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현대차 사장 나와라"… 하청업체 노조 목소리 커진다
"삼성·현대차 사장 나와라"… 하청업체 노조 목소리 커진다
'노란봉투법' 시행땐 교섭권 생겨

“삼성전자가 문제 해결에 직접 나서라.”
지난 16일 삼성전자 협력사 ‘이앤에스’ 노조는 이 같은 내용이 적힌 현수막을 펼치고 여의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회사는 반도체 웨이퍼(반도체 원판)를 담는 박스 관리 하청을 맡은 직원 230여 명의 작은 기업이다. 작년 8월 민노총에 가입한 노조는 작년 말 대법원의 통상 임금 판결이 나자, 400% 수준인 정기 상여금을 모두 통상 임금에 포함시켜 각종 수당을 인상할 것을 요구했다. 회사는 “작년 영업이익을 모두 지급한다고 해도 노조가 요구하는 인상분의 40%밖에 안 된다. 재정적으로 준비할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노조는 회사를 ‘임금 체불’로 고소했다. 그러고선 민주당, 진보당과 함께 국회에서 원청 기업인 삼성전자를 겨냥한 기자회견을 연 것이다.
이앤에스 김지훈 대표는 26일 “통상 임금 문제 해결을 위해 노조와 협의 중인데 정치권에서 노조법 2·3조 개정을 위한 투쟁에 회사를 지렛대로 활용한 것 같아 유감”이라고 말했다. 노조법 2·3조는 원청의 사용자 책임 강화, 그리고 노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제한을 담은 이른바 ‘노란봉투법’을 말한다. 김 대표는 “기자회견 때문에 노사는 더 불편한 관계로 갔고, 회사는 존폐의 위기에 노출될 만큼 추후 영업도 불투명한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이재명 정부와 여당이 본격적으로 노란봉투법 추진에 나서면서, 대기업 본사에 대한 하청 업체 노조의 압박이 점차 커지고 있다. 노란봉투법의 핵심은 하청 업체 근로자들과 원청 기업 간 직접 교섭이다. 기존 노조법에선 하청 업체 근로자는 자신이 소속된 회사와 교섭할 수 있었지만, 노란봉투법이 시행되면 원청 업체를 상대로도 교섭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즉 삼성전자, 현대차 하청 업체 노조가 삼성전자, 현대차와 직접 교섭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기업 직접 나오라’는 하청 노조들
지난 19일 서울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에서도 민노총 금속노조는 ‘비정규직 직접 교섭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현대차그룹이 진짜 사장! 현대차는 지금 당장 교섭에 나오라!”고 주장했다. 같은 날 서울 장교동 한화 사옥 앞에선 90일 넘게 이어져 온 한화오션 조선하청지회장의 고공 농성 해제 기자회견이 열렸다. 전날 한화오션 하청 노사가 ‘상여금 50% 추가’ 등에 합의하고, 한화오션도 2022년 하청 노조에 제기한 47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취하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히면서 상황이 진전된 것이다. 현재 한화오션은 소송 취하와 관련해 이사회 설득까지 마친 상태로, 하청 노조와 추가 협의를 진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민노총 위원장 출신인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가 25일 “노란봉투법은 반드시 가야 할 길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재차 강조하면서, 원청 업체인 대기업을 향한 압박 수위는 점차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교섭만 하다 한 해 다 갈 판”
재계는 현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현대차의 경우 현재 사내 하청 업체만 80여 곳 있는데, 이런 식이면 “교섭만 하다 한 해가 다 갈 판”이라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반도체 공장에 상주하고 있는 사내 하청 기업만 150여 곳에 이른다.
경제 단체들은 “자동차, 조선업, 건설업 등의 경우 협력 업체 수백 곳이 다단계 협업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데 사용자 범위를 무분별하게 확대하면 산업 현장의 혼란이 불가피하다”며 “만약 단체교섭이 결렬돼 수많은 파업이 발생하면 원·하청 산업 생태계가 붕괴돼 한국의 산업 경쟁력이 심각하게 저하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조 파업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3조 개정안에 대한 우려도 크다. 산업 현장에 파업과 실력 행사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관행이 더욱 고착화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경제인협회, 대한상공회의소, 경영자총협회, 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중견기업연합회 등 경제 6단체 상근부회장단은 25일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를 만나 이 같은 우려를 전달했다.
재계 관계자는 “노란봉투법이 강행 처리되면 원청 기업은 국내 협력 업체와 거래를 단절하거나 해외로의 이전을 검토할 수밖에 없다”며 “경기가 침체된 상황에서 이 같은 입법은 중소 협력 업체들의 도산으로 이어져, 국내 산업 공동화 현상을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