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공과(功過)
전두환은 재임 시절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하였고, 연좌제를 폐지하였으며, 사교육을 금지시키는 한편, 적자투성이 무역수지를 흑자로 전환시킨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완벽한 인간은 없다. 그러나 완벽하지 못하다고 해서 비난 받을 이유는 없다. 나 또한 너 또한 부족한 인간이다. 전두환 역시 우리네 인간의 부족함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다.
그리하여 내가 부족한 인간일진대, 전두환의 부족함을 지나치게 탓하지 말라. 그의 공(功)과 과(過) 역시 한편으로만 치우쳐 바라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한다. 공(功)은 공(功)대로 과(過)는 과(過)대로 있는 그대로를 바라볼 줄 알아야, 우리는 인간적인 부족함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것이다.
(1) 5.18
5.18을 이용한 김일성의 전략은 절반의 성공으로 남는다. 남한 내 폭동이 전국으로 번지게 하여 적화무력통일의 기회를 잡는데는 실패하였지만, 5.18을 이용하여 수많은 운동권 학생들을 길러 그들을 주사파로 양성했다는 점은 성공했다고 본다. 그 주사파를 이용하여 오늘날 종북정당 더불어민주당을 만들었다는 점. 그리고 종북간첩이 대통령을 하게 되었다는 것도 고무적인 성과였을 것이다.
김대중과 남민전 등 대한민국 내부에 기생하고 있던 좌익들은 베트남의 공산통일(1975.4.30.)에 고무된 바 있었다. 남민전은 그들의 깃발을 베트콩 깃발을 차용한 바 있고, 김대중 또한 베트남 적화 당시 수없이 발생한 시위집회에 주목하고 있었다. 심지어 미군철수와 평화를 외치던 스님들의 분신자살도 연이어 일어났다. 베트남이 혼란에 빠지던 그 강력한 시위집회를 김대중은 동학기념일날 정읍 연설에서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을 만나 5.18 관련 데모를 지시하였고, 박관현은 학생들을 도청분수대로 이끌고 나왔다. 여기에 남로당 잔존세력들과 고정간첩, 그리고 북한이 추모하는 5.18 인민군전사자들이 가세한 것이다. 당시 북한은 총동원령을 내리고 있었다. 북한 김일성은 가동할 만한 모든 세력들을 합세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만약 5.18에 대해서 누군가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전두환이 5.18을 조기진압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만약 전두환이 5.18을 조기진압하지 않았다면, 광주는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온갖 소총부터 수류탄과 TNT까지 탈취된 상황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인가. 해방구가 되었을 것이고 여순반란 때처럼 누군가는 인민공화국 지지를 선언했을지 모른다. 당시 김일성은 이 점을 간절하게 노렸다. 폭동과 혼란, 그리고 남침.
총기 탈취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대 운동장 지하통로에서 살고 있던 넝마주이들도 합류했다고 하나, 지금까지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에 대한 의문도 있었다. 그리고 행방불명자 또한 탈북한 북한 특수부대원들의 증언이 사실일 수 있다. 북한은 광주 5.18을 선전선동에 이용하고자 산증인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리하여 희망하는 학생들을 데리고 북으로 가다가 도저히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들을 죽여서 산속에 묻었다는 증언이었다. 험준한 산악을 한 시간에 5키로를 달린다는 북한특수군들이었다. 학생들이 따라가기에는 무리였을 것이다. 결국 북한은 윤기권을 월북시켜서 이용하였다.
더구나 특전사가 소지하던 총기는 M16이었다. 필자(筆者) 역시 전방 군부대에서 다루던 총기였다. 그러나 사살된 사람들 중에는 M1이나 칼빈에 의해 당한 희생자가 많았다는 점은 이해할 수 없었다. 5.18 내부세력들의 총질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은 북한 청진에 있는 5.18 인민군 전사자 추모비였다. (추모비의 날짜는 6. 19일임) 무려 154명이었고 (후일 4명 추가), 모두 5.18이 진압되고 난 뒤 6월 19일까지 돌아오지 않은 자들인 것으로 짐작된다.
