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 양

8회 황진이 <제15, 16話>

太兄 2023. 4. 18. 22:28

* 황진이 <제15話>

보현사를 떠날 때 진이는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다시 한 번 관음전에서 빌었다.
팔도를 두루 다닐 발길이 보현사를 다시 찾을 길이 없을 것 같았다.
두류산(頭流山:지리산의 별칭)으로 가려는 발길이다.


두류산은 산 이름부터 진이와 예사롭지 않은 산이다.
신선들이 금강산으로 가려다 두류산이 너무 아름다워 그만 주저앉은 이들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아름답고 수려한 산에 명월리(明月里)가 있다.

진이는 어젯밤 꿈에 중국 진(晉)나라 죽림칠현들을 만났다.
고려의 강좌칠현들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원조(元祖)격인 죽림칠현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들의 사창회(詞唱會)에 초청되어 고려의 청풍(淸風)을 뽐냈던 것이다.

죽림칠현들은 말로만 듣던 명월의 등장에 신선이 나타난 듯 황홀해 하며 깍듯한 칙사 대접을 해주었다.
진이는 칠현 중에도 혜강(嵇康)을 좋아하였다.
고려의 강좌칠현 중에 함순을 경모했듯이 그날 이후 진이는 수장(首長)격인 혜강을 마음속에 두었다.
진이는 두류산으로 들어가면서도 엊저녁의 죽림칠현과의 사창회 장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진이는 그들의 은둔생활이 이해되었다.
중국의 죽림칠현들을 꿈에서 본 이후 고려의 강좌칠현에 대해 궁금증이 더욱 폭발하였다.
죽림칠현이 현실정치에 혐오감을 느껴 출사하지 않고 술과 시로 세월을 낚듯이 고려의 강좌칠현 역시 무인정권(武人政權)에 대한 불신으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사실 진이도 기생이었던 시절 돈 뭉치를 들고 찾아와 자신을 첩(少室)으로 들어와 달라고 한 한량들이 수도 없이 많았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하여 돌려보냈다.
영혼의 자유를 위해서다.

금지옥엽으로 커온 진이에게 어느 날 갑자기 사대부 집에서 청혼이 들어오자 원래 신분인 서녀(庶女) 위치로 떨어져 사대부 집 소실로 들어가라고 권하자 그녀는 서슴없이 아버지 황진사와 절교를 선언하고 기생이 되었다.
진이는 지금도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 보현사를 떠나 두류산으로 들어가고 있는 자신의 삶을 진이는 절정의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금강산으로 가려던 신선들이 놀았던 산에서 자신도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였다.

진이가 명월관을 퇴기 이모 옥섬에서 임대 등으로 호구지책을 해결하라고 맡기고 유랑 길에 오른 것도 자유로운 영혼을 위해서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사내들만 사람으로 대접하고 여자들은 성적 대상 정도로 취급되는 사회 풍조에 무언의 저항이다.

그래서 진이는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중국의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의 학문과 조선의 성리학, 《삼국지》(三國志) 등 닥치는 대로 읽었다.
사실 진이의 학문세계는 율곡 이이, 퇴계 이황, 남명 조식, 하서 김인후 등에도 크게 밀리지 않을 정도의 수준에 가 있다.
그래서 그녀를 거쳐 간 사대부와 한량들은 한결같이 성적 상대로 찾아왔다 떠나 갈 때는 경모의 대상으로 가슴에 묻었다.

오후 늦게 실상암(實相庵:일명 見性庵)에 도착하였다.
사람도 말도 지쳤다.
그들은 주지를 찾아 찾아온 연유를 말하자 주지는 선뜻 방 하나를 내주었다.
그리고

“남자는 나와 같이 자고 진이 아씨는 그 방에서 주무세요.”

주지스님의 진이 아씨란 말에 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스님, 스님께서 어떻게 이 진이를 아시는지요?”

라고 다그쳐 물었다.

“아- 예... 소승은 진이 아가씨를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는데 이런 곳에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사찰(寺刹)에선 합방을 금하고 있사오니 양해하시고 남자 분은 저와 하룻밤 지내시지요! 자세한 얘기는 다음 날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진이는 밤새 뜬 눈으로 날을 샜다.

비몽사몽에도 강좌칠현에 대한 꿈을 꾸었다.
이인로의 《산거》(山居)를 중얼거렸다.

‘봄은 가도 꽃은 아직 있고/
하늘은 갰지만 골짜기는 절로 어둑하네./
소쩍새 한낮에 울고 있으니/
비로써 깨달았노라. 깊은 골에 사는 줄은....’

시 암송을 마치자 때마침 새벽 종소리에 진이가 화들짝 비몽사몽에서 깨어났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여 뻑뻑한 눈을 부비며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때

“소승 덕송(德松·가명)입니다. 진이 아가씨,  일어나셨는지요?”

라고 주지스님이 아침 예불을 알렸다.
진이는 서둘러 일어났다.
어머니의 생사를 알 수 없어 보현사에서 극락왕생을 위한 기도를 했는데 실상암에 와서도 문득 어머니 생각이 떠올랐다.

