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일반상식

영광으로 가는 눈길에서, 어머님께

太兄 2026. 1. 15. 19:36

영광으로 가는 눈길에서, 어머님께

 

(며칠 전 눈 내리는 시골길을 다녀오면서, 그 옛날 어머님이 걸었던 길을 되짚어 왔습니다. 아픈 어린 누님을 업고 30리 영광 가는 길을 걸었을 어머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래 전에 썼던 이 수필을 꺼내보았지요. 혹시 어머님 그리워하실 우리 벗님들은 계시지나 않을 까 싶어서 올려봅니다.

2026. 1. 15일 전라도에서 시인 정재학)

 

어머니,

 

이 길은 흔히들 굴비길이라고 하지요. 옛 시절 굴비를 만들면, 봇짐장수들이 굴비를 지고이고 오가던 길이라고 굴비길이라고도 하는, 군유리에서 영광으로 가는 길입니다, 어머니.

 

한 오리 쯤 가면 몽불사가 있는 장자산이 나오지요. 어머니 친정 인동 장()씨 문중 산이라 해서 장가산인데, 발음을 활음(滑音)하다 보니 장자산이라 부르는 산이라지요 아마.

 

군유리 냇가를 건너 마을을 만나면 오른쪽으로는 송곳산이 보입니다. 이 어린 자식 손잡고 친정 가는 길에 다리 아파 칭얼대는 저를 나무라지 않고, 어머님은 등에 업으셨지요. 기억납니다. 저 송곳산 너머로 지던 석양을요. 친정 가는 길이 얼마나 좋으셨으면, 가는 길 중간쯤에선 달려도 가던 어머님을 추억합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외갓집 평절리로 가는 길을 걷지 않고 영광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야트막한 산길을 돌다 보면, 오리나무가 까만 열매를 달고 서 있고, 겨울눈에 쌓인 하얀 아랫녘 들판이 넓게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멀리 용수마을이 보이고 대산도 보입니다.

 

그쯤에서 저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저어기 쓰러질 듯 달려오시는 50년 전의 어머님을 보았거든요. 열에 들떠 죽어가는 누이를 등에 업고 허위허위 달려오시는 어머니. 재봉이 형님을 잃고 난 뒤 가슴을 앓던 어머니는 누이가 열병으로 죽어가자, 그만 들쳐 업고 영광으로 달려가셨다지요.

 

내 새끼 다 죽이겠네.”

 

아버님은 출타하여 계시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부탁할 길이 없자, 그만 들쳐 업고 나선 길. 휘청이는 작은 몸으로 새끼 살리겠다고 나선 어머니 작은 발을 생각합니다. 그 발이 얼마나 시렸을꼬.

 

종아리까지 쌓인 눈길을 검정고무신 신고 헤치며 가시던 어머니. 인공난리가 휩쓸고 간 산야에는 한() 품은 이름 없는 넋들이 날뛰고 있을 때이고, 들길도 산길도 제대로 뚫리지 않은 시골 산길. 젊은 아낙이 나선 그 길은 얼마나 험하고 무서웠을꼬.

 

영광 가야 약방이 있었지.”

 

시오리 먼 눈길을 한번은 쉬셨을 법도 하지만, 지금 내가 앉아있는 그쯤에선 쉴 법도 하시지만, 어머님은 내내 한번도 쉬지 않았다고 하셨지요.

 

내 새끼 다 죽이겠네.”

 

새끼 앞세우고 저승길 가는 에미는 없단다. 설사 어찌할 수 없는 하늘의 뜻이라 할지라도 에미는 자식을 저승길에 앞세우려 하지 않는단다. 제 목숨을 내놓더라도 자식만큼은 살리고픈 게 에미란다.

 

지극한 것은 새들도 마찬가지지. 새들의 에미란 말이다. 먹은 것을 토해내서 새끼에게 먹이는 법이지. 그래서 새들처럼 사람의 에미도 먹을 때도 자식 생각, 입을 때도 잠잘 때도 자식 생각에 누구보다도 먼저 목이 메인단다. 너도 언젠가 보았지? 집안 뒤뜰에 새끼 잃은 어미새가 떠날 줄 모르고 둥지에 멍하니 앉아있지 않든?

 

좀 쉬었다 가세요, 어머니.”

 

장자산 산길 가장자리에 앉아서 달려오시는 50년 전의 어머니를 바라보았습니다. 너그러운 눈이 새끼 살리겠다는 일념(一念) 하나로 굳어져 있었습니다. 뜨거운 사랑이 집념처럼 느껴지는 얼굴이었지요. 땀에 젖어 있었습니다.

 

좀 쉬었다 가세요, 어머니.”

 

자식 걱정 놓고 이제는 쉴 때도 되었습니다. 다행히 약방에 이르러 주사를 맞고 누이의 열이 내리자, 돌아오는 길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으셨다고 하셨지요. 걸어오다 한번씩 등에 업은 누이를 추스르며 돌아보면, 등 뒤에서 방긋 웃는 누이 얼굴이 그렇게도 이뻐 보였다고 하셨지요.

 

하얀 눈이 내립니다, 어머니. 그 누이가 벌써 환갑이 다 되어가는군요. 미국에서 외손주들 기르며 잘 살고 있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좀 쉬었다 가세요, 어머니.”

 

2005 12 3일부터 20여 일간 끝없이 눈이 내린 영광으로 가는 장자산 산길. 주말이라 고향을 들러 오는 길에 장자산 오리나무 곁에서 50년 전 어머니를 붙잡고 오래도록 앉아 있었습니다.

 

2005 12 23일 고향 산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