아쉬운 점은 5.18 이후를 전두환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였고, 동서화합을 위해 건설한 88고속도로 역시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5.18에 대한 함구(緘口)를 목표로 유족에 대한 탄압을 했던 것도 그 중의 하나다. 미리 진실을 알리고 상처를 치유하는 노력을 했더라면, 비극은 길게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이 유공자가 되는 현실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전두환이 5.18을 조기에 진압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라는 단순한 질문 하나만 던졌어도, ‘전두환 살인마’라는 누명은 벗겨졌을 것이다.
5.18 당시 광주 근처에도 오지 않은 사람들. 예를 들면 이해찬이나 추미애, 문재인과 통진당 이석기 같은 인물도 유공자라는 것이었다. 가짜유공자 문제는 5.18 세력들과 광주시가 합작한 범죄행위라 판단해야 한다. 실시간으로 북한에 중계된 사실이 그렇다. 그리고 5.18이 일어날 무렵 10살도 안된 자들이 유공자라는 것은 코메디에 해당한다.
어쩌면 광주는 도와줄 사람을 필요로 했고, 그 도움을 준 사람들을 유공자로 선정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진실을 아는 국민들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았고, 다시 광주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극과 극이 부딪치는 이 시점에 못된 정치인들은 광주를 찾아가 정치적인 이용을 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가 화해와 해원(解寃)이 이루어지지 않는 지금의 평행선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사회에 떠도는 5.18의 의문을 이용하여 어떤 변명도 만들어 내거나 거짓을 섞지 않았다. 역시 돌 같은 성격의 위인이었다. 그리고 전두환은 5.18 이후 광주에서 대구를 잇는 88고속도로를 만들었다.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영호남을 잇는 도로를 만든 것이었다. 5.18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전두환다운 성의(誠意)였을지 모른다.
다만 5.18 이후 즉시 이러한 비극의 원인과 과정, 무력진압의 필요성과 해원(解寃)을 위한 노력을 다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싶다. 해남 진도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 박지원은 지난 시절, 전두환의 5.18 광주 진압을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그것(5.18 조기진압)은 전두환의 위대한 결단이었다.”
전두환을 살인마라고 하는 견해와는 완전히 다른 판단이며 평가일 것이다.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무정부 상태의 광주를 진압하여 더 이상의 혼란을 막고 국가를 정상화시켰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박지원은 다시 5.18특별법을 말하고 있다. 광주시민들에게 아부하여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전형적인 정상모리배의 태도라 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 제정하고자 하는 5.18특별법이란 5.18에 대한 비판 자체를 막겠다는 의도를 지닌 법이다. 그러나 이는 다시 국민적 의혹과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이 법으로 인해 다시 광주가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된다면, 박지원은 간신(奸臣)의 상징으로 남이야 한다.
그리하여 전두환이 살인마일 수 없는 또 한 가지 이유는, 5.18 당시 전남도청 지하에 설치된 60톤 분량의 TNT를 폭파전문가 배승일을 급파해서 4일에 걸쳐 뇌관을 제거한 일과 총을 쏠 수 없도록 총의 노리쇠 방아공이를 제거한 일이다. 그리하여 5.18은 최소한의 피해로 진압되었으며, 이는 곧 전두환이 살인마가 아니라는 반증(反證)이 된다. 따라서 전두환의 이 노력은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2) 삼청교육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전두환 통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삼청교육대를 말한다. 맑고 깨끗한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동경(憧憬)이었을 것이다. 특히 전과 10범, 20범들이 활보하는 사회에 대한 반감이 더욱 전두환의 삼청교육대를 말하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인권탄압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지만, 집행과정에서 실무를 맡은 경찰이나 정보원들의 실수나 전횡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범죄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 전두환의 3청교육대는 분명히 공(功)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필자(筆者) 역시 시내나 거리에서 깡패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
거리를 깨끗하게 하고, 사회를 깨끗하게 하며, 경제를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로 시작된 삼청(三淸)교육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부랑자, 폭력배, 경제사범 등을 삼청교육대에 입소시켜 순화교육을 시켰으나, 당시 교육대의 1/3은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삼청교육대는 1981년 1월까지 총 6만 755명을 체포하고 보안사령부·중앙정보부·헌병대 요원과 검찰·경찰서·지역정화위원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A·B·C·D의 4등급으로 분류하여 A급 3252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였고 B·C급 3만 9786명은 4주 교육 후 6개월 복역케 한 다음 2주 교육하여 훈계 방면하였으며, D급 1만 7717명은 경찰에서 훈계 방면하였다.