예불을 마친 덕송  스님은 진이를 따로 불렀다.

“아씨 차를 드시지요!”

잔잔한 미소에 호수같이 깊은 두 동공에 갑자기 검은 구름이 지나갔다.

“소승을 몰라보시겠는지요? 아씨가 어릴 적 사랑채에 자주 드나들던 김구덕 입니다.”

김구덕 이란 말에 진이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아저씨, 이런 꼴로 뵙게 돼서 죄송합니다!”

라고 말을 하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흡사 짐승 울음소리다.

김구덕은 진이 아버지 황진사와 죽마고우다.
젊었을 때는 황진사 집에 수시로 드나들며 진이를 며느리 삼자고 까지 했던 관계다.
김구덕은 황진사와 달리 과거에 등과하여 한양 중앙무대에 진출하였으나 정암과 정치노선이 달라 어느 날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가장의 종적이 묘연해 지자 집안은 물론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오늘 이곳에서 진이와 극적으로 해후한 것이다.
관가에서 사방팔방으로 찾았으나 이곳까지 발길이 닿지 않았다.

“아씨 하산을 하시더라도 소승을 봤단 말은 말아주세요. 부탁입니다.”

진이는 정암과 생각이 달라 부자지간의 연을 끊은 이생의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진이와 이생은 말을 실상암에 맡기고 다시 길을 떠났다.
두류산은 깊고 넓다.
그들은 걷고 걸어 오후 늦게 지눌(知訥)스님이 불교계 개혁을 위한 결사체인 정혜사를 조직하여 운영해 온 상무주암(上無住庵)에 도착했다.
주지스님을 찾아 허기부터 해결하였다.
주지스님은 두 남자를 법당 뒤에서 잠시 쉴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단풍이 병풍처럼 둘러있어 더 할 수 없이 안락한 곳이다.
진이는 어제 밤을 뜬 눈으로 새 금방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런데 비몽사몽에 가위에 눌린 듯 숨이 차고 아랫도리가 아파왔다. 산 속 해는 일찍 넘어가 어느새 방안은 어두웠다.
이생이 짐승이 되어 헐떡이고 있다.
바지만 내려진 채 이생이 욕심을 채우고 있는데 잠결이지만 진이도 감흥이 올라 엉덩이를 맞추고 있었다. 

 

* 황진이 <제16話>

불덩이 같은 아침 해가 불끈 솟아오를 때 진이와 이생은 다정한 부부모양 두 손을 꼭 잡고 천왕봉(天王峯)에 올랐다.
곱게 물든 단풍에 천지사방이 불속처럼 뜨겁게 아름답다.
진이는 천왕봉에 오르자 태양을 향해 삼배하며 역시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어머니가 진이를 황진사에게 맡기고 송도를 떠나 지리산으로 들어갔다는 풍문을 들었을 뿐 그 후 종적을 몰라 늘 염두에 두고 극락왕생을 기도하였다.


엄수(嚴守) 거문고 스승한테 지리산에서 거문고를 타며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어언 십 수 년이 지났다.
예성강에 장님 시신이 떠올랐다는 소식에 비만 오면 거문고를 타는 귀신이 나타난다는 풍문 등으로 미루어 보아 어머니 현학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확신이 선지 오래다.


아침 해가 불끈 솟은 태양을 보고 어머니를 위해 극락왕생을 빌은 진이의 전신에 맥이 풀렸다.
상무주암에서 방사까지 즐기며 여유 있게 휴식을 취하고 올라왔으나 체력이 바닥이 났다.
어둠은 깊었으나 만공산에 명월이 가득하다.
춥고 배도 고프다.


상무주암에서 가지고 온 주먹밥으로 허기를 메웠으나 몸이 떨리고 눈이 들어갔다.

“내려갑시다. 더 있을 수가 없네...”

진이는 이생에게 업히다시피 하여 저녁 늦게 상무주암에 도착하였다.
기진맥진 상태다.


진이는 몸이 아무리 무거워도 거문고는 갖고 다닌다.
정신이 혼미하고 육신이 녹초가 되었어도 거문고를 타면 영혼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내일 금강산을 향해 떠날 생각인데 지금 몸 상태론 불가능한 상태다.
이생이 진이를 부축하여 말에 몸을 맡긴다 해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저녁을 먹고나니 몸은 더욱 파김치가 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몸과 마음이 편치 않을 때는 진이는 거문고에 세상 시름을 떠 넘겼다.
주지스님에게 맡기었던 거문고를 찾아 타기 시작하였다.
중국 죽림칠현 완적(阮籍)의 《영회시》(詠懷詩)다.

