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정(母情)의 뱃길‘40년후
-인생 시작(始作)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기 마련이다.
정치(政治)의 노선(路線)을 떠나 현재 정치인(政治人)들은 꼭 읽기 보기 바란다.
내가 화려(華麗)한 권좌에서 물려 났을 때 나를 찾아줄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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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陸英修, 1925~1974) 여사는 남부(南部)지방(地方)으로 시찰(視察)을 떠나는 남편(男便)에게 전남(全南)
여수(麗水)에 가시거든 한 어머니를 만나 전달(傳達)해 달라며 한통의 편지(便紙)를 건네었다.
여수 앞바다 외딴섬 무인도(無人島) 가장도에 사는 한 소녀의 어머니의 실화였다.
외딴섬에서 여수(麗水)까지 20리 바닷길을 나룻배에 딸을 태워 통학(通學)을 시킨 어머니가 있었다.
노젓는 어머니와 단발머리의 초등(初等)학생(學生) 소녀(少女) 눈비가 오고 풍랑(風浪)이 와도 모녀(母女)의 나룻배는
6년 동안 단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
졸업식(卒業式)날,학교에서는 6년 개근상(皆勤賞)을 탄 소녀의 어머니에게 ’장한 어머니상‘을 드렸다.
친구(親舊)와 아우들과 선생(先生)님과 정든 교실(敎室)과 한꺼번에 헤어지는 마지막날은 나룻배 모녀(母女)의 사연으로 더욱
숙연(宿緣)했다.
“빛나는 졸업장(卒業狀)을 타신 언니께...”’졸업장을 타신 첫구절처럼 소녀의 졸업장이 빛나는 것은 그 어머니의 지극(至極)정성(精誠)과 그것도 학교(學校) 문턱을 넘어본 사람이 없는 외딴섬에서 처음 생긴 남다름에 있었다.
섬에 집이라곤 세 가구(家口)에 스무명 안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작은 통통배조차 오지 않는 곳이라 섬사람들은 장을 보거나 다른 볼일을 보러 나룻배로 육지(陸地)를 건너다니곤 해서 아이들이 커도 학교에 보내는 것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 어머니는 비록 딸 자식(子息)이지만 가르쳐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버지는 펄쩍 뛰며 반대(反對)했다. 딸을 학교에 넣어본들 20리나 되는 바닷길을무슨 수로(水路) 왕래(往來) 하느냐는 것이었지만
모진 결심(決心)으로 딸을 입 학시키고야 말았다.
전기(電氣)도 시계(時計)도 없는 섬 마을에서 새벽어둠에 딸을 깨워 밥을 먹이고 나룻배를 저어 학교(學校)에 보내고,공부(工夫)가 끝날 때면 다시 가서 데려오곤 했다.
어머니의 나룻배는 강풍(强風)이 불어도 눈(눈)보라가 몰아쳐도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어머니의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다.아버지가 병든 몸이라서 농사(農事)를 도맡아 했다.
농번기(農繁期)에는 소를 빌려 논밭일을 하고, 장이 서는 날에는 채소(菜蔬)를 팔아 생필품(生必品)을 사고 아버지의 약(藥)도 사왔다.
그래도 어머니는 공부하는 딸이 대견(對見)스럽기만 해서 육 신의 고달픔을 모르고 6년 세월(歲月)을 흘쩍 넘겼고, 그 새월 동안 모정(母情)의 뱃길을 손꼽아 보니 3만4천리를 헤아렸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敎室)아...“그렇지 않아도 눈물나는 졸업식(卒業式)에 소녀도 울고 어머니도 울고,모녀(母女)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1962년 매서운 추위가 가시지 않은 2월,여수의 한 초등학교(初等學校) 졸업식(卒業式)은 신문보도(新聞報道)를 통해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다(한국일보(韓國日報)2월14일).
육영수(陸英修, 1925~1974) 여사(女史)는 신문(新聞)기사(記事)를 읽고 그 어머니에게 편지(便紙)를 썼던 것이다.
박정희(朴正熙, 1917~1979) 의장은 여수(麗水)에 가서 이 가난한 섬의 모녀(어머니 박승이, 딸 정숙현)를 만났다.
육여사의 편지(便紙)를 전하고, 그 어머니의 굳은살 배긴 손을 잡아주며 위로(慰勞)와 격려(激勵)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로부터 40년 후 한국일보(韓國日報)는 딸 정숙현씨의 글을 게재하면서 모녀의 뒷 소식(消息)을 전해 다시 한번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다음은 2004년 7월8일자 한국일보(韓國日報)에 게재(揭載)된 정숙현씨의 글이다.
‘모정(母情)의 뱃길’주인공(主人公) 정숙현씨
나는 모른다,물결 위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몇 억겁이 지난 후의 이파도 위에도 한 오라기 주름살이 굽이칠까.
살을 에이는 어머니의 뱃길 따라왜 오고 갔는지를 나는 모른다.
깊고 또 깊은 곳에 남아 있거라
물보라가 그리는 한 장의 초상화(肖像畵)아,나의 어머니 모정(母情)의 뱃길
굳이 거창하게 詩라고 말하지 않아도 좋다.
단지 물길처럼 마음 또한 이렇게 흐르는 것을.
1956년,모두가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時節), 초등학교(初等學校) 6년을 졸업(卒業)한다는 것은 지금의 대학(大學)을 졸업(卒業)한다는 것보다 더욱 귀한 일이었다.
그것도 스무명이 채 못 사는지 자그마한 섬마을 출신(出身)의 여자아이에게는 불가능(不可能)에 가까운 일이었다.