삼청교육대 순화교육은 연병장 둘레에 헌병이 집총(執銃) 감시하는 가운데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가혹한 방법의 훈련을 감행하였다. 1988년 국회의 국방부 국정감사 발표에 의하면 삼청교육대 현장 사망자가 52명,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 3백 97명, 정신장애 등 상해자 2천 6백 78명이 발생하였음을 보고하였다. 오죽했으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느니 자살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겠는가.
1988년 노태우 정부 시절, '삼청교육 피해보상계획'을 통해 피해자에 대한 보상계획을 수립하고 삼청교육대 입소 피해자 3,226명의 보상신청을 받았다. 그리하여 39,000여 명의 피해자 중 신청자는 4,600여 명에 불과했고, 보상금액도 몇 십만 원에서 몇 백만 원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골동네까지 득실거리던 거지가 사라지고 부랑배나 불량배들이 활개를 치지 못하고 조용히 숨어들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간첩이나 용공주의자들이 발을 못 붙이는 세상이었다. 사실 좌익들뿐만 아니라, 학교 학생들도 끌려갔으니 깡패, 양아치, 학교 일진 등도 무서워하던 시절이 바로 전두환 시대였다.
무고한 인권탄압이나 침해만 없었다면, 전과 10범, 20범이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살인범들이 감옥에서 인권을 말하는 지금, 더구나 민주시민의 질서가 사라진 지금 누가 전두환 시대를 마다하겠는가.
그러므로 한 인물의 평가는 어느 단면만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그 인물이 갖고 있는 모든 다면에서 평가를 하는 종합성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합리(合理)다. 그런 의미에서, 전두환은 ‘살인마’나 ‘독재자’라기보다는 ‘권위주의적 지도자’라고 해야 옳을 것이라 믿는다.
Ⅶ. 공과(功過) ‐ 2
3. 비자금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 사후(死後) 혼란스러운 대한민국을 안정시킨 위대한 통치자였다. 그 안정을 위해서 전두환은 군대식 철권정치를 실행하였다. 기업들은 숨을 죽이고 그의 통치 앞에 무릎을 끓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전두환은 엄청난 비자금을 챙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전두환 비자금은 대부분 노태우에게 통치자금으로 건네준 것으로 추측된다)
설혹 대기업이라 할지라도 권력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취약한지, 권력에 의해 공권력과 금융 기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준 사건이 있었다. 국제그룹 파산이 그것이다. 비록 국제그릅 파산은 국제그룹의 엄청난 부채가 그 원인이 되었겠지마는, 그 사건은 우리나라 경제계에 엄청난 유형(有形)무형(無形)의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공포에 질린 기업들의 자발적인 정치헌금이었고, 이는 고스란히 대통령의 통치자금이나 비자금으로 사용되었다. 5공세력들만이 아니었다. 대통령 되기 이전 김대중 역시 엄청난 비자금을 소유했던 것으로 일려져 있다. 이에 김대중 비자금 실체를 조사한 김영삼은 ‘나라가 망할 정도’라는 말로 비자금의 정도를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런 풍토는 대통령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신군부 혹은 일선 공무원들조차도 각자 자기 몫을 챙겼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심지어 노태우 정권의 황태자 박철언 같은 이는 어느 여교수에게 자신의 비자금 약 178억에 해당되는 돈을 맡겼다가 뜯긴 사건도 알려졌다. 어디 숨길 곳이 없어서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긴 모양인데, 2008년 박철언이 H대학 무용학과 강모(여) 교수를 고소하며 불거졌던 사건이었다. 그러니 알려지지 않은 정권의 실세들이나 일반 공무원들의 부정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흐린 윗물로 인해 아랫물이 맑을 까닭이 없었다. 대한민국은 사회 전체가 부정부패에 젖어든다. 신군부와 전두환은 3청(三淸)을 말하며 사회정화를 부르짖었으나, 우리 모두 부정의 길을 걸었다는 점은 반성해야 할 점이 크다.
