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 장관을 가로막는 장벽들
기업인 장관을 가로막는 장벽들
국회의원 중 법조인 출신 61명인데
기업인 출신은 2명 남짓
장관은 20년간 4명
망신 주기 청문회, 백지 신탁이 원인
미래 예측 힘든 대혼돈 시대에
민간의 역량을 死藏해야 하나
이재명 정부가 한성숙 전 네이버 대표를 중기부 장관에, 배경훈 LG AI연구원장을 과기정통부 장관에 발탁했지만 한국은 여전히 기업인에게 공직(公職)의 문턱이 높다. 한 법률 전문지 조사에 따르면 22대 국회의원 중 법조인이 61명으로 역대 최고다. 전체 국민에서 법조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0.07%에 불과하지만 국회에서는 20.3%나 된다. 분야별로 세분화해서 보면 변호사 31명, 검사 19명, 판사 9명의 순서인데, 민주당 당선자 37명 중 14명(37.8%)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 검사와 민변 출신 의원들이 서로 상대방을 ‘범죄자’라고 욕하며 싸우기 딱 좋은 구성이다. 민변이 권력으로 가는 출세 등용문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반면 기업인은 고동진(삼성전자 출신)·최은석(CJ제일제당) 의원을 비롯해 한때 젊은 시절 기업에서 근무했던 의원까지 포함해도 5명이 안 된다. 이 기업인 출신 의원들을 누구도 실세라고 부르진 않는다.
정부 부처도 마찬가지다. 본지 2024년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이후 임명된 239명의 국무위원 가운데 기업인 출신은 4명으로 1.7%에 불과하다. 노무현 정부의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 박근혜 정부의 강은희 여성가족부 장관, 문재인 정부의 유영민 과기정통부 장관, 윤석열 정부의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전부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어김없이 참신한 인재 영입을 내세웠지만 대부분이 교수 출신(58명)이었고,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등 폴리페서(polifessor·정치인+교수)들은 정권의 대변인 노릇 외에는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다.
성공한 기업인들이 공직을 꺼리는 이유는 후보자의 가족까지 털어내는 망신 주기 청문회와 주식 백지 신탁이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규제 탓이다. 한국의 백지 신탁은 고위 공직자와 배우자가 직무 연관성 있는 주식을 3000만원 이상 보유할 경우 주식을 사실상 강제 매각하도록 하는 규제다. 미국에서 처음 도입된 제도가 ‘성리학의 나라’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10배는 세졌다. 국내 주식 투자자 수가 1410만명에 이르고 서울의 웬만한 아파트 가격이 20억원을 넘어선 상황에서 시대착오적이기도 하다. 한 전직 장관은 “성공한 기업인들 중에서 전문 지식과 조직 관리 능력 등 당장 장관직을 수행해도 될 만한 사람이 많지만 3일간의 인신공격 청문회와 전 재산 백지 신탁까지 감수할 사람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실제 2013년 국내 대표적인 반도체 장비 업체 주성엔지니어링의 황철주 대표는 박근혜 정부의 첫 중소기업청장에 지명됐지만, 사흘 만에 “회사와 주주를 버릴 수 없다”며 사퇴했다. 문재인 시절 초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선임 때까지 100일 넘게 걸렸다. 문 정부는 기업인 출신을 첫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으로 선임하고자 했지만 제안을 받은 기업인들이 줄줄이 거절을 하는 바람에 결국 교수 출신을 선택했다. 당시 제안을 받았던 스타급 벤처기업인은 “투자자들은 회사를 운영하는 기업인을 믿고 큰돈을 맡기는 것”이라며 “공직에 나간다고 회사를 매각하는 것은 오랫동안 자신을 믿어준 투자자들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미국에도 백지 신탁(Blind Trust) 제도가 있지만 재계의 거물급 인사들이 공직과 기업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현재 미국 상하원 의원(총 535명) 중 기업인 출신은 150여 명으로 전체의 30%에 육박한다. 트럼프 정부에서도 최근 사퇴한 일론 머스크 외에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등 많은 요직에서 기업인과 민간 전문가들이 뛰고 있다.
자수성가한 기업인들을 만나보면 아무리 작은 기업일지언정 맨땅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감동의 스토리가 있다. 네이버 모바일 시대를 연 한성숙 전 대표와 한국 AI 연구의 선구자 격인 배경훈 LG연구원장은 학벌 장벽을 깨고 성공한 인물들이다. 또 한국 대기업 경영자들의 글로벌 네트워크는 유대인 네트워크 못지않은 국가 자산이다.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대혼돈의 시대에 경제 전쟁의 최전선에서 싸워온 기업인의 역량을 왜 사장(死藏)시키는가. 돈이 많다는 이유로 기업인들을 죄인시하는 케케묵은 정서법과 규제부터 철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