 호)이 기묘년에 큰 화를 당한 것은 너무 크게 너무 멀리 움직이려 했기 때문이라며 더 나가고 싶을 때는 참을 수 있는 지혜를 정을 통해 배워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이라고 따끔한 충고다.
진이는 좀더 일찍 화담을 찾았을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지금 허엽의 등에 업혀가는 화담의 모습에서 세상으로 나가 천하의 도(道)를 바로 잡고 싶어 했던 그 누구보다도 배우고 익히기를 즐겼던 성인(孔子)의 모습을 느꼈다.
아마도 허엽도 자신의 등에 업혀있는 화담을 진이의 생각과 같은 마음으로 검불 같은 스승을 생각했으리라...
‘허유(許由·BC2323~BC2244, 요순시대 현인)는 억지로 요(堯)임금의 요청을 사양한 게 아니요/
성인의 조정 움직일 재주 없음을 스스로 안 것이지/
태평시대에 발 들여놓는 것은 분수에 넘치는 일이니/
홀로 더나가 자유로이 거닐며 사는 게 좋을 듯하네.’
서경덕의 《또한 수 지어 올림》을 회상해 낸 듯하다.
진이는 허엽을 동생처럼 생각하다가도 문득문득 질탕하게 살을 섞었던 이생을 떠올리곤 하였다.
특히 하루 종일 20여명에 이르는 문하생들의 밥 짓고 빨래하는 일에 지쳐 파김치가 되어 누웠을 때 번개처럼 금강산과 지리산 등을 유람하며 이생과의 스스럼없었던 장면들이 잊히지 않고 천장에 방금 있었던 일같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스승은 허엽과 진이의 모습을 오누이 같아 보기 좋다고 칭찬까지 아끼지 않았다.
부엌에서 밥 짓고 설거지를 할 때도 허엽은 동료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도와주었으며 빨래할 때도 바구니를 들어주는 등 알뜰살뜰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손이 우연히 부딪칠 때면 싱긋 웃으며 정겨운 교감이 짜릿하게 오고갔다.
두 남녀는 서로의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자칫 더 다가갔다가 속마음을 들킬까 겁이나 한치의 앞으로도 더 나가려 하지 않는다.
천재일우로 만들어진 오늘의 소중한 기회를 한여름의 번개처럼 찰나의 순간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혀를 깨무는 자제다.
스승의 불호령도 감당하기 어렵지만 눈만 뜨면 아침안개처럼 피어나는 행복을 가능한 길게 누리고 싶은 것이다.
화담은 목욕을 하고 와서 진이가 백옥같이 깨끗하게 빨아놓은 옷을 갈아입고 자리에 누웠다.
한 폭의 동양화 같다.
“스승님이 무겁지 않으셨어요?”
진이가 허엽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검불 같았소이다.”
허엽의 목 메인 목소리다.
허엽은 아마 목욕을 하는 화담을 보고 예감을 했으리라...
지상에 잠시 내려왔던 선인(仙人)이 이제 소임을 다하고 선계(仙界)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것으로 짐작한 듯한 표정이다.
진이는 허엽의 진지한 표정에서 무지개 같은 것이 떠오름을 느꼈다.
‘나이 들어 그저 조용한 것이 좋아/
모든 일에 마음을 쓰지 않게 되었네./
돌이켜 보건데 별 방책이 없는 지라./
고향에 돌아오는 수밖에요/
솔바람에 허리띠 솔솔 푸리고/
산 달은 거문고 타는 내 모습 비추네./
그대 궁통이 이치를 물으시는가./
갯가에서 들리는 어부노래 그 아니 흥겨운가.’
왕유(王維:699~750)의 《장소부(張少府)에게》를 회상한 듯하다.
진이도 문득 비몽사몽에 화담이 학으로 변해 금강송 위에 앉았다 훌쩍 날아오르는 장면을 보곤 하였다.
더욱이 꽃 못에 가서 목욕을 하고 깨끗이 빨아 놓은 옷을 갈아입고 누운 모습을 보자 그런 마음이 들었다.
우연이겠으나 허엽과 진이의 마음에 똑같이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여자는 남자를 ‘너는 내 사내야’ 라고 마음먹었고 남자는 ‘너는 내 여자야’하는 속내가 일어나고 있었다.