정권에 충성만 한다면 모든 것, 다시 말하면 부정과 부패가 용서가 되었고, 대한민국은 위아래 할 것 없이 썩어가는 부패공화국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공무원들이 그러했으니, 필자(筆者)는 대표적인 부정부패의 사례로, 충청도 어느 마을 다리 난간을 튼튼한 나사못이 아니라 본드로 붙여놓은 짓을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공사비를 빼먹은 흔적이었다.
결국 김영삼 정권 때 발생한, 1994년 10월 21일에 일어난 성수대교 붕괴와 1995년 6월 29일에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은 그런 부정부패가 누적된 사회에 대한 경고였다.
물론 사이비 기자들의 횡포도 보았고, 경찰들이나 일부 정보기관원들의 무도한 인권침해도 수없이 보았다. 그리하여 전두환 시대를 독재로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통령에 대한 욕이나 비판만 하여도 잡아가는 공포스러운 사회, 그리고 무소불위의 권력과 그에 충성하여 이권을 챙기던 측근들과 공무원들. 그러므로 부정부패에 관한 한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는 점 명심해야 한다.
4. 88서울올림픽
전두환은 88서울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그 중의 하나가 악명 높은 화장실 개선이었다. 공중화장실의 더러운 풍경을 겪어본 세대는 아마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똥냄새가 등천을 하고 파리구더기가 들끓는 화장실. 드디어 전두환 노태우 시대에 이르러 대한민국의 화징실에는 깨끗한 물이 솟고 음악이 흐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세계 제1의 화장실 문화를 이룩한 나라가 되었다. 아마 선진국이라는 유럽 어디를 가도, 아니 세계 어디를 가도 대한민국만큼 화장실이 청결하고 깨끗한 나라는 단언코 없다. 중국도 지난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화장실 문화를 열심히 배워 간 바 있다.
88서울 올림픽은 단순히 대한민국의 역량만을 보여준 축제는 아니었다. 국민들의 의식이 개선되어 쓰레기 없는 거리, 쓰레기 버리지 않는 수준 높은 시민의식이 있었다. 버스를 타도 줄을 서고, 임신부나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는 아주머니 그리고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아름다움도 있었다.
그 드높은 시민의식이 최고로 발양될 때가 2002년 한일월드컵 때였다. 4강 대결 때, 운동장에는 대형 대한민국 국기와 함께 터키 국기가 함께 내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터키(튀르키에) 국민들은 우리 대한민국을 진정한 형제의 국가로 여기게 되었다. 승패를 떠나서, 그때 우리는 참으로 행복했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이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은 행복한 추억이 아닐 수 없다. 삶의 질이 참으로 높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 필자(筆者)는 어느 늦은 밤 버스터미널에 내린 적이 있다. 택시를 타기 위해 택시승차장을 향해 가다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화들짝 놀란 것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아니라 수없이 떨어져 있는 담배꽁초였다. 거의 꽁초의 산을 이루고 있었다. 너나없이 길바닥에 버리고 있었다.
필자(筆者)가 민주화세력들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고 있는 가장 주요한 이유가 바로 의식의 저질(低質)이었다. 선생님일지라도 학교에서건 거리에서건 아무에게나 눈 부라리고 대드는 아이들부터 욕설을 상투적인 투쟁수법으로 삼으며 소위 민주화투사라고 하는 젊은이들, 노인을 하찮은 짐처럼 멸시하고,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등, 심지어 국익을 위해 외국순방을 하는 대통령에게 ‘비행기나 떨어져 버려라’는 저질들을 우리는 민주화를 말하는 무리들 속에서 수없이 보았다. 효와 충과 질서와 예의 같은 인간의 기본도 갖추지 못한 저질(低質)들을 현재는 물론 지난 시절에 필자(筆者)는 아주 다양한 곳에서 수없이 겪고 또 겪었다.
