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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三一節,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Day)

太兄 2024. 3. 1. 12:51

       삼일절(三一節,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Day)

 

삼일절은 일제강점시 191931(음력 129일 토요일) 정오를 기하여 일제의 압박에 항거, 전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온 민족이 총궐기하여 평화적 시위를 전개하였다. 당시 한반도의 민중들이 일본 제국의 지배에 항거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3.1 운동을 기념하는 날이다.

우리 민족의 숭고한 자주독립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정부는 1949101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 공포 국경일로 정하였으며 3부 요인을 비롯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모여 기념식을 거행하며, 조국 광복을 위하여 싸우다 순국한 선열의 유족 및 애국운동가들로 구성된 광복회 회원들은 별도로 탑골공원에 모여 그날의 뜻을 되새기는 의식을 거행하고 일반 가정은 전국적으로 태극기를 게양하여 그 날의 의의를 기린다.

삼일절이라는 명칭은 1920년부터 사용되었으나, 당시 임시의정원에서 법률로 정한 국경일의 명칭은 독립선언기념일이었으며, 독립기념일, 국경일로 불리었다.

 

1920,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매년 31일을 '독립선언일'로 지정하여 국경일로 기념하기 시작했다.

1946년에는 미군정 법률 제2호를 통해 '국가경축일'로 지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통해 계승되었다.

1948년 제헌 이래 대한민국 헌법은 그 전문에서 3.1 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으며 그 정신을 승계하여 정부를 수립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임시정부의 헌장과 강령, 헌법 등이 대한민국 제헌 헌법을 통해 계승되어 오늘날 헌정의 뿌리가 되었기에 대한민국의 출발일로서 국가가 축하하는 것이다.

 

광복절이 건국절이 아닌 이유가 삼일절과도 관련이 있다. 3.1 운동을 계기로 하여 한반도를 비롯하여 해외 각지의 독립운동 구심체가 통일된 민주주의 제도의 임시정부 수립운동으로 이어져 서울의 한성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연해주 대한국민의회가 상해정부가 합쳐지는 형태로 상하이시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 되었던 것이다.

오늘 31일은 즉 우리 민족적 역사의 영광스러운 날이라. 우리 민족이 저 원수 일본에게 합병의 수치를 당한 이후 근 10년만에 그 기반을 벗어나려고 저 33현들이 우리 전체 민족을 대표하여 건국 4252, 191931일에 독립 선언하였다.

19463·1절 경축식

19458.15 광복 이후 대한민주의원에서 31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법률안을 제정하였고, 이듬해인 194631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삼일절 경축식이 거행되었다. 식전에는 이승만 박사와 김구 주석이 참석하였으며, 김규식 박사의 만세삼창 제창으로 식을 마쳤다.

다만 광복 직후 삼일절은 좌우익 대립의 장으로 대두되고는 했는데, 국가 건설의 정통성을 3.1 운동에 두려는 좌파와 우파가 서로 대결함에 따라 경축식이 개별적으로 열리는 것은 물론 상호 간의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19488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성립된 후 삼일절은 4대절에 포함되었으며, 대한민국 건립의 시원이 된 최대의 국경일로 간주되었다.

 

오늘은 31! 우리 겨레 삼천만의 최대 국경일인 삼일절이다. 이날에는 명실상부하게 거족적인 국경일로 남북의 삼천만이 다같이 한마음 한뜻으로써 즐겁게 노래하고 힘껏 뛰놀며 이날을 경축하자. 이것이 최대 국경일인 오늘을 맞이하여 최대의 축원(祝願)이며 최고의 이상이다.

1950년대까지 삼일절에는 명절처럼 상점들이 일제 철시하고 국기를 내걸었으며, 음악회, 학예회, 시열식, 시가행진, 봉화제 등이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19615.16 군사정변 및 1965년 한일협정 이후 삼일절의 위상이 크게 낮아지며 정부 차원의 형식적인 식전과 탑골공원 추념식만 사실상 남게 되었으며, 최대 국경일의 위치도 광복절에 내주게 되었다. 1980년대 대한민국 제5공화국 동안에는 국무총리가 축하연설을 대독할 정도로 천시당했으며, 이 때부터 삼일절 경축사가 사실상 정부 정책 홍보의 장으로 추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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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삼일절 제30주년 기념 이승만 대통령 연설

삼일절은 독립운동가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날이면서 대한민국의 탄생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공공기관도 삼일절을 "순국선열을 추도, 애도하는 묵념을 올리는 날"이라 잘못 알고있는 경우가 많다.

삼일절의 역사는 독립 선포 후 대한민국과 임시정부의 성립과 함께 시작된다.

19202월 임시정부는 내무부 포고령 1호를 통해 3.1 독립 선언 1주년 기념식 준비회를 발족하고 성대한 식전을 준비하였다.

192031일 당일 상하이시에서는 오전부터 한인 가옥마다 태극기가 나부끼기 시작했으며, 정부 차원의 경축식은 오전 10시에 이동휘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임시의정원 대의원, 인성학교 학생이 모인 가운데 상해 올림픽 대극장에서 봉행되었다.

삼일절 경축 식전은 임시정부와 국내 주요 지역은 물론이고 미국, 러시아, 쿠바, 심지어는 일본 등 각국의 도시에서도 치러졌는데, 특히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 주 다뉴바 시에서 300인의 한인이 회집하여 태극기를 단 차량과 간호복을 입은 여성,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부대가 시가행진을 벌였다. 해외에서의 삼일절 행사는 강당이나 운동장, 교회 등을 빌려 여는 경축대회와 태극기와 깃발, 전단을 휘날리는 기습 시위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중국과 미주, 연해주에서, 후자는 주로 일본 유학생들이 자주 행하던 방식이었다.

상해에서 치러졌던 삼일절 경축식의 경우, 올림픽대극장이나 침례교당 등지를 빌려 만국기와 태극기로 장식을 하고 군악대를 초청하여 독립군가와 애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서 치러졌다. 식전이 끝난 뒤에는 차량을 빌려 태극기와 독립기를 달고 악대를 앞세워 일본 영사관까지 가두행진을 하거나 축하연회, 기념연극 등을 베풀기도 했다. 1920년대에는 중국을 비롯하여 대만, 필리핀, 인도, 베트남, 몽골 등 동아시아의 피압박민족 독립운동 대표단이 식전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고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반제국주의 연대를 확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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