더욱이 화담이 병석에 눕자 곁에서 같이 수발을 들자 부쩍 더 가까워졌다.
바늘 가는데 실 가듯 그들은 부엌에서부터 빨래터에 가는 길까지 잠자리에 들기 전엔 떨어지는 경우가 없을 정도다.
박지화 등 여타 문하생들은 서책을 놓고 여가를 즐길 때는 예외 없이 진이와 허엽얘기다.
“쟤네들 부부 같아! 벌써 무슨 일 있었겠지?”
라고 수군대다가도 진이가 둥굴레차를 가지고 가면 시치미를 떼고 격물치지 얘기를 했었다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눈치 빠른 진이가 그런 분위기를 모를리 없다.
하지만 진이는 그런 정도의 분위기에 동요를 느낄 그녀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사내들의 끈적끈적한 시선이 궁둥이와 불룩 나온 앞가슴에 와 있음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허엽도 같은 마음일 터다.
화담의 병수발을 핑계로 천하의 재색인 진이와 지근거리에서 호흡을 같이하다 어쩌다 손발이 부딪히면 아픔은 잊고 가슴이 뛰는 흥분의 기분에 들떠 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남녀 간의 오묘한 마음이 오갔을 것이다.
이미 그들은 육체는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한 곳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스승의 병 수발을 신명나게 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부부 이상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듯해 보였다.
오후가 되자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아침 꽃못으로 바람을 쐬러 나갔던 문하생들이 빨래를 걷어가지고 왔다.
진이와 허엽은 방문턱에 나란히 앉아 그들을 맞았다.
하늘에선 천둥번개가 요란하게 치자 진이와 허엽은 한 몸같이 동시에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 황진이 <제33話/마지막회>
서경덕이 없는 화담은 꽃이 없는 정원과 같다.
꽃이 하나둘 사라지자 날아오던 벌 나비도 날아들지 않는다.
사시사철 피고 지던 꽃들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추었다.
정원에 꽃이 사라지는 것도 쓸쓸한데 문하생들마저 하나 둘 화담을 떠나갔고 허엽과 진이만 덜렁 남은 어느 늦가을 오후다.
진이도 스승을 잃은 슬픔이 하늘에 닿았는데 허엽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도 그럴 것이 20여명의 문하생들 중에서 가장 높은 사랑을 받았었다.
그러던 중 진이가 들어온 후 진이에게 사랑의 일부가 빼앗기긴 했으나 허엽을 석가가 가섭(迦葉·한자음 가엽)을 아끼듯 장남 서응기(徐應麒)보다 더 믿고 의지했었다.
그래서 그는 거동이 불편할 때에는 의례 태휘(太輝·허엽의 자)등에 업혀 자리를 옮겼다.
임종 직전 꽃못에 가서 목욕할 때에도 태휘 등에 업혀 갔었던 것도 아들 등보다 편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토록 사랑을 독차지 했었던 태휘는 스승을 떠나 보내고 난 후엔 넋이 나간 모습이다.
보다 못한 진이는 그를 위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바다로 치달아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중략...
진시황은 그 옛날 평락관에서 잔치 벌일 때/
한 말에 만 냥 술로 맘껏 즐겼더라네./
여보시게 주인님 어서 돈이 모자란다 하시는가./
어서 술 사오시게나 함께 한잔하세./
오화마 천금주 따위/
아이 시켜 들고 가서 술과 바꿔오게/
우리 함께 만고의 시름 잊어나 보세.’
당나라 시인 주선(酒仙) 이백(李白)의 《장진주》(將進酒)를 떠올리며 술과 노래로 슬픔에 젖어 있는 태휘를 위로하였다.
진이는 비록 여자지만 여성 특유의 따뜻함과 호방함으로 화담뿐만이 아니라 문하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중에서도 태휘와 유독 가까웠다.
그런 그가 지금 어버이 같았던 스승을 잃은 슬픔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자 진이가 시기(詩妓) 모습으로 돌아가 술과 노래로 위로를 하여 주고 있다.
진이는 태휘와 헤어진 후 한동안 화담에 더 머물다 다시 송도로 내려왔다.
하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또 문득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을 회상하였다.
‘무슨 생각으로 푸른 산에 사느냐고요./
글쎄올시다. 웃을 수밖에요./
물 따라 복사꽃잎 아득히 흘러가는데/
이곳이 딴 세상 속세가 아니라오.’