‘깊은 밤 잠 못 이루어/
일어나 앉아 거문고를 타려니/
엷은 휘장으로 밝은 달빛 비치고/
맑은 바람 옷깃에 스며드는데/
외로운 큰 기러기 들판에서 애처롭게 울고/
둥지를 찾아드는 새 북쪽에서 우짖는다./
배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근심스런 심사에 홀로 마음만 상할 뿐이네‘

그랬다.
이생이 옆에서 손발이 되어 보살피나 첫눈에 마음을 빼앗겼던 이사종과 6년간 계약결혼과는 상황이 좀 다르다.


조선팔도 유람 길에 여자 혼자는 아무래도 부담이 되었다.
서로 필요한 관계인 남자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생은 어느새 표정만 봐도 지금 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렸다.


완적의《영회시》가 진이의 거문고 음률을 타고 상무주암의 밤공기를 휘감았다.

“손님의 거문고 솜씨가 천하의 일품이네요!”

족히 쉰은 넘어 보이는 주지스님이 혀를 차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우리 아씨가 누구인지 아시고 하는 말씀이세요?”

옆에 있던 이생이 노복(奴僕·사내종)의 모습으로 어깨를 으슥해 보이며 주지스님의 말에 끼어들었다.

“이 아씨가 누구신가요?”

“예 우리 아씨는 그 유명한 명월(明月) 아씨예요. 그런데 지금은 해어화(解語花·말하는 꽃·기생)가 아니에요...”

주지스님은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어쩐지 거문고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어요! 거문고를 타면 중국 장강(長江)에서 흑두루미가 날아온다는 현학금의 따님이신가요?”

라고 말하며 몰라봐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어머님에 비하면 이 진이는 더 많이 배워야 합니다. 조용히 수행하시는 주지스님께 속세의 바람을 불어 넣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희들은 동창이 밝는 대로 떠나겠습니다.”

“아닙니다. 소승도 출가하기 전엔 송도의 한량이었지요! 그때 현학금의 거문고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진이는 어머니에 대해 말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주지스님이 생사를 모르는 어머니 얘기를 하여 지금 당장 떠나고 싶으나 산사(山寺)의 밤이다.


진이는

‘잘 쉬고 갑니다. 송도에 오시면 명월관을 한번 찾아오세요.’

라는 쪽지를 남기고 여명이 밝자 주지스님에게 인사는 않고 떠났다.

‘송도에서 놀았다’는 말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서 하루 이틀 더 쉬었다 떠나려 했었으나 서둘러 금강산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말 등에 오른 진이는 이인로의 《매화》(梅花)를 떠올렸다.

‘고야산(姑射山·신선이 사는 곳) 신선의 얼음 같은 살결 눈으로 옷 지어 입고/
향그린 입술에 새벽이슬 구슬을 마시네./
속된 꽃술들이 봄에 붉은 빛으로 물듦을 못마땅하게 여겨/
요대(瑤臺·신선이 사는 달)를 향해 학을 타고 가려하네.’ 

진이의 마음이 평정을 잃을 때는 늘 시를 떠올려 거문고 선율에 의지했었으나 말 등 위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진이의 독특한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하였다.
진이의 노래는 절창 이사종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금강산을 향하는 말 위가 아니라면 거문고를 타며 덩실덩실 춤을 추며 꽉 막힌 가슴을 쓸어내리고 싶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이생은 말을 천천히 몰았다.

“형님, 제 허리를 꼭 잡으세요!
길이 험해 말 등이 요동이 심합니다...”

진이는 느슨하게 잡았던 이생의 허리에 힘을 넣었다.

 

늦가을의 새벽바람은 제법 쌀쌀하다.
뜬 눈으로 밤을 새고 속까지 텅 비어 오한이 솔솔 몰려오고 있다.

“형님 추우시죠? 조금만 더 내려가면 주막이 있습니다. 올라올 때 봐 두었지요!”

이따금씩 몸서리치는 진이의 몸 흔들림을 이생은 느끼고 있는 것이다.
여명이 밝고 아침 해가 새벽안개를 걷었을 때 주막에 도착하였다.


산에서 먼저 내려온 사람들은 벌써 국밥을 먹고 주막을 떠나가는 이들도 있었다.

“주모 여기 고기도 넉넉히 넣어 국밥 두 그릇과 모주 두 잔도 주시게...”

이생이 진이를 안아 말에서 내려놓고 성큼 주막으로 들어가 국밥을 시켰다.
돈이야 진이가 내지만 필요할 때 필요한 행동을 해주는 이생이 고맙고 같이 오길 참 잘 했다고 생각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지금도 또 그런 생각을 하였다.


밤엔 때때로 잠자리 상대가 돼주고 낮엔 충실한 노복 행세를 해주니 입안의 혀가 따로 없음이다.
국밥 한 그릇에 모주 한 잔은 산에서 내려온 그들에겐 더 이상의 성찬이 없다.

“너는 모주 한 잔 더 하려무나!”

“아닙니다. 한 잔으로 족합니다.”

남장한 진이의 목소리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여자 아냐? 하는 표정들이다.
진이와 이생은 따가운 시선을 등 뒤로 하고 주막을 총총히 나와 말 등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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