말이 좋아 섬마을이지, 내 가족(家族)을 포함해 겨우 세 가구(家口)가 살았던 그 섬에서는 생계(生計)를 위해 약간(若干)의 채소(菜蔬)와 나물을 육지(陸地)에 팔러나가기 위해 이용했던 나룻배 한척만이 외부(外部)를 잇는 유일(唯一)한 교통(交通)수단(手段)이었다.
어머니는 남들이 다 자는 깊은 밤,달빛에 의지(依支)해 혼자 노젓는 방법(方法)을 익히셨다.
병(病)중인 아버지와 늙은 시어미를 모시며 오랜 세월(歲月) 동안 배우지 못한 것을 원통(冤痛)하게 여기신 어머니는 절대로 딸에게 문맹(文盲)을 대물림할 수 없다고 결심(決心)하셨다.
내 어머니 박승이는 그렇게 6년간 전남(全南) 여천군(현재(現在) 여수시) 가정도에서 여수(麗水)까지 20리 바닷길 노를 저었다.
시계(時計)는커녕 수탉도 없던 새벽, 어머니는 오직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로 그날의 날씨를 가늠하며 조각배를 띄웠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태풍(颱風) 사라호로 산산(散散)조각(彫刻)이 난 배의 파편(破片)을 안고 통곡(痛哭)했던 어머니, 한겨울
추위에 갈라진 손등으로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파도(波濤)를 헤쳐 나가던 어머니였다.
말로는 표현(表現) 못할 6년의 세월(歲月),마침내 졸업식(卒業式) 날이었다.
어머니는 박수갈채와 울음바다 속에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當時) 우리의 사연(事緣)을 취재(取材)했던 한국일보(韓國日報) 이문희 기자로 인해 ‘모정의 뱃길 3천4천리’는 전국(全國) 방방곡곡에 알려지며 우리 모녀는 한국일보와 인연(因緣)을 맺게 됐다.
1962년2월14일자로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記憶)한다.
그때 받은 격려 편지는 국내외(國內外)에서 하루 200여통 이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정의 뱃길 이란 이름으로 영화(映畫)가 만들어졌고 어머니를 소재로 한 노래(필자 주:이미자이
‘꽃피는 여수바다’)도 불려졌다.
라디오 연속극(連續劇)까지 만들어졌다.
당시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大統領)이 여수에 내려와 어머니와 나를 격려하며 장학금을 주던 일을 잊을 수 없다.
그후 나는 여수에서 중,고등학교(高等學校)를, 서울에서 대학(大學)(성균관(成均館)대
국문학과(國文學科))을 나왔다.
이제 아이 세 명을 키우는 나는 당신의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다
딸 가족(家族)을 위해 새벽 기도(祈禱)를 다녀온 후 낮은 목소리로 찬송가(讚頌歌)를 부르는 어머니의 얼굴은 마냥 평화(平和)롭다.
내가 한석봉(韓錫琫)이나 이율곡이나 맹자(孟子)처럼 훌륭하지 못한 탓으로 내 어머니가 그들의 어머니처럼 길이길이
기억(記憶)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이젠 거의 잊혀져 가고 있는 어머니를 기억해 이런 지면(紙面)을 통해 어머니에게 감사(感謝)와 사랑의 글을 올릴수게 해 준
한국일보(韓國日報)에 감사한다.
나 또한 어머니의 발끝에도 전혀 미치지 못하나마 당신의 모습(模襲)을 닮으려 한다.
이제57세가 된 정숙현씨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서 아직도 정정한 80세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幸福)하게 살고 있다.
1986년부터 공생복지재단 산하 서울특별시립한남직업전문학교 미용(美容)과 교수(敎授)로 일하고 있다.
육영수(陸英修, 1925~1974) 여사의 편지 내용은 알 길이 없으나, 어머니의 지극(至極)정성(精誠)에 감사(感謝)를 전하며 용기(勇氣)를 북돋아주는것이었으리라 어머니들끼리만 아는 이야기도 있으리라.
무정세월 40년.
10년이면 강산(江山)도 변한다는 그 세월이 네 번 굽이쳐 흘렀어도 주인공(主人公) 정숙현씨는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大統領)이 여수에 내려와 어머니와 나를 격려(激勵)하며 장학금(獎學金)을 주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지도자(指導者)의 이런 보살핌으로 이땅의 고난(苦難)을 다 감당(堪當)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외딴섬의 고립(孤立)과 가난을 숙명이라 여기지 않고 바다를 건넌 그 어머니의 결연한 ‘도전’에 뜨겁게 악수하는 것이 고난(苦難)을 딛고 일어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의미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세계(世界) 최빈국(最貧國)의 신세를 면치 못하면 60년대초 어떻게 궁핍(窮乏)을 딛고 몸부림쳐 일어나야 한다는 의지가 절박했던
그 시기였음에랴.
이 땅에 수많은 지도자(指導者)들이 거쳐가고 지금도 내로라하고들 있지만 거의 서민(庶民)의 삶과 무관한 나으리 들 뿐
서민을 가슴으로 만나고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 애환을 나누고 함께 꿈을꾼 지도자(指導者)가 누가 있는가를 돌아보게 된다.
‘박정희 매도’가 극성을 부리던 때에 이런 댓글이 올라온 적이 있다.
“이놈들아, 난 그 분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한마디 부언 설명(說明)이 필요(必要)치 않은 말이다.
역사적(歷史的) 평가(評價)를 차지하고도 그가 진정(眞情) 존경(尊敬)받는 이유(理由) 중의 하나 일겁니다.
♡하나님 계획은 / 허샤론선교사
https://m.youtube.com/watch?v=_sBT3kGNw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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