진이가 화담에 들어올 때 사실은 공부가 아니었을 것이다.
진이의 기생 진출에 대한 두 가지 설이 있다.
이웃집 총각이 상사병에 걸려 결국 죽었는데 진이의 집 앞에 와 상여가 옴짝달싹 하지 않아 속옷을 덮어주자 떠나가 처녀가 속옷을 주었으니 순결에 흠결이 생겨 기생이 되었다는 얘기와 황진사의 딸인 사대부집에서 고이 커오다 청혼이 들어오자 서녀 주제에 소실이나 가야한다며 동생인 난(蘭)에게 청혼자리가 돌아가자 충격으로 기생이 되었다는 얘기가 그것이다.
아무튼 진이는 기생이 되었다.
숱한 사내들을 품었으나 성에 차지 않아 오매불망 마음속에 두었던 화담을 공략하였으나 실패하여 제자로 주저앉았던 것이다.
화담은 순순히 진이를 제자로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진이가 문하생으로 들어오는데 태휘의 공이 컸다.
그런 사연이 있는 그들은 같이 있으면 연인 같은 부부 모습으로 보이고 부부 같은 연인 같이 비쳐 동료 문하생들로부터 질투를 받기도 하였다.
그런 그들이 이젠 헤어져 각자 갈 길을 가고 있다.
진이도 어느새 불혹(不惑)의 나이가 되었다.
그녀가 비록 기생의 신분이었으나 학문의 수준은 어느 사대부 못지않은 경지의 수준이었다.
시·서·화 속칭 3절(三節)을 넘어 노래·거문고·가야금·춤에 이르기까지 무불통지(無不通知 : 무슨 일이든지 다 통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음)의 경지라고나 할까?
조선의 3대 여류시인이라면 이매창(李梅窓:1573~1610) · 김부용(金芙蓉:1812~1851) · 황진이(黃眞伊)를 꼽는다.
이매창과 김부용도 뛰어난 시기였으나 황진이가 단연 으뜸일 것이다.
그러하여 송도와 한양을 넘어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까지 소문이 퍼져 사신들이 오면 송도 유수에 청을 넣어 자고 가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는 풍문까지 나돌았다.
진이는 기생 이전에 국제적으로 여류시인으로 예우를 받았던 것이다.
한양의 이름께나 있는 사대부들은 송도를 찾지 않은 이가 없다. 중국과는 외교관계로 주청사(奏請使)와 접반사(接伴使)로 왔다 예외 없이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처럼 송도를 지날 때 진이를 거쳐 가는 것을 사나이들의 자랑같이 되었다.
하지만 진이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남자면 누구나 품을 수 있는 기생이지만 누구나 품을 수 있는 기생이 아니었다.
기명(妓名)인 명월(明月)처럼 하늘 높이 두둥실 떠 있는 명월을 어찌 마음대로 품을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오히려 명월이 하늘에서 내려와 마음에 드는 사내들을 뜨겁게 품었으리라...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무쳣나니./
잔(盞) 잡아 권(勸)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
임제(林悌:1549~1587)의 시다.
서도 병마사로 부임하던 길에 생전에 교분이 있던 황진이 무덤을 찾아 시조를 읊으며 명복을 빌어주었다.
사실 남녀 간의 교분은 사랑이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조선사회에서 다 자란 사내와 계집이 오가는 사이는 사랑이란 다리가 놓여있는 관계다.
임제와 진이도 그러한 사이였을 것이다.
진이의 유언은 《어우야담》에 전해진다.
“나는 살아서 성품이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소. 죽은 후에도 나를 산골짜기에 장사 지내지 말고 마땅히 큰길가에 장사 지내주오.”
라고 하였다.
현재 진이는 평양성 칠성문 밖에 있는 선연동 기생들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진이는 죽어서도 사나이들의 가슴을 끝없이 흔들었다.
‘거친 무덤에도 해마다 봄꽃은 찾아와/
꽃으로 단장하고 풀로 치마 둘렀네./
이 많은 꽃다운 혼들 아직 흩어지지 않고/
오늘도 비되고 구름이 되네.’
석주(石州) 권필(權韠:1569~1612)의 《선연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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