사치와 낭비가 극심하고, 죄의식이 없으며, 기본 질서마저 붕괴된 사회를 바라보며, 지난 전두환 시대를 그리워한다면, 필자는 전두환 시대를 옹호하는 죄인일 것인가.
과거 노태우 시절까지는 그래도 효와 충을 기본으로 하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헌신과 희생, 저마다의 소질과 능력에 맞춰 노력하는, 교육의 목표가 분명한 시절이었다. 교련 과목을 없앤 김영삼이나 김대중 시대까지도 민주시민을 양성하고자 하는 교육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을 거치며 교육은 독재에 이용된다는 이유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 부정하였고, 요즘은 ‘학생들이 즐거운 학교’를 만들고자 하여 진단평가나 중간고사 같은 시험마저 부정되었다. 학교가 거대한 보육원으로 변한 것이다.
뜻 있는 국민이라면 ‘교육이 엉망이다’는 점은 누구나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우리의 자라나는 미래세대는 이런 교육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 나라의 미래가 어두워지는 이유일 것이다.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고 칭송이 자자하던 대한민국이 소위 ‘개판 사회’가 된 것이다.
지난 촛불집회에서, 차마 바로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고만 장면이 있었다. 어린아이들에게 삼성 이재용과 이명박 박근혜 사진에 화살을 쏘게 하거나 축구공에 사진을 붙여 발로 차게 하는 장면이었다. 심지어 단두대를 세워놓고 박근혜의 목을 자르는 퍼포먼스. 민주가 아니라 폭력에 혈안(血眼)이 된 민주를 가장(假裝)한 저질(低質)들이었다.
그뿐이겠는가. 일국의 대통령, 아니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대통령에 대한 추악한 욕설은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명예를 추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쥐박이, 닭년, 닭그네’라고 부르며 모욕을 즐기던 그런 촛불이 무슨 자랑이라고, 문재인은 ‘촛불 정신은 아직 진행 중’이라고 표현하는가!
그 ‘진행 중인 촛불들’이 구토가 나오는 욕을 상습적으로 한다면, 더불어민주당은 이런 욕설을 자랑이라고 보는가? 다시 한번 그 욕설을 읽어보라.
⌜김oo : 광화문 네거리에서 돌로 쳐죽여도 시원치 않을 살인마 전두환이 민주주의자라는 말에 할 말을 잃었네, 너같은 쓰레기 틀딱에게 예의 갖춰 댓글 단 내가 병신이네, 곱게 늙기는 애시당초 힘들겠고 추하게 늙지는 마라,,...(8월 19일 오후 12:26)⌟
이들이 바로 젊은이들, 바로 이 나라의 미래라고 할 때, 더불어민주당은 무엇을 할 것인가!
지난 시절 민주당은 민노총과 종북 좌파를 선동하여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잡을 때는 좋았겠지만, 이런 질적 저질성은 아마도 대한민국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나라의 혼란, 올비른 가치관과 수준 높은 국민의식의 부재(不在)로 나타난 이 나라의 암울한 현상에서, 민주당은 절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2024. 11. 24. 전라도에서 시인 정재학
'시사 일반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랄은 풍년인데 나라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0) | 2024.11.24 |
---|---|
중공의 기업침략과 국정원재건을 위하여 (1) | 2024.11.24 |
필리핀 부통령 "나 죽으면 마르코스 대통령 부부 암살하라고 지시했다"...격랑 치닫는 필리핀 정국 (0) | 2024.11.24 |
우크라 매체 "스톰섀도 공격에 쿠르스크서 북한군 500명 사망" (0) | 2024.11.24 |
이재명은 잡범 (1) | 2024.